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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6 06:25
배반의 역사: 기독교역사는 예수에 대한 배반의 역사가 아닌가?
글쓴이 : 손규태
 
 “유월절이라고 하는 무교절이 다가왔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없애 버릴 방책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였다. 사탄이 열둘 가운데 하나인 가룟이라는 유다에게로 들어갔다. 유다는 떠나가서, 대제사장들과 성전 수위대장들과 더불어,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며, 그에게 은전을 주겠다고 약조하였다.그들은 예수를 붙들어서,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뒤따라갔다. 사람들이 뜰 한가운데 불을 피워 놓고 둘러앉아 있는데, 베드로도 그들 가운데 끼어 앉아 있다.  그 때에 한 하녀가, 베드로가 불빛을 안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빤히 노려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어요." 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을 부인하여 말하기를 "여보시오, 나는 그를 모르오." 하였다.  조금 뒤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서 "당신도 그들과 한패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보시오, 나는 아니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났을 때에, 또 다른 사람이 강경하게 주장하기를 "틀림없이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소. 이 사람은 갈릴리 사람이니까요" 니,  베드로는 "여보시오, 나는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소."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가 아직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곧 닭이 울었다.  주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똑바로 보셨다. 베드로는 주께서 자기에게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그 말씀이 생각나서,  바깥으로 나가서 몹시 울었다.
(누가 22:1-5;54-62).
 
성서에 의하면 인간의 역사는 배반의 역사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한 인간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께서 금지한 에덴동산 가운데 있는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을 배반하였다. 그는 그와 같은 배반의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서 자기의 반려자를 핑계로 내세우고, 그 반려자인 이브는 동물인 뱀을 핑계로 내세운다. 그들은 배반을 했지만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핑계를 대면서 그 배반의 죄를 면해보려고 하는 잘못마저 범하고 말았다.

성서의 증언 말고도 인류사는 배반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로마의 위대한 황제였던 율리우스 시저는 자기가 가장 총애하던 신하요 원로원 의원인 부루투스의 단검에 찔려 죽임을 당한다. 당시 로마에서는 시저가 황제가 된 다음에 그에 대한 평가가 크게 갈리고 있었다. 첫째는 율리우스 시저는 강력한 군대를 배경으로 하여 국가를 강력하게 만들고 많은 영토를 점령한 위대한 정치가라고 평가했다. 둘째는 율리우스 시저는 이러한 강력한 군대를 배경으로 하고 국정을 강력하게 밀고나감으로써 독재자가 되고자 한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지향하던 원로원(국회)에서는 강력한 지도자 시저에 대해서 독재자가 될 것을 매우 우려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저의 부하인 부루터스는 황제인 율리우스 시저가 원로원에 나타나자 가까이 가서 인사를 하는 척 하다가 시저의 가슴에 비수, 즉 숨겨두었던 칼을 꽂아 살해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황제가 독재자가 되는 것을 막고 로마의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서 그를 살해했다고 변명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가롯 유다도 스승을 배반하고 예수의 적대자였던 대제사장과 성전 수위대장과 짜고 예수를 배반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를 배반하는 대가로 은전 30량(마태복음)을 받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의 스승인 예수에게 닦아가서 그에게 입을 맞춤으로써 그를 팔아넘긴다. 입을 맞추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가장 깊은 사랑과 가장 높은 존경의 표식인데 유다는 이러한 입맞춤을 통해서 그의 스승을 배반한 것이다.

