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산티아고 영성순례기] 프롤로그: ‘까미노 데 산티아고’
이대희 목사·강릉선교감리교회 담임

입력 Nov 19, 2013 09:10 AM KST
이대희 목사(강릉선교감리교회)는 안식년을 맞아 그의 아내 천미경 사모와 중학교 2학년 아들 세빈이와 함께 2012년 8월 24일부터 9월 27일까지 스페인의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찾아  800Km에 이르는 도보순례길을 걸었다. 이대희 목사는 산티아고 영성회복 여정에서 그가 입은 은총을 본지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편집자주
 
 
 
 
 
 
스페인, 정열의 나라, 투우와 축구, 가우디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이다. 이 나라의 서북부 끝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있다. 이 산티아고라는 도시로 향하는 순례의 길을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라 한다. 산티아고는 야고보 사도이며, 까미노는 길way이란 뜻의 스페인 말이다. 
 
전설에 의하면 순교하기 전 야고보 사도는 땅 끝으로 선교여행을 떠난다. 선교의 결과는 참담했고 실패 후 돌아간 예루살렘에서 열 두 사도 중 첫 번째 순교의 반열에 선다. 순교한 야고보의 유해는 배에 실려져 바다를 여행하다가 스페인의 땅 끝 해안가에 이르게 된다. 
 
이 해안가에서 내륙으로 100여 킬로미터 들어 간 곳에 무덤을 만들었지만 야고보 사도의 무덤은 오래도록 기억되지 못하였다. 이 후 9세기경 별빛의 인도함을 받은 몇몇의 수사들은 별stella빛이 비추는 들판compo에서 야고보 사도의 무덤을 발견한다. 당시 그 지역의 군주였던 알폰소 2세는 그 곳에 성당을 건축하고 후로 그 마을의 이름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compostella가 된다. 이 후로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야고보 사도의 무덤이 있는 이 산티아고로 순례의 길을 나선다. 이 순례의 역사가 천년을 훌쩍 넘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 스페인 북부의 바닷가 길, 포르투갈에서 올라오는 길, 그리고 프랑스로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가는 길 등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길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도시인 생장피드포르라는 프랑스 도시에서 출발하는 800여 킬로미터의 프랑스길이다. 샤를대제나 나폴레옹이 넘기도 했고, 더 멀리는 로마의 아우구스트 황제가 지나기도 했던 길이다.
 
물론 그들의 목적이 순례는 아니었다. 유럽의 순례자들은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각각 자신의 지역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수개월을 걸어 생장피드포르에 도착하는 것이다. 실제로 피레네산맥 정상에서 만난 네덜란드의 노부부는 4개월째 걷고 있다고 하였다. 벨기에 청년은 2개월을 걸어 도착하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800킬로미터가 오히려 짧게 느껴질 정도이다. 하지만 800킬로미터가 결코 만만한 길은 아니다. 하루 20킬로미터씩 걷는다하여도 40일이요, 30킬로미터씩 걷는다하면 27일 정도가 소요되는 먼 길이다.
 
교회에서 안식년을 지내게 된 나는 아내와 중학교 2학년생인 아들과 함께 이 까미노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강릉에서 개척한 지 만 7년이 되었다. 안식년을 지내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성도들도 있지만 탐탁치 않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닌 만큼 까미노에서 부어질 은총을 기대하며 기도하였다. 큰 교회의 목회자들이든지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이든지 안식년을 지내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목회의 여정에서 지친 심신과 갈급한 영혼의 회복을 위해서는 쉬어 갈 로뎀나무가 필요했다. 그것이 안식년이었고 안식년을 더욱 복되게 한 것이 까미노였다. 걷는 길에서 찬송을 하고, 묵상을 하며, 침묵을 하며, 기도를 하고, 대화를 하고, 하늘을 보고, 들판을 만나며 위로를 경험하였다. 까미노를 걸으면서 짊어지고 가던 짐들을 조금씩 버리고, 짐보다 무거웠던 나의 몸이 가벼워지는 만큼 영혼의 깊이는 더욱 깊어가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내와 아들과 함께 걸으면서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 되었다. 까미노 위에서 만난 이들은 삶의 파격 위에 있었다.
 
