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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타스

[손규태 칼럼] 박근혜 대통령의 종파적 성격

입력 Jul 31, 2014 07:39 AM KST
▲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본지 편집고문) ⓒ베리타스 DB

근래에 와서 박근혜대통령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특히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 하는 말과 행동들을 보면서 더욱 그러하다. 그가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책을 갖지 않은 정치인이거나 보통 사람이라면 어떤 언행을 하건 우리는 별로 신경 쓸 일이 없다. 그러나 그가 한 나라의 수장으로서 국가와 국민의 삶에 대해 책임적인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의 언행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다수의 국민들은 그의 최근의 언행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큰 문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고 할 때 윤리학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그 사람의 인품(격)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그 사람의 능력에 관한 것이다. 인품에 관한 것은 말 그대로 그 사람의 개인적 품격(personal ethos) 혹은 도덕적 품격에 관한 것이고 능력에 관한 것은 그 사람의 재능(real ethos)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도구적 이성에 가치를 두는 자본주의적 업적시대에는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대부분 그 사람의 인품보다는 능력과 성과물에 역점을 두고 있다.
필자는 여기서 우선 박근혜의 사람됨에 관해서 생각해 보겠다. 박근혜는 매우 복합적인 과거를 가진 인물이다. 그는 군인인 박정희의 딸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은 아버지가 군사 구테타를 일으켜 민주주의의 헌법을 유린하고 권력을 탈취하고 철권으로 통치하던 기간이었다. 그는 청와대라는 비교적 밀폐된 공간에서 자랐으며 따라서 다른 평범한 어린이들처럼 개방적 사회화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는 고등학교 교육도 비교적 폐쇄적인 가톨릭계통의 수녀들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받았다. 그리고 박근혜는 같은 계통의 대학교에서 개방적인 인문학이 아니라 폐쇄적인 자연과학을 공부했다. 따라서 그는 가정환경에서나 교육환경에서나 폭넓은 세계성이나 개방성을 경험했다고 보기 힘들다. 동시에 그에게는 이 개방성의 토대가 되는 인문학적 소양, 특히 인간의 비판적 이성이나 보편적 이성이 자리할만한 공간은 매우 적어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비판적 이성이란 오늘날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고 있는 과학이 만들어 놓은 인공의 세계와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에 대한 모순들을 볼 수 있고 개선하려는 의지를 말한다.
그는 가정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다. 어머니는 일찍이 괴한의 흉탄으로 사망하고 장기독재를 획책하던 아버지는 부하의 총탄에 비명횡사했다. 어머니는 비교적 자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박근혜는 그에게서 오늘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시되는 감수성이나 동정심 같은 것은 별로 배우지 못한 것 같다. 아버지 박정희는 자식들에게 별로 본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철권 통치자였다. 18년이나 지속되던 박정희 독재정권이 붕괴되고 민주화과정이 진행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근혜는 특별한 자기역할을 찾을 수 없었고 거의 두문불출하다시피 지냈다. 이 때 박근혜는 종교에 귀의하는 것을 놓고 깊이 고민한 것 같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 박근혜와 같은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되면 흔히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도 꽤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박정희처럼 전혀 종교적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박근혜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아버지에게서 자기도 모르게 권력의지, 권력 지향적 성격을 물려받은 것 같다. 그는 은둔생활의 와중에서도 와신상담 그의 권력의지의 실현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기회는 마침내 한나라당이 노무현대통령을 탄핵함으로써 불어 닥친 역풍에 밀려 지리멸렬상태에 빠진 당을 구출해 내는 데서부터 주어졌었다. 박근혜는 여의도에 천막당사를 만들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실현보다는 박정희라는 절대 권력자를 갈망하고 추종하던 낡은 보수 세력들을 모아서 지금의 새누리당의 전신을 재건하는데 성공한다.
최근 박근혜가 정치가로서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보여주는 언행이랄까 행태를 보면 그가 성장기에 체득했던 것들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그가 행한 수많은 인사, 국무회의 주재방식, 정치지도자들, 특히 야당지도자들과의 만남, 국민들과의 소통 등에서 그는 일반인들의 상식에서는 통하지 않는 생태를 보여주었다. 그가 윤창중이라는 사람을 청와대 대변인으로 임명했을 때 사람들은 아연실색했었다. 그리고 그가 지극히 무능해 보이는 총리로부터 국무위원들을 제청했을 때 사람들은 또 한번 놀랐다. 특히 경직된 올드보이 김기춘을 비서실장으로 인간 냄새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남재준을 국정원장으로 임명했을 때 더욱 놀랐다.
