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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09 09:01
통일을 향한 삶과 통일 후의 삶의 형식으로서 관용
글쓴이 : 손규태

들어가는 말

세계는 지금 급박한 변혁을 경험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되어 오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동서 냉전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 들어섰다. 미국을 초극 점으로 하고 유럽과 일본을 보조 극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원리가 일반적으로 관철되고 있다. 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지구화 혹은 세계화라고 부르고 있다. 지구화는 곧 모든 영역에서의 무한경쟁의 다른 표현이다. 전세계적으로 약육강식이 오늘날 삶의 보편적 원리가 되었다.

500년 전 스페인의 콜럼버스에 의해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자본주의적 보편적 세계지배가 오늘날 지구화란 이름으로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당시 이러한 지구화가 내포하고 있는 또 하나의 함의, 하나님의 의지의 관철을 믿었었다. 하나님은 승리하실 것이다. 그는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의 우상을 쓸어버리고 그들이 자기가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다라고 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굳게 믿고 대서양을 건너서 길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화와 더불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어거스틴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도 미워했던 맘몬이며 이 맘몬의 신전이라 할 수 있는 맘몬 즉 시장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그가 쓸어버리기를 원했던 우상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서독의 저명한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점령) 50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시장이 등장했고, 이 신의 현현은 주가지수(Dow-Jones-Index), 그의 성체는 미국의 달러고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며 그의 나라는 지금 크레믈린 지도자들까지도 찬양하는 자본주의적 보편문화다.”

이러한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경쟁원리가 세계에서 전반적으로 관철될 때 앞으로 많은 문제들이 제기될 전망이다. 우선 이전의 동서 냉전체제이라고 하는 이데올로기적 대결체제에서 가난한 나라들과 부유한 나라들 사이의 남북열전체제로의 전환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경쟁원리가 이제는 선진 공업국들과 저개발 국가들 사이에서 熱戰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것이다.

이 경쟁원리에서 일차적 희생자는 이른바 제3세계 저개발 국가들과 거기에 사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여성들이다. 이들은 동서냉전체제 하에서는 이데올로기적 고백에 따라서 어느 정도 제1세계 혹은 제2세계의 지원과 보호 하에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런 장치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들은 제1세계의 노골적인 공격 앞에 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공격은 이미 자유무역의 세계적 차원에서의 관철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최근에 GATT 등 세계무역 관련 기구들을 세계무역기구(WTO)로 개편함으로써 더 이상 국민국가가 자국내의 상품들을 보호할 수 있는 영역은 사라진 것이다. 이제는 다국적 기업과 자본들이 제한 없이 어디에서나 사고 팔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세계 어디서나 관철해 나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한 것이다.

그 다음의 희생자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경쟁원리에 익숙하지 못한 이전 사회주의 권 국가들이다. 동구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이들 나라들은 적나라하게 자본주의 앞에 자기를 노출시켰으며 이들의 자본과 상품의 침투에 속수무책으로 남게 되었다. 그 결과는 이미 러시아 등 동구라파 여러 나라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관용의 역사

 