까미노를 걸어가는 순례자들은 지팡이를 들고 배낭을 메고 챙이 넓은 모자와 조가비 장식을 한다. 그것은 전형적인 순례자의 모습이다. 지팡이는 지친 몸을 지탱해주며, 가파른 내리막길에서는 지지대가 되어주며, 야생의 짐승을 만날 때면 보호 도구가 되기도 한다. 햇빛이 강렬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그늘 없는 곳에서 걷기 위해서는 챙이 넓은 모자는 반드시 필요하다. 배낭에는 최소한의 의류와 비상식량과 개인 소지품들을 담는다. 배낭이 무거워질수록 길은 힘들어진다. 
 
조가비에는 전설이 있다. 순교한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산티아고 해변에 도착할 즈음 배는 풍랑을 만나 난파하였는데 야고보 사도의 관에 수많은 조가비들이 붙어 있어서 해안가에 안전하게 닿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순례길을 다 마친 이들에게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완주를 증명하는 조가비를 주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그 조가비가 순례자의 상징이 되어서 산티아고로 떠나는 순례자들이 조가비를 배낭에 매어 걸고 출발한다.
 
순례자들은 하루 걸음을 마치면 마을을 찾아 그 마을에 있는 알베르게(숙소)에 머물게 된다. 많게는 수 백 명, 적게는 수 십 명씩 묵을 수 있는 공동숙소이다. 하룻길을 걷고 난 후, 지친 몸과 마음을 의지하는 놀라운 은총의 안식처이다. 자그마한 침대 하나가 전부이지만, 그 침대에서 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지 순례자들은 안다. 알베르게에서는 즐겁고 유쾌한 일들을 만나게 된다. 
 
전 세계 각지에서 떠나 온 순례자들의 사연을 듣게 되고 그들과 식사도 하며 필요한 것을 돕기도 한다. 길을 가다보면 어느새 알 수 없는 동료애가 형성이 되어서 마지막 산티아고 도착하면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에 헤어짐의 시간을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이 알베르게는 처음부터 숙소가 아니었고 순례자들을 위한 구호시설이었다. 물론 잠자리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순례자들은 까미노를 걸으며 크고 작은 부상과 질병에 시달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돌보아주던 시설이 바로 오스피탈hospital이었다. 알베르게의 관리인을 오스피탈레로라 부른다. 어느 마을에서 핀란드 출신의 중년 부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발의 고통을 호소하였다. 그녀를 데리고 마을의 보건소에 안내하여 진료를 받았는데 의사들도 안타까워할 만큼 상처가 컸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서 발가락에서부터 발뒤꿈치까지 벗겨지지 않은 곳이 없었고, 발뒤꿈치의 뒷부분 아킬레스 근육 있는 부분 또한 벗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 위에 밴드와 거즈를 아무렇게나 붙여 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떼어 낼 때의 처참한 모습은 말로 설명할 길이 없다. 이처럼 순례자들은 수많은 난관과 고통스러운 경험을 만난다. 결국 순례의 길을 포기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무역, 전쟁, 왕래 등 길은 다양한 목적이 있다. 그런데 까미노 데 산티아고 길의 목적은 순례이다. 마음의 소원을 담고 걷고 또 걷는다.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걸었던 그 길, 이집트인을 죽이고 망명길 떠나며 정처없이 떠났던 모세의 길, 이세벨이 죽이겠다고 공언했을 때 도망하며 40주야를 걸어 호렙산에 도착했던 엘리야의 길, 어릴 적부터 아버지 따라 예루살렘까지 걸어갔던, 마침내는 십자가의 길이 된 그 길을 걸어가며 당신이 길이라고 선포하시던 주님의 길. 우리는 오늘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까미노 위에는 부르심과 은총, 인간의 나약함과 의지가 가득하다. 내가 가는 길이 곧 까미노다. 그 곳에 은총이 가득 부어지고 있다. 기쁨과 슬픔, 상처와 위로, 불평과 감격이 끝없이 일어나는 까미노였다. 이 까미노에서 만난 수많은 은총의 화살표를 결코 잊을 수 없다.(사진제공= 이대희 목사)
 

관련기사

오피니언

기자수첩

[시론] ‘크리스찬’(?) 고위 공직자의 비리

고위공직자들 중에 개신교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꽤 많다. 이명박 '장로' 대통령 집권 당시엔 아예 소망교회 인맥들이 정부요직을 차지하기도 했었다. 부디 이 분들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