스위스의 유명한 신약성서학자인 오스카 쿨만(Oskar Cullmann)은 가롯 유다에 관한 연구서에서 그의 배반행위에 대하여 매우 독특한 해석을 하고 있다. 쿨만에 의하면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가롯 유다가 유일하게 열혈당원이었다는 것이다. 이 열혈당원들은 무력투쟁을 통해서 유대나라를 로마의 식민지에서 해방시키려는 일종의 비밀 결사체였다. 우리나라 역사와 비교해보면 국제적 협력을 얻어서 외교적으로 나라의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승만 노선과 무력항쟁을 통해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보았던 김구나 김일성 등의 노선이 존재했듯이 유대에서도 크게 보면 두 가지 노선이 병존했었다. 기득권 세력이었던 바리새파나 사두개 파들이 전자에 속한다면 잴롯당, 즉 열혈당원들이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친일파들과 같이 헤롯왕이나 그 지원세력들과 같이 친로마적 집단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오스카 쿨만교수에 의하면 이러한 무장투쟁을 통해서 민족해방을 달성하려던 열혈당원 유다는 예수의 제자가 됨으로써 예수 집단을 무장 투쟁하는 단체로 만들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가 원하던 무장투쟁의 리더가 되지 않았다. 예수는 말씀하시기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면서 무력투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친로마적 집권세력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면서도 힘찬 전쟁의 수단인 말을 타지 않고 적은 짐이나 실고 다니는 노새를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갈 때 열혈당파들이 나와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태21:9)하고 외쳐대도 크게 고부되지 않았고 단지 성전에 들어가서 장사하는 사람을 추방하고는 예수께서 그들을 두고 성 밖으로 나가, 베다니로 가셔서, 거기에서 밤을 지내셨다. 정치적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을 접수하려고 올라왔다면 거기에 진을 치고 그의 지원자들을 불러 모아야 했을 뗀데, 그곳을 떠나서 베다니로 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래서 가롯 유다는 우유부단한 비정치적 메시아인 예수를 정치적 메시아, 즉 무력으로 유대나라를 해방시킬 분으로 만들기 위해서, 즉 그가 무장봉기를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그를 유대인의 제사장에게 팔기로 결심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를 배반했다는 것이다. 즉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관원들에게 체포되게 되면 예수도 무력을 사용해서 대항하고 그렇게 될 때 유다가 목표로 했던 해방전쟁이 일어나서 로마인들을 추방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대제사장의 군대가 그를 체포하려고 하자 순순히 응했고, 그 때 예수의 일행 가운데 하나가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들 가운데 한 사람을 내리쳐서 그 귀를 잘랐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나무라면 아까 말한 대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했다. 그러자 유다는 예수의 이러한 무기력한 태도에 실망하여 그 곳을 떠나서 자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성서에는 유다가 자살한 것은 돈을 받고 예수를 판 것에 대한 참회에서 그렇게 했다고 적고 있다.). 가롯 유다의 자살은 배반에 대한 인간적 동기에서가 아니라, 무력투쟁을 통한 유대의 해방이 좌절된 것에 대한 실망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쿨만의 해석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유다의 배반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문제와 함께 인류의 역사의 깊은 의미를 가르쳐 준다고 할 것이다.
첫째 인간의 깊은 본성에는 배신이라고 하는 깊고 음습한 내면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이다. 이러한 배신이라는 인간의 내면의 세계는 비단 성서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 사람들의 비극들에서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희극들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프로이드 같은 심리학자들도 이러한 인간 내면의 깊은 어두움을 밝혀내려고 노력했다. 나는 이러한 배신이라는 인간본성의 깊이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과의 단절의 사건,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배반한 사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배신은 자기의 근원인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가 그 근원이 되고자 하는 교만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배신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을 가져온다. 거기에도 교만이라고 하는 인간적 차원, 즉 자기의 탐욕과 이익을 위해서 사람들은 사람들을 배신한다. 여기서 인간들은 동료인간에 대한 믿음에 대한 배신, 사랑에 대한 배신, 희망에 대한 배신을 자행한다. 믿고 돈을 빌려주었는데 갚지 않는 것도 배신이며, 남녀간에 사랑을 약속해 놓고도 더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선택함으로서 감행하는 배신, 젊은이에게 보다 좋은 미래를 약속해 놓고도 그것을 실천해 주지 않는 것과 같은 희망에 대한 배신들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경험한다. 여기에 대해서 시편 15편은 배신하지 않는 사람을 이렇게 말한다.

2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 3 혀를 놀려 남의 허물 들추지 않는 사람,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친구를 모욕하지 않는 사람, 4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는 자는 경멸하고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존경하면서, 맹세한 것은 해가 되더라도 변함없이 지키는 사람입니다.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않으며, 무죄한 사람을 해칠세라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배신의 역사를 통해서 그의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인간들을 배신할 수 있었던 죄악에 물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의 아버지인 야곱을 봅시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인 에서와 경쟁을 하면서 그의 뒷다리를 잡고 나왔고, 하나님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서 배고픈 에서를 이용했고, 그의 축복권을 빼앗기 위해서 아버지를 속였다. 그는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 삼촌인 라반의 집에 머물면서 그를 속이는 삼촌을 속이고, 돌아올 때는 삼촌집의 신주를 자기 아내의 사타구니에 감추어서 빼내오고, 약복강에서는 축복을 얻기 위해서 물귀신과 싸워서 환도 뼈가 부러지고, 자기에게 속아 넘어갔던 형님을 만나자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을 뵈는 것 같다”는 아첨을 했습니다. 그는 말년에 흉년이 들어서 이집트에 있는 막내아들 있는 곳으로 이민을 가서 그 곳 왕을 만나서 인사하면서 “내 나이가 100년하고도 30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창 47:9).

또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오는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도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한 형편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다시 세 번이나 내 양을 치라는 명령을 받으면서 복권되어 하나님의 구원사에 여전히 동참하는 인불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질그릇같이 깨어지기 쉬운 존재지만 하나님께서 거기에 보물을 담아주시고 구원사의 도구로 삼아주시는 사랑과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불완전하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예수를 부인하는 존재지만 그의 사랑과 은총가운데서 살아갈 때 하나님은 보잘것 없는 우리 질 그릇에 보화를 담아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가운데 살아갈 때 그의 위탁도 받고 축복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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