이러한 상황 하에서 유엔이 금년을 "관용의 해"로 선포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서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사라진 현실에서 관용을 말하게 된 것은 이 개념이 과거에 주로 연관되고 있던 정치적 영역을 넘어서 오늘날의 현실 즉 경제적 문제를 고려한 것으로도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서냉전체제가 사라지고 구소련의 해체과정에서 등장한 민족간 혹은 종족간의 갈등들이라고 하는 정치적 영역의 문제도 이러한 관용이라는 틀에서 고려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정치적 혹은 경제적 영역에서의 관용의 문제를 넘어서 이 개념이 가지고 있는 보다 근원적 문제인 종교적 심리적 관용의 문제도 여전히 고려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심각한 내전을 겪고 있는 유고 사태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이 관용이란 개념은 본래 종교 특히 서구 기독교적 영역에서 사용되던 개념이다. 그 시원을 파고 올라가면 신구약성서에까지 소급해 갈 수 있겠지만 기독교 역사와의 관련에서 본다면 주후 4세기의 콘스탄티누스의 전환기”(Kontantinische Wende)가 관용의 문제가 심각하게 고려되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로마제국 안에서 박해받던 종교인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관용으로 박해를 면하고 나아가서 승인된 종교 가운데 하나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서 유일하게 국가에 의해서 승인된 종교가 되었을 때 기독교는 타종교에 대해서 관용과 박해 사이를 오고 갔다. 말하자면 국가에 의해서 박해 당했던 기독교가 박해를 면하고 동시에 국가의 승인을 받은 유일한 종교가 되었을 때 기독교는 결국 주변에 있는 이전의 다른 종교들을 박해하는 종교로 정착한다. 그 후부터 기독교 외에 로마 제국 내에 있는 모든 다른 종교는 우상숭배요 멸절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다른 종교들과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적대주의는 8세기의 칼 대제(Karl der Gross) 시대에 와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칼 대제 하에서 기독교의 선교정책은 제국주의 정책과 빈틈없이 결합됨으로써 기독교 선교는 곧 타종교나 타문화의 멸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를 유일한 국가 종교로 승인했던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다른 나라와 민족들을 점령하는 정책을 펴왔다. 16세기의 식민주의에서도 그와 같은 현상이 다소 나타났지만 칼 대제 하에서의 이방민족의 정복전쟁은 전적으로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식민지 정책과 기독교의 선교정책이 이 때처럼 하나가 된 적도 드물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의 불관용 정책은 12세기의 십자군 운동을 통해서 극에 달했었다. 십자군 운동은 5세기 이래로 회교도들의 수중에 들어간 예루살렘 성지회복이라는 목표를 두고 전개된 기독교 국가들과 이슬람 국가들 사이의 전쟁이다. 사실상 5세기에 이슬람이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이전의 알렉산드리아 교구에 속해 있던 엄청난 기독교적 국가들의 영토를 점령함으로써 사실상 기독교의 영토는 매우 적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 국가들의 강력한 결속은 이전에 이슬람에게 상실한 땅을 다시 회복하자는 운동이 십자군 운동으로 나타났으나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 운동이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와 회교도들 사이에는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이러한 관용의 문제는 16세기에 들어와서 종교개혁과 더불어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면서 등장한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목숨을 건 싸움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조약(Augsburger Friede)으로 끝난다. V세에 의해서 소집되고 페르디난드에 의해서 주관되었던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했다. 첫째 이 회의는 개신교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Confessio Augustana)를 승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톨릭교회의 존속을 승인함으로써 독일에서의 신상고백상의 분열(die konfesseionelle Spaltung)을 완결 지었다. 피차 상대를 인정함으로써 관용의 단계에 들어간다. 둘째 독일 영토에서 신앙고백을 기초로 한 지역 분할도 완결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신하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영주의 종교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cuius regio, eius religio). 말하자면 프랑크푸르트의 영주가 개신교를 믿는다고 선언하면 거기에 사는 주민들은 다 개신교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가톨릭 영주가 지배하는 지역으로 이주를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끝났지만 영주의 신앙고백에 따라서 신앙고백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지역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적 관용이 성립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아우크스부르크 평화조약 1항에 보면 어떤 영주도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전쟁으로 응답하지 못하게 되어 있지만 가톨릭과 루터파에 속하지 않는 다른 개신교 종파들, 예를 들면 재세례파들이나 츠빙글리 파들에 대한 이러한 관용은 법적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조약 이후에도 재세례파 등 비루터파에 속하는 개신교인들은 계속해서 박해를 받아야 했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사이에서도 관용다운 관용의 관계는 164830년 전쟁이 끝나고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의 체결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외국의 세력들까지 끌어들인 30년간의 기나긴 가톨릭과 개신교들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있은 다음에 체결된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에 따라서 관용은 가톨릭과 루터파 사에서뿐만 아니라 개혁교파(칼빈파)에게도 확대되었으나 여타의 종파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배제되었었다.

이러한 불관용의 역사는 개신교회들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종교개혁 좌파들 특히 재세례파에 대한 개신교인들이 박해나 아르메니우스 파들에 대한 박해가 그것들이다. 이러한 불관용을 보다 못한 네덜란드의 유명한 국제법학자 크로티우스(Crotius)는 진정한 의미에서 국가 간의 평화는 종교를 통해서 달성될 수 없고 국제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기도 했었다. 종교들 사이의 불관용과 전쟁들은 사실상 종교들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 즉 사랑과 평화의 정신에서 크게 이탈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당시나 지금이나 종교가 나라와 나라,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관용을 가져다주기보다는 적대감을 부추기고 있는 예들이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북 아일랜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톨릭과 신교간의 갈등이다. 그리고 유고 연방에서 인종청소로까지 발전한 싸움은 모두 종교간의 갈등이다.

