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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숭고한 낭비’를 개의치 않는 ‘거룩한 열정’

삭개오작은교회 4월 29일 주일예배 설교 전문

성경본문: 마가복음 14:3-9, 루가복음 7:36-50

1. 들어가는 말

▲삭개오작은교회 김경재 원로목사

20세기에 활동했던 세계 신학계의 몇 손가락 안에드는 위대한 신학자 중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가 있습니다. 그가 남긴 설교집 「새로운 존재, The New Being」안에 저로서 평생 잊혀지지 않는 감동적인 설교가 있는데, 그 설교제목은 <숭고한 낭비,Holy Waste>이며, 그 설교의 성경본문은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 마가복음 14:3-9절입니다.

소위 ‘향유옥합을 깨뜨려 예수께 드리는 여인의 이야기’ 내용의 성경본문이 마태복음(마26:6-13)과 요한복음(12:1-8)에도 실려있고, 루가복음서(눅7:36-50)에는 사건발생의 상황을 달리하지만 전승된 자료를 루가 나름대로 특이한 관점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숭고함’에 대한 감정을 잃어버렸습니다. ‘숭고하다’(sublime)는 감정은 ‘장엄하다’(majestic)는 감정이나 ‘우아하다’(elegant)감정과는 다른 어떤 거룩한 실재체험과 연관된 독특한 인간의 감정입니다. 예술작품을 들어 말한다면 에집트 피라밋이나 중국 만리장성을 보면 ‘장엄한 건축물’에 대한 감정은 일어나더라도 ‘숭고하다’는 감정은 없습니다. 천재조각가요 미술가인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상’이나 보티첼리의 ‘비너스탄생’ 조각상을 대하면 ‘우아한 인체의 완전미’에 감탄 할 순 있어도 ‘숭고한’감정은 결여됨니다. 그러나, 같은 미켈란젤로 말년의 작품이지만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아들예수를 껴안고 비통해하는 성모마리아의 조각상 ‘피에타상’을 볼 때, 우리맘은 장엄함이나 우아함보다는 ‘숭고함’을 느낌니다. ‘숭고함’의 감정은 단순히 규모가 크거나 아름답거나 도덕적으로 완벽하다고해서 느껴지는 감정이 아닙니다. 거기엔 그 모든 감정을 초월하고 완성하는 거룩하고 신성한 것의 자기희생이라는 종교적 감정의 신비가 깃들어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너무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과학주의와, 능률적이고 효율적인 경제주의와, 거대함과 힘숭배의 거인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여서, ‘숭고함’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심지어, ‘숭고하고 거룩한 그 어떤 실재’를 체험해야 할 종교계마저도, 성공과 풍요와 거대함과 축복만을 추구하는 경향이어서 소위 ‘종교계’는 번창 할런지 모르나, 사람들은 ‘종교계와 종교인들’ 안에서 ‘숭고함’을 전혀느끼지 못합니다. 도대체 숭고함의 신비는 어디에서 유래하며 어디에 뿌리박고 있는 것인지 오늘 성경기사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2. 성경본문 주해

마태와 마가와 요한은 모두 ‘옥합의 향유병을 깨뜨려 예수의 몸에 붓는 어느 여인의 행위’가 일어난 사건시간을 예루살렘의 십자가처형이 일어나기 며칠전 예루살렘 성문에서 거리가 멀지않는 베다니마을에서 일어났다고 전합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서는 구체적으로 베다니 문둥이었다가 치유된 시몬의 집, 곧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서 였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그 집주인이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집이었고, 향유를 부은 여인은 마리아였다고 전합니다. 루가복음은 어느 부자 바리새파 사람집에서 저녁만찬에 초청받은 자리였고, 사건의 주인공은 마을에서 죄많은 여인 곧 ‘창녀생활’ 한다고 손가락질 받는 하찮은 여인이라고 소개합니다.

