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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응진] 임마누엘의 참뜻

한신대·기독교교육학과 교수

대학교회설교
1999. 12.12.
'임마누엘'의 참뜻
(이사야 7:13-17, 8:5-10, 마태 1:18-23)
윤응진

1. 들어가는 말

한신대의 마크의 한복판에는 '임마누엘'이라는 히브리어가 자리잡고 있다. 옛 한국신학대학 시절의 마크는 '임마누엘'이라는 히브리어로만 되어 있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임마누엘'은 성서적 신앙인들의 기본적인 확신이었으며, 또한 이른 바 '한신성'의 토대를 이루는 기본적인 신앙이다.

그럼 이 신앙고백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신앙고백은 혹시 어떤 특권의식을 반영하는 것은 아닌가? 혹은 인간들의 생각과 행동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오늘 '임마누엘'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 지니는 의미를 함께 숙고하려 한다.

2. 임마누엘의 표징

시대적 상황

기원전 734년에 아시리아 왕 티글랏빌레셀 3세는 아시리아에 저항하는 시리아(아람)와 팔레스틴 국가들의 저항운동을 기습원정을 통하여 분쇄하였다. 티글랏빌레셀 3세는 이집트 국경까지 그의 세력을 확장하였다. 따라서 이제 아시리아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시리아와 필레스틴 국가들 사이의 대동맹이 필요하였다. 시리아와 이스라엘(에브라임)이 동맹을 맺었고, 아마도 그들은 상업로를 장악하고 있던 남왕국 유다를 그 동맹에 가담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유다왕국을 동맹에 합류시키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들은 원정을 감행하여 그들과 같은 저항노선을 따르는 사람을 유다의 왕위에 앉히기로 결정하였던 것 같다(사 7:6).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동맹군은 유다 왕국에 뼈저린 패배를 안겨주었다(역하 28:5)(국제성서주석, 20-1, 129). 그러나 동맹군이 예루살렘 도성을 정복할 수는 없었다.(사 7:1)

오늘의 본문은 아직 이러한 동맹군의 원정이 실행되기 이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리아가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다 왕국의 왕이던 아하스와 백성의 마음이 몹시 불안하여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렸다."(7:2)

-> 여기에서 특히 왕실과 밀접한 관계에 있고 나라 살림을 책임지던 대토지 소유자들, 즉 부유한 계층의 불안은 이해할 만 하다. 새 왕이 임명될 경우, 통치권을 지닌 왕가 구성원 전체의 전멸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예언자 이사야는 왕을 만나 오직 하나님만 믿고 든든히 서라고 예언한다("너희가 믿음 안에 굳게 서지 못한다면, 너희는 절대로 굳게 서지 못한다!"- 이사야 7:9b). 이사야는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정치적 사회적 불의와 불경건에 대하여 공격하고 심판을 경고한다. 외부의 적은 머지 않아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한다(이스라엘은 13년 만에, 시리아는 3년 만에 멸망한다.).
그러나 아하스왕은 이사야의 충고를 완곡히 거부하고 동맹군보다 더 강한 왕국인 아시리아 왕국에 구원을 청한다.

임마누엘의 표징:

이사야는 우유부단한 왕 아하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 위에 굳게 서기 위하여 하나님께 '징조'를 보여달라고 간청하도록 제의한다(7:11). 그러나 아하스는 "저는 징조를 구하지도 않고, 주님을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12)라고 이사야의 제의를 완곡하게 거절한다. 겉으로 보아서 아하스의 말은 옳은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경건을 가장한 불신앙이다. 아하스는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추구하기보다는 자신의 뜻대로 행하면서도 경건을 가장하여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아하스는 이미 성전과 궁중에 있는 금은 보화를 모두 아시리아 왕에게 바치고 구원을 요청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열왕기하 16: 7에 따르면 그는 앗시리아의 왕 티글랏빌레셀 3세에게 전령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요청한다: "나는 임금님의 신하이며 아들입니다. 올라오셔서, 나를 공격하고 있는 시리아 왕과 이스라엘 왕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이처럼 강대국에 대한 치욕적인 굴종을 통하여 동맹군의 위협을 극복하려 한 것이다.