그리고 영국의 경우도 이러한 관용의 역사는 그렇게 길지 않다. 영국에서는 1688년 스튜아트 가의 전제군주정치가 명예혁명을 통해서 두 번째로 붕괴되고 나서 그 권력이 윌리암 3세에게 넘어간다. 이 때 윌리엄 3세는 의회와 협의를 거쳐서 관용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양심의 자유 혹은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말하자면 영국성공회뿐만 아니라 장로교회나 독립파 교회의 신자들에게도 관용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영국에서의 관용의 문제는 종교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서도 고려되었다. 그 첫 단계는 절대군주체제와 공화정 사이의 관용의 문제였다. 이것은 복잡한 발전과정을 거쳐서 입헌군주체제로 발전했다. 이 둘의 정치적 체제 사이의 관용적 해결이 실패한 나라들에서는 대체로 군주체제를 전적으로 폐지하고 공화제를 도입했던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등장한 민족국가는 민족의식과 이웃 민족국가에 대한 관용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치적 영역에서 관용의 문제가 다시 제기 된 것은 근대 이념국가의 출현과 연관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념국가의 출현 이후에는 동서냉전체제를 통해서 정치적 관용이 규정되었다. 이전의 민족국가 사이의 관용과 불관용의 문제들은 오히려 자본주의적이냐 아니면 사회주의적이냐 하는 판단에 따라서 해소되기도 하고 더욱 강화되기도 했다.

 

한반도에서의 관용의 문제

 

그러면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불관용은 어떤 경로를 거치면서 구형되어 왔는가? 그리고 한국사회에서의 불관용의 근원과 그 형성과정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첫째 근대적 의미에서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불관용의 기원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띠고 있다. 조선시대의 유교의 형식주의에 기초한 이론적 대립들이나 정치세력들 간의 사색당파의 분열과 세력 다툼에서도 보기 드문 불관용의 형태를 발견할 수다. 특히 조선조에 있었던 특정한 가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정치세력들 간의 대립과 적대감은 조선왕조가 이런 세력다툼들을 적절하게 조정해 낼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적은 지면에서 이러한 역사적 문제들까지 다룰 수는 없다. 근래에 와서 우리들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불관용의 뿌리는 아무래도 이데올로기적 대립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이미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독립투쟁의 목표와 방법론을 놓고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상해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에서도 외교론을 내세우는 온건파 독립운동자들과 무장투쟁을 내세우고 있는 강경파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독립국가의 목표설정을 둘러싸고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적 진영으로 갈라서면서 더욱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외세로부터 독립되었을 때 국가건설 목표를 두고 다시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사회주의적 국가를 건설하려는 세력들과 자본주의적 세력들 사이에 갈등은 급기야는 나라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주의자들과 자본주의자들 사이의 갈등과 상호간의 불관용을 극단적으로 악화시킨 것은 한국전쟁이다. 이 한국 전쟁 자체가 그러한 불관용의 결과였지만 이 전쟁은 이념적 갈등을 이론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실천적 차원에서 더욱 심화시켰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갈등은 지난 50여 년 동안 남북한 국민들 속에 내면화되었다. 사실상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불관용이 지난 50년간 한국정치와 사회를 규정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남에서는 특히 국민적 지지가 약했던 역대 정권들을 지탱시켜준 것은 이러한 남북 갈등과 상호 불관용의 이데올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남북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갈등과 불관용을 필요할 때마다 적절하게 때로는 무모하게 이용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관용의 정신을 파괴해 버린 두 번째 원인을 우리는 그 동안 남한사회를 지배해 왔던 군사독재 정권에서 생산되고 양육되었던 군사문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군사문화의 특징은 획일성과 흑백논리이이다. 획일성은 우리 사회에서 다른 도덕적 관습들, 다른 종교나 신앙들, 다른 정치적 신념이나 이데올로기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획일성은 인간의 다양한 관습, 다양한 종교적 신념,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정치적 신념을 거부하는데 특성을 두고 있다. 한 사회나 국가에서 다수의 사람들의 다원적이고 다양한 원리들을 부정하고 단지 하나의 원리만을 고집하는 것이 군사문화에서 내세우는 획일성이다. 그리고 군사문화에서 도출된 흑백논리는 획일성과 같아서 아군이 아니면 적이라는 사고이다. 따라서 인간이나 사물을 판단할 때 이러한 흑백논리적 사고는 언제나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그리고 이러한 흑백논리에서는 가치판단에 있어서도 자기의 것은 선이고 적의 것은 악이라는 도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덜 선한 것과 덜 악한 것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이 흑백논리는 이해할 수 없다. 말하자면 인간의 삶 가운데는 다양한 사고와 삶의 형식들 그리고 다양한 색채의 삶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군사문화의 특징이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적은 차이들에 대한 나르시즘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는 일차적으로 인격의 미성숙성이 곧 불관용의 뿌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군사독재시절의 반공재판들의 유치하고 어리석은 삼단논법에서 잘 나타나 있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사회다. 그대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비판했다. 따라서 그대는 공산주의자다. 이런 식이다. 이것이 이른바 적은 차이들에 대한 나르시즘이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사회에서 결정적으로 관용의 정신을 파괴해 버린 것은 남북의 분단현실에서 오는 적대감과 함께 남한 사회 안에서의 동서갈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지방색은 불관용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상대방을 파트너로 보지 않고 경쟁상대나 대결상대로 볼뿐만 아니라 때로는 타도해야할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불관용의 극단적 예는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을 넘어서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군사독재정권이 가져다 준 해악은 위에서 언급한 획일주의나 흑백논리에 기초한 적대감을 넘어서서 다른 지방의 주민들에 대한 경멸과 부정하는 태도라고 할 것이다. 그 동안 군사독재 정권들은 자신들의 결여된 정치적 합법성과 정당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지방색에 의존해왔다. 나아가서 타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치적 경쟁자들을 정적으로 취급하여 말살하려는 시도를 서슴치 않았었다. 그 대표적 예는 박정희와 그 하수인 중앙정부에 의한 김대중 납치 살해 음모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음모를 넘어서 실천에 옮겨진 가장 전근대적이고 비민주적인 작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방색에 기초한 불관용은 민주주의 발전은 물론 인권과 평화라고 하는 근대적 가치에 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관용의 표현형식들