사건보도의 핵심은 여인이 매우 값비싼 향유병을 아낌없이 쏟아 예수몸에 붓고 설명도 없이 예수선생에게 최고의 존경과 비통한 맘을 표현했다는 것입니다.마테와 마가복음은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했고, 루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의 발에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감싸고 닦았다고 전합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동일했습니다. 첨엔 돌연한 행동에 놀랐지만 숙연한 침묵도 잠간 일뿐, 이성을 찾은 제자들은 저마다 힐난했습니다. 힐난의 핵심은 왜 그 비싼 향유를 낭비하느냐는 것입니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 구제비용으로 쓰면 훨씬 보람있는 일을 하는 것인데 왠 감상적 낭비를 하느냐고 힐난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 탐구를 한 20세기 세계 성서학자들 연구에 의하면, 12제자를 중심으로 한 예수일행은 사실 이마을 저마을 유랑하면서 간신히 하나님나라 선교를 이어가는 ‘후원단체없는 걸식유랑 단체’로서 매우 궁핍했다는 겁니다. 선교비 한푼이 아쉬운데,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치는 제자들 눈으로보면 이 여인의 행동은 글자그대로 깊은 생각없는 행동, 그저 감상에 젖은 행동, 시대의식이나 구제사업을 위한 사회윤리 의식도 없는 지극히 개인적 돌발사건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심지어, 식사에 예수일행을 초청한 연회주인장 바리새인 눈에는 그 여인의 불결한 직업과 그런 여인의 신분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용납하는 예수라는 랍비가 이해되지 않는 랍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의 태도는 또한번 제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제자들의 이구동성 일리있는 비난과 꾸중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여인의 행동을 감싸고 용인하면서 높이 평가하였다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일행을 초청한 주인공, 곧 부자였고 제법 사람알아보는 눈도 가졌던 바리새인 주인장은 사실 큰 용기와 주체성이 뚜렷한 지방유지 이었을 것인데 초청인이 무색하리만큼 예수는 직언을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는 공적으로 인정받지못한 나사렛에서 올라온 유랑하는 랍비비슷한 선생이엇고, 종교계와 당시 사회지도자들로부터 사회안정을 깨뜨리는 위험인물이라는 의심을 받던 터인데, 예수와 제자들을 초청했다는 사실자체가 엄청난 파격적 선행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루가복음 관련기사를 읽어보면, 예수는 그 저녁식사 초대자 바리새인 주인장의 용기와 호의를 칭찬하기는 커녕, 무색할 정도로, 마을 유지인 그 분의 선행의 본질이 하나님 보시기엔 얼마나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고 초라한 것인가를 일러주었습니다.

오늘의 성경본문을 심도깊게 이해하려면, 사람몸에 향유를 붓는 이스라엘민족공동에의 관습에 대해 약간 알아야 합니다.향유를 붓는 행위는 정치적으로는 왕으로서 옹립하는 제관식에 해당합니다. 임금될 사람에게 예언자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향유를 머리에 부었습니다. 둘째경우엔, 죽은 사람에게 살아있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베푸는 최상의 존경과 추모의 표현으로 죽은 시신에 향유를 붓고 발랐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서기자가 그런 종교문화사의 배경을 감안하고서 했건 않았건, 여자가 그런 의식을 갖고 했건 안했건, 결과적으로는 이제 예수가 만왕의 왕 참 메시야로 하나님에 의해 인정받고 세움받는 상징적 인침 행위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십자가에 죽어야하는 의로운 사람에 대한 살아있는 자가 드리는 마지막 향유바르는 행위를 앞질러 행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아직 눈먼 제자들은 일주일후에 닥칠 십자가 사건을 모른 채 좋은 꿈을 꾸고 있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위 속에서 당신이 만인의 희생제물로서 죽어야 할 그 길을 가야한다는 각오를 다시한번 단단히 하는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향유옥합을 깨뜨려 흐느끼며 예수 몸에 바르는 죄많은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서만 오가는 피할수 없이 닥쳐올 비극적 고난사건에 대한 예감에서 이심전심의 교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회의 바닥에 사는 민초는 역사의 큰 해일이 일어나는 것을 가장 예민하게 먼저 느끼는 것입니다. 사회의 상층부 사람들만이 그것을 못느끼지요.