그는 또한 급박한 역사적 위기에 직면하여 초조와 불안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불에 태워 희생제물로 바친 적도 있으며(왕하 16:3), 시리아의 제단 모형을 본떠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등 이방 풍속을 받아들이기도 한 불신앙의 인물이었다.

아시리아에 대한 정치적 굴종은 아시리아의 국가 신들을 인정하는 종교적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므로 정치적 관점에서 매우 현명해 보이는 조치도 신앙의 눈으로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사야는 아하스의 속셈을 알아채고 분노하여 외친다:

"다윗 왕실은 백성의 인내를 시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제 하나님의 인내까지 시험해야 하겠습니까?"(13)-> 이것은 최근 몇 년 동안 시리아-팔레스틴의 독립 동맹과 아시리아 제국 사이의 갈등과 대립에 직면하여 아하스의 정책이 갈피를 잡지 못함으로인하여 백성들이 고난을 겪은 것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은 이제 정치지도자 아하스에게 유다왕국을 맡겨두었던 유예기간을 철회하고 직접 역사에 개입하여 심판하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하나님의 인내가 다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왕이 원하든 않든 하나님은 친히 한 징조를 보여주신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히브리어는 '알마', 희랍어로 번역된 70인역에는 '처녀')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라고 할 것입니다."(14) -> 이것은 학자들 간에 가장 논란이 많은 구절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예언은 확고하게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서 학자들은, 이 구절을 예수의 처녀탄생 설화에 관련시키는 것은 해석학적 오류에서 기인한다고 본다(류형기 편, {성서주해}, 제2권, 423).

임마누엘이 누군지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아하스처럼 하나님을 멀리하고 강대국 앗시리아를 믿는 불신앙적인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느낄만큼 하나님과 일체감을 지니고 있는 신앙의 인물을 의미할 것이다.

임마누엘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어떤 학자들은 왕이 낳을 아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으며, 중세의 유다교 율법학자들은 '젊은 여인'을 이사야의 아내로, 그리고 태어날 '아기'를 아사야의 아들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을 입증할 근거는 없다. 오토 카이저라는 성서학자는 이 구절에서 이른 바 '집단적 해석'을 시도한다(국제성서주석, 20-1, 146). 즉 이미 이사야가 반 유다 동맹국들의 실패에 대해 예언했듯이 동맹국들의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므로, 지금 임신한 여인들은 무사하게 그들의 아들들을 낳게 될 것이며,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아들들에게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을 분별할 나이(20세?)가 되기 전에, 유다를 공격하는 두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것이다. 즉 '임마누엘'이란 적국으로부터 민족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이다.

8:8-10

여기에서 사용된 '임마누엘'은 7: 14에 예언된 특정 인물을 지시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신앙고백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신앙고백은 민족의 위기에 직면해서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구원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확신과 희망을 담고 있다.

이 부분은 시편 46편의 내용과 유사하다.
<시편 46>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우리의 힘이시며,
재난이 있을 때에는
우리 곁에 계시는 구원자이시니,
땅이 흔들리고 산이 무너져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이 소리를 내면서 거품을 내뿜고
산들이 노하여서 뒤흔들려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1-3)
............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시다.(7)....."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 "하나님께서 날개를 펴셔서 이 땅을 보호하신다."(8:8) 따라서 외국군대들의 침략이 유다를 멸망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패망하고 말 것이다. 이 신앙고백에는, 민족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불신앙과 부정부패라는 통찰이 담겨 있다.