 

우리는 그 동안 불관용의 뿌리를 남북분단과 이데올로기적 대립, 자본주의적 경쟁원리, 군사주의 문화 그리고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찾아보았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요인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불관용은 어떠한 형태로 표출되는 것일까?

첫째 불관용의 가장 낮은 표현단계는 다른 성이나 인종, 다른 생각 혹은 다른 문화를 가진 상대방을 차별하는 단계이다. 따라서 차별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을 수 있는데 남녀간의 성차별에서부터 외국인들에 대한 인종적 차별이나 타종교에 대한 차별을 거쳐서 신분상에 차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의 깊은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거기에는 언제나 불관용이라고 하는 공통분모가 자리잡고 있다. 차별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의 존재와 세계관과 인생관 그리고 삶의 형식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심리적 상태이다. 이러한 차별에 근거한 불관용은 마음 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행동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러한 불관용의 표현으로서 차별은 한국사회에서는 지방색이라고 하는 극단적 형식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러한 지방색은 경쟁원리와 군사문화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오늘날 관용에 기초한 사회통합의 가장 걸림돌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지방색은 건전한 시민의식의 함양은 물론 건전한 가치판단에도 심각한 위해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번 지자제 선거에서 표출되었던 지역주의도 이러한 불관용에 기초한 왜곡된 차별의식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불관용의 표현의 그 다음 단계는 상대방에 대한 억압의 단계이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와 다른 사상이나 인생관 혹은 삶의 형식을 갖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강제는 언어수단을 통해서 표출되기도 하지만 물리적 수단에 의존하기도 한다. 이러한 불관용은 언론들을 통해서 특정집단의 상을 왜곡함으로써 심각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군사독재 시절에 정적에 대한 정치적 억압의 양태와 강도는 그들이 얼마나 정치적 경쟁자들에 대해서 관용하지 못했는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행해지고 있는 양심수들에 대한 투옥은 말 할 것도 없고 온갖 형태의 고문과 학대는 우리가 얼마나 정치적 불관용의 시절을 살고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최근 4천억 정치자금 사건과 관련해서 전직대통령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집권 시기에 민주화운동 등에 대해서 참을 만큼 참았지만 이번 일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다고 하는 말을 공공연히 했다. 그는 민주화운동을 모든 국민이 원하는 운동으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거기에 대해서 인내를 가지고 참았다는 식의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가 바로 불관용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것은 곧 정치적 억압으로 나타났었다.