3. 숭고한 낭비는 거룩한 열정이 동반되는 생명세계의 가장깊은 비밀

오늘 성경은 우리들에게 종교적 진리세계, 참다운 영성, 정말 궁극적인 것이 지니는 아름다움과 비애의 양면적 역설, 그리고 참다운 새로움과 창조성을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하는 자기희생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첫째, 오늘의 멧시지는, 신앙세계에 깊이 들어가려면 일상적인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이나 평면적 사고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매우 고상하고 마땅히 그리해야하는 도덕적 가치세계마저도 넘어서는 면이 있다는 것을 성찰하라는 것입니다.

거듭말하지만, 제자들이 여인에게 한 비판과 힐난은 일상성에서 보면 당연히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세계란 그런 실용성, 합리성, 도덕성, 사회성의 측면에 머물면 절대 깊이의 차원, 은혜의 차원,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놀라운 거듭남의 차원에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실수 없고, 그저 크게 흠잡을 일 없는 보범적 종교인은 될수 있겠지만, 폭풍이 몰아치는 태풍 한가운데를 지나 절대평강에 이르는 신앙의 깊은 경지를 영원히 모르고 일생을 마치게 됨니다.

둘째, 오늘 멧시지는 고귀한 생명의 탄생, 특히 영적으로 거듭나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탄생은 엄청난 희생과 ‘숭고한 낭비’를 필요로 하고, 하나님 창조주의 어리석은 창조적 모험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눈을 들어 자연계를 깊이 들여다보면 전통적인 합리성이나 능률성이나 효율성의 잣대로는 도저히 이해되지않는 현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는 오늘의 우주천문학을 통해서 이 물리적 우주시공이 얼마나 넓고 광대한 것과, 억천만개의 별들이 허허막막한 우주속을 팽창해가고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생명이 살고있는 녹색행성은 아직까지는 지구외에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구행성 한 개를 위하여, 밤하늘에 은빛 가루를 뿌려놓기 위하여 창조주는 억천만개 천문세계를 만들었다고 보아야하는가요? 우주 창조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낭비’없이는 존재불가능 합니다.

앨러스카 강물줄기를 따라 수백만 마리 연어떼들이 몇 년동안 대해양 바다에서 살다가 모천회귀본능에 이끌려 알을 잔뜩 품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수천마일 강을 거슬러 올라와 강물자갈밭에 알을 낳고 수정란을 만든후 죽습니다. 그런데, 얄밉게도 바다 갈매기란 놈이 아직 알에서 부화하지도 않는 수정된 알을 낼름 낼름 강바닥 자갈밭까지 뒤져가면서 집어 먹습니다. 한 마리 어미연어가 몇마리 새끼연어 치어를 다음세대에로 이어가게 하기위해 그 많은 수고와 먹이사슬에 희생이 되는 ‘거룩한 낭비’를 보면 알버트 슈바이쳐가 말하는 생명외경의 마음을 아니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연속에서 보는 신비는 생명이 존속하고, 새로운 생명이 이어나가는 창조적 진화를 위해서 생명은 ‘거룩한 낭비, 숭고한 낭비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진실입니다. 생명출현의 신비한 우주대자연이 오로지 <우연과 필연> 혹은 <이기적 유전자의 맹목적 욕망> 때문에 발생하고 지탱되다는 유물론적 과학자들 지론은 과학자의 객관적 진리설명같이 들릴런지모르겠지만, 신앙지닌 과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영적으로 눈먼 과학이라고 봅니다.

셋째, 숭고한 낭비가 이뤄지는 것은, 부자가 쓰고남은 재산으로 맘껏 한턱 쓰는 호화판 파티나, 축구, 야구 세계대회우승팀이 우승을 맘껏 자축하기위해 비싼 샴페인을 터뜨린다거나, 로마시대 귀족 원로원들이 가난한 민빈들에게 금화를 던져주고가는 생색내는 ‘자기과시의 낭비’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낭비, 숭고한 낭비’는 그 여인이 몸을 팔아 일생 모아둔 돈으로 장만한 것이든, 예수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이든 가장 정결한 맘으로 전 존재를 드려바치는 희생제물로서의 뜻이 담겨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넷째, 숭고한 낭비, 거룩한 낭비는 억지로서 한다든지, 의무 때문에 한다든지, 그 행위에 대한 금생 혹은 내생의 보상을 기대하면서 하는 행위가 아니라, 무엇인가 무조건적인 것에 그의 심령이 감동되고 붙잡혀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않되기 때문에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적 삶에서 ‘거룩한 낭비, 혹은 숭고한 낭비’에 가까운 행위를 우리는 자식을 사랑하는 무조건적인 부모사랑이나, 연인간의 순수사랑에서 부분적으로 맛봅니다. 그것은 계산적 사랑도 아니요, 보상을 바라는 기대가 있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자식과 애인이 혹은 부모가 사회에 없어서는 않된 훌륭한 재능과 공헌을 할 인물이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가 있다면 사랑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아가페’라고 부르며, 성서가 전하는 신비자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 가슴에 불타는 가장 신비한 속성이라고 성서는 증언하는 것입니다.