유다 왕국이 최대의 곤경에 처했을 때, 왕 아하스는 아시리아 제국이 그들의 구원자라고 여겼으나, 이사야는 '임마누엘'의 표징을 통하여 아하스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는 곤경에 처한 유다 백성과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고난을 겪게 되면, 하나님보다는 다른 것들에 의존하게 된다.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했을 것이라고 여기고, 하나님은 기껏해야 죽은 후 '천당'에서나 만나게 될 것이라고 여긴다. 세속적인 일들은 세속적인 방식으로, 정치적인 일들은 하나님의 도움없이 정치적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역사의 주님이신 하나님 야훼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신다.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과 세계의 역사를 지배하고 계시다. 특히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곧 '임마누엘'이다. 우리는 잠시도 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벗어나 사고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치가들이나 지배자들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잊고 스스로의 전략으로 위기를 돌파하려 한다. DJ정권도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추구하기보다는 정략적 술수들을 좇다가 그 결과 각종 실책들이 발생하고 있다.

3. '임마누엘'의 시대

예수의 탄생에서 마태복음 기자는 '임마누엘'의 표징을 보았다. 한 아기의 탄생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메시지를 읽었던 것이다. 비록 그가 인용한 이사야서의 구절이 직접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의 탄생에서 진정한 '임마누엘'의 표징, 즉 역사 안으로 개입하여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다.

예수는 요쉬아(Josua '야훼는 구원이시다'- 예수시대에는 Jeschua로 발음되었으며, 갈릴리식 발음은 Jeschu였음)라는 히브리어의 희랍어 음역이다. 당시 예수라는 이름은 유대인들의 이름 가운데 가장 흔한 이름의 하나였다. 이 흔한 이름을 지닌 한 아기에게서 지금 마태복음 기자는 매우 비상한 하나님의 섭리가 시작되었음을 신앙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신앙고백은 당시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가던 작은 나라, 유다의 고난과 희망을 전제로하여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바로 유대인의 모습으로 역사에 등장한 예수에게서 우리는 유대인의 구세주만이 아니라 인류의 구세주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받는 유대 민족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함으로써 인류를 위한 '임마누엘'의 표징이 되었다.
이제 이 아기 예수를 통하여 역사에는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새롭게 시작된 이 역사를 '임마누엘'의 시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기독교 역사 및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는 종종 '임마누엘'의 표징을 왜곡시키는 일들이 발생하곤 하였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역사의 무대로부터 은퇴시킴으로써, 역사 속에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을 죽음이후에만 만나게 되는 옥황상제나 염라대왕으로 간주하였으며,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슬로건만을 내세, 인간의 온갖 관심을 죽음이후로 돌리게 하였다. 그 결과 이 땅 위에서 발생하는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은 하나님 없이 해결하고자 하였으므로, 국가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 하기보다는 교활한 책략들을 찾아내는 데에 몰두하였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거부된 공간과 시간은 온통 인간들의, 무엇보다도 지배자들의 음모와 책략들로 채워졌다. -> 이런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 없는 성탄절 축제를 즐기게 될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간혹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언급할 경우, 하나님은 지배자들이나 부자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생각과 행동, 그들의 억압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하나님으로 이해되었다.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주 망각되었다. 이런 경우에 성탄절 축제는 지배자들, 부자들, 백인들, 남자들의 자기도취적 축제로 전락하고 만다.

새 천년이 며칠 남지 않았다. 첫 번 째 '새 천년'은 바로 '임마누엘'의 표징으로 시작되었다. 새 천년의 과제는 다름 아니라 바로 망각되었던 혹은 왜곡되었던 '임마누엘'의 신앙고백의 참된 의미 회복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는 역사 한 복판에서 지금도 살아계신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

임마누엘의 표징은 결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표징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정당화하고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미성숙한 태도에서 벗어나, 이제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즉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역사를 변혁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사역에 '함께'하는 성숙한 신앙인들로 거듭나야 한다!

예수는 친히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바로 그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숙한 삶을 보여주었다. '임마누엘'의 표징으로 태어나는 아기 예수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앞에서, 바로 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초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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