셋째 불관용의 표현의 가장 극단적 단계는 상대방을 진멸하기 위해 폭력이나 전쟁과 같은 물리력에 호소하는 단계이다. 이것은 상대방을 차별하거나 억압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자세이다. 정적을 암살한다든지 경제적 경쟁자를 제거한다든지 하는 것도 이 단계에 들어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해방정국에서 김구나 여운영과 같은 일련의 남북관계에서 이데올로기적 관용을 통해서 통일된 나라를 세우려고 했던 사람들의 암살 등이 이미 불관용의 구체적 표현이었다. 따라서 근대사에 들어와서 정치적 집단적 불관용의 가장 심각한 예는 아마도 남북한 관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남북한은 각기 독립된 나라를 세운 이후 50년 가까이 걸어오면서 관용이라는 민주적 개념을 사용할 수 있는 틈새를 전혀 남겨놓고 있지 못했다. 6.25전쟁은 불관용의 가장 극단적 예였다. 그후 남북한 정부 대표들이 몇 차례 서로 만나서 회합도 열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관용의 자세를 가지고 접근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정권 잡은 자들이 불관용했을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 사이에서 관용의 장이 열리는 것도 철저하게 차단했다. 남한에 현존하는 국가보안법이 이러한 불관용을 철저화한 가장 심각한 무기였다. 국가보안법에 따르면 상대방과 어떤 일을 도모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접촉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으며 오직 상대를 비방하고 중상하는 것만이 허락되어 있다. 상대의 사상이나 관습이나 세계관은 물론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해야 한다. 북한의 유일사상인 주체사상에 동조해서는 안 되고 김일성주석 사망 시 조문을 하는 관습도 허락되지 않는다.

 

남북관계에서 관용의 문제

 

이러한 왜곡된 남북관계를 풀어가고 피차 화해함으로써 통일의 길을 달성할 수 있는 길, 즉 관용의 길은 어떻게 마련될 수 있을까? 서로 다른 사상과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는 남북한의 국민들이 어떻게 피차 관용 가운데 민족통일의 길을 달성할 수 있을까?

우선 언급해 두어야 할 것은 피차 관용을 통해서만 오늘날의 남북간의 사상적 이념적 대결 국면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남한에는 자본주의 체제가 자리하고 있으며 북한에는 사회주의 혹은 주체사상이 자리하고 있다. 피차 자기의 이념과 정치체제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 피차 자기의 이념과 체제를 상대방에게 강요할 수도 없다. 이 때 제기되는 문제는 관용에 기초해서 다른 사상과 정체체제를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인정할 수는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필자는 가능하다고 답하고 싶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많은 선진 국가들에서는 자본주의적 정당과 사회주의적 정당이 정치적 관용 가운데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노동당과 보수당, 독일의 사민당과 기민당 등이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들 정당들은 보수건 진보건 과거처럼 대립 투쟁하지 않고 각기 국민들의 기본민주주의의 실현과 복지사회건설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명백하게 사회적 계층들을 대변하고 있지만 이들은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극단적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치적 영역에서 이미 관용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남북한의 대립관계를 관용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면 우선 행동을 취해야 할 주체는 모든 면에서 유리한 조건에 있는 강자이다. 간단히 말해서 남복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는 강하고 유리한 위치에 있는 남한 정부가 먼저 관용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말이다. 까닭은 약자에게 관용이란 곧 굴종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미쳘릭히에 의하면 강자는 관용적으로 행동하고 약자는 관용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관용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나 집단은 강자란 말이다. 그리고 약자도 그 사고에 있어서는 공격적이 아니라 관용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분명해 지는 것은 오늘날 강자의 위치에 있고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남한 정부가 먼저 관용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까닭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인 면에서 남한 정부가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지난 50년 동안 남한정부는 관용에 기초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역대 남한 정부의 통일정책만을 고찰해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론은 가장 불관용적 대북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평양에서 점심 먹고 신의주에서 저녁 먹는다.”는 것이 당시의 북진통일론의 표제어였다. 그리고 역대군사정권들은 이렇다 할 통일론을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 내용들은 대체로 북한흡수통일론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7.4 공동성명에서 합의해왔던 민족 대단결의 원칙을 남한 정부는 자유의 원칙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민족적 통일보다는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에 의한 흡수통일을 들고 나왔다. 이것은 북한정부와 인민들이 믿고 있는 사회주의 체제는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방의 체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연방정부 형태의 통일을 주장하고 있는 북한의 고려연방제 통일론보다 훨씬 더 불관용적이다.