나는 작은 교회 원로 목사로서, 고맙고 감격스러운 일을 경험하는 축복속에 살아갑니다. 회원 숫자도 얼마 않되고 회원들 가정경제사정이 풍성한 것도 아닌데, 에스더회가 조직된지 얼마 않되어 제단의 꽃꽂이를 주일마다 새롭게 바꾸어가는 정성어린 봉사를 하겠다는 다짐을 듣고 보면서, 원로목사로서 감사와 염려의 맘이 되었습니다. 염려라는 것은, 우리도 예수의 열두제자들처럼, 똑같이 비슷한 쟁점토론을 거칠 것이라고 걱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주일날 딱 한두시간 예배드리는데, 매주 낭비와같이 생각되는 꽂꽂이를 꼭 해야하는 것이냐? 우리 맘자세가 문제이지 형식이 꼭 중요한 것이냐? 그 돈을 모아 정말 더 어려운 우리사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주님의 참 뜻이 안겠는가? 등등, 좋은 뜻에서 여러 가지 이견이 에스더회원들간에나 전체 회중 교우들 사이에 나타날 것인데, 어떻게 신앙적으로 잘 극복할 것인가?

아무도 그 고민거리를 목사에게 물어온 사람은 없었지만, 그리고 지금은 신앙적으로 잘 극복하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만약 원로목사에게 물어온다면 나는 확신을 가지고 대답해줄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신앙의 동기가 순수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면, 전재산을 팔아 보화가 묻힌 밭을 산 농부처럼 복음이 그렇게 좋아서 그리하고 싶다면, 주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비록 작지만 성별된 예배장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들었다면, 비록 낭비한다고 힐난하는 사람이 있을 지라도 두려워말고 에스더회원들이여 정성껏 매 주일마다 싱싱하고 아름다운 꽃을 주님앞에 바치라고 격려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단에 한번 바친 꽃은 시들때까지 비록 주준에 와서 보는 사람이 없을 지라도, 주님께 드린 꽃이니 제단에서 그 꽃을 옮기지 말고 그 곳에서 시들게 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마지막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 인생여정에서, 때론 우리 맘속에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달아올라서, 어리석을 정도로 한편으로 보면 맹목적일정도로 숭고한 낭비와 거룩한 낭비를 시간을 드리는 헌신에서, 재물을 드리는 헌신에서, 재능을 드리는 헌신에서 더 많이 여러번 드리는 경험을 하는 축복을 누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우리를 위해서 ‘거룩한 낭비중에서 최고 낭비인 당신 몸을 송두리째 주셨고, 오늘도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을 차마 놓지 못하시고 거룩한 낭비를 지속하는 것이 창조세계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옥합을 깨뜨려 무조건 예수 몸에바르고 머리털로 씻는 여인의 저 깊은 심정을 모르고, 합리성과 효율성과 도덕성의 수준안에서 힐난하는 제자들과 같은 심정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서 나는 결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라, 예전의 나는 지나가고 새피조물이 되었다”는 환희와 감격과 열정적 축복신앙을 사는 교인을 본적이 없습니다. 설교자는 삭개오교인 모든 신도들이 저 베다니 마을 그날 저녁의 여인처럼, 거룩한 사랑의 열정에 가슴이 벅차서, 숭고한 낭비를 한다고 비난받는 경험을 많이 하고 일생을 살아가는 복된 신앙순례자 되기를 축복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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