셋째 남한정부는 관용의 자세를 먼저 취하되 거기에 까다로운 부수적 조건들을 부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관용은 무조건적인 데서 출발하는데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남한정부는 관용의 자세를 취하는 것 같으면서도 언제나 거기에 까다로운 조건들을 첨가했었다. 그 대표적인 예들이 북미협상과정에 뛰어 들어 이치에 맞지 않거나 현실성이 없는 조건들을 제시하면서 미국을 압박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경수로 회담타결과 남북회담을 연계시킨 것이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북미회담에다 역시 남북회담을 연계시키고 있다. 남북회담은 한미 혹은 한미공조체제를 통해서 실현하겠다는 것은 비민족적일 뿐만 아니라 비이성적이다.

그리고 남한정부는 진정한 의미에서 대북관계의 개선을 원한다면 민족자주의 원칙에 입각해서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할 것이다. 미국 혹은 일본과 그 동안 취해 왔던 공조체제를 포기해야 한다. 남한정부가 중국과 소련과 수교하고 있는 처지에서 북한정부가 미국과 일본과 수교하려는 일에 사사건건 장애를 설정하고 나서서는 공평하지 않다. 한반도에서 평화를 위해서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과 일본등과 수교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도울 때 비로소 남북관계의 개선도 가능할 것이다. 남한정부가 공조체제란 이름으로 견지해온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민족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남북간의 관계가 극단적인 악화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맺는 말

 

금년은 해방 50년 혹은 분단 50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그 동안 이데올로기적 대결에 기초한 동서냉전체제도 사라지고 협력의 시대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서로 원수가 되었던 나라들 소련과 미국, 미국과 중국이 국교를 정상화했으며 최근까지 전쟁을 했던 미국과 월남이 다시 수교를 맺었다. 그러나 하나의 조상과 문화를 가진 남북한의 관계는 전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 동안 남북관계는 불관용의 단계를 넘어서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해 오고 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이는 한마디로 남북한의 지도자들의 관용정신의 결핍과 함께 정치력의 부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민족의 미래라고 하는 大義를 생각하지 않고 적은 권력집단의 이기주의가 오늘날의 비극적 현실을 낳았던 것이다. 그 대표적 예는 분단현실을 자신들의 정치적 위기를 피해나가는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는 기초로 삼는 것이다. 그 구체적 예는 정권이 위기에 처할 때나 혹은 선거전과 같은 데서 사용하고 있는 이데올로기 논쟁이다. 또 다른 원인은 남북한 정치지도자들의 정치력 부재이다. 남북한의 정치지도자들이 남북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미래지향적 사고에서 출발하지 않고 과거에 얽매이는 역사인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과거의 갈등들을 끄집어내서 상처를 덧나게 할 것이 아니라 이런 갈등을 경험하지 못한 다음 세대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질서들을 창출해 주어야 한다. 남한의 현 정부는 여전히 구태의연하게 과거의 갈등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최근에 엄청난 돈을 들여서 미국에다 만들어 놓은 6.25 참전비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인들도 까마득하게 잊고 있는 전쟁,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의무가 없는 전쟁을 강제로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막대한 돈을 들여서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제 한국정부는 더 이상 불관용적 행태를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북한에 쌀을 지원하려고 하면 성실하게 인도주의적으로 지원하면 된다. 이러한 회담에서 오만과 경직된 자세는 금물이다. 북한주민들의 굶주림을 대서특필하거나 그들의 정치적 실책을 반복해서 강조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정부가 말하듯이 쌀의 원조는 인도주의적이고 동포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불일치해서도 안 된다. 한국정부는 북미협상을 지원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행동으로는 언제나 그 진행을 방해하고 있다. 일본과 북한과의 수교를 지원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일본과 북한과의 쌀 회담에 대해서도 한국쌀이 먼저 지원되어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서 그 회담을 방해하고 나섰다.

관용적 자세에서 남북문제를 풀어가고자 한다면 남한정부는 특별히 군사적 면에서 전제조건 없는 군축을 단행하는 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 계산된(calculated) 군축이 아니다. 즉 북한도 상응하는 군축을 해야만 남한도 군축을 한다는 식이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남한부터 군축을 시작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살상하고 위협하는 군사무기 즉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는 조건의 감축과 제거 없이 말로만 관용을 운운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군축을 통한 관용의 구체적 실천에서부터 남북문제의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남북문제의 모든 영역에서 해결의 열쇠는 관용이라는 성숙된 삶의 자세에서 찾아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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