그리고 국무회의를 주재할 때 박근혜는 써가지고 나온 원고를 읽는 것으로 지시사항을 전달하면 각료들은 초등학생들처럼 받아쓰기에 바쁘다. 북한의 젊은 지도자 김정은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멋대로 떠드는 것을 군복입은 노인들이 허겁지급 따라다니며 받아적는 꼴을 보면서 박근혜 국무회에서 연상되는 것은 필자의 정신이 비정상적인어서일까!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차례 힘들게 성사된 야당지도자인 김한길과의 만나서도 정치적 협상이나 타협 없이 어색하게 끝났다. 새누리당의 당직자들과도 뭔가 국정을 논하는 소통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국민들과의 소통은 더욱더 없었다. 그래서 야당은 그를 불통의 지도자라고 까지 했다. 이렇게 볼 때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독재자인가? 그런 요소들이 있지만 필자는 그렇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처럼 철권을 휘두르지도 않고 또 오늘날 시대가 그와 같은 독재자를 용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그동안의 행태들을 종합적으로 뭉뚱그려 표현하자면 신학자인 필자의 눈에는 박근혜는 일종의 종파적 성격(sectarian character)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특정 소종파의 지도자 혹은 교주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형과 종파형
그러면 종파적 성격의 사람이란 어떤 존재일까? 독일의 저명한 종교사회학자인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는 1931년에 쓴 그의 유명한 책 “그리스도교 교회들과 종파(집단)들의 사회적 가르침”(Die Soziallehren der christlichen Kirchen und Gruppen)에서 유럽 기독교에서 교회형과 종파형의 문제를 학술적으로 다룬다.
그는 교회형과 종파형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점에서 구별한다.
첫째 교회형은 대체로 전통지향이고 세속적(혹은 정치적) 질서를 긍정하며 일반 대중들 전체를 상대로 하고 따라서 인간의 전체 삶의 문제들을 포괄하려고 한다. 따라서 교회형은 세계 개방적이고 보편적이다. 그러나 종파형은 비교적 적은 집단을 상대로 하고 개개 구성원들 사이의 직접적 인격적 친교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매우 폐쇄적이다.
둘째 교회형은 국가와 지배계층을 이용하고 따라서 현존하는 사회질서의 핵심적 일부가 되고 사회질서를 통힙시키고 안정시키려 한다. 그러나 종파형은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을 주요 대상으로 삼고 기존 사회질서와는 거리를 두고 따라서 국가와 사회에 대해서는 멀리하거나 적대시한다. 따라서 종파형은 분파적이고 다른 종교집단들이나 세계에 대해서 매우 배타적이다.
셋째 교회형은 전체 사회질서를 인간의 삶의 초자연적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만 종파형은 직접 초자연적 삶 자체를 목표로 지향한다. 교회형의 절제를 덕성을 함양하는 수단으로 특별히 종교적 성과를 달성하는 척도로 사용하지만 종파형은 금욕주의를 세상을 멀리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Troeltscch, ibid.,Vol. I. p.331-332).
트뢸치에 의하면 종파들(sects)이란 자기들만이 가진 특별한 진리의 수호를 위해 공적 혹은 보편적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간 소집단을 말한다. 이러한 트뢸치의 정의를 간략하게 종합해 보면 종파형은 열린 공적 성격을 부정하고 은폐되고 개인주의적이며, 포괄적이 아니고 배타적이며, 전체 지향적이 아니라 소집단 지향적이며, 대화적이 아니고 지시적이고 독선적이다. 종파형은 제도나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 운영되지 않고 특정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충성하는 소집단에 의해서 지배된다. 따라서 종파형은 비합리적이고 동시에 비도덕적 성격을 띠기도 한다.
그러면 왜 박근혜가 종파형 지도자로 분류될 수 있는가?
첫째 박근혜가 종파형의 리더라는 것은 우선 그에게는 정치가로서 매우 개방적(공공적) 성격이 결여되어 있고 폐쇄적이다. 그것은 특히 그의 인간관계 특히 인사문제에서 그러하다. 그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모든 인사를 공적으로 하지 않고 자기 수첩에 적어 놓은 자기만의 사람들로 감행했다. 그가 선택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도덕적으로 건실하며 사리를 취하지 않을 공적 직무에 적합한 사람들이 아니라 대체로 사회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거나 지탄의 대상이 되고 도덕적으로 크게 신뢰할 수 없으며, 사리를 취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국민을 위한 공직자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박근혜를 위한 들러리로 임명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박근혜는 자기 당 안에서도 자기에게만 충성하는 사람들로 소집단을 만들어 소위 “친박계”를 거느리고 있다. 이것도 종파적 리더가 흔히 큰 교회 안에서 자기를 따르는 일부 신도들을 모아서 분파를 만드는 것과 같이 종파적 행동이다. 물론 이전에도 야당 안에는 “동교동계”니 “상도동계”니 하는 분파적 집단들을 거느리는 정치리더들이 있었지만 그것들과는 달리 친박계라고 하면 뭔가 정치집단의 성격보다는 종파적 집단의 성격을 띠는 것 같다.
둘째 그가 종파형 리더라는 것은 그의 배타성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국정운영방식은 특히 폐쇄적이다. 박근혜는 야당에 대해서만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여당에 대해서도 배타적이고, 삼권분립의 파트너인 국회와 사법부에 대해서도 배타적이다. 그는 우선 야당에 대해서 매우 배타적이다 못해서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야당대표들과 머리를 맞대고 국정을 논의하는 일은 물론 자기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여당에 대해서도 하수인 취급하고 있다. 야당대표인 김한길과의 기괴한 만남에서 보여준 박근혜의 행태는 가히 종파적 리더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러한 배타성은 박근혜가 대화형이 아니라 독백형 내지는 지시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는 배타적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독선적이기까지 해서 타인의 의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그것은 국정원이 대통령선거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야당이 그렇게도 국정조사를 요구해도 박근혜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그 사건을 조사하여 사실을 밝혀 사법처리하지 않았고 또 국정원 개혁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의 종파지도자로서의 배타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국무회의라는 것을 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하고 국무위원들은 받아쓰기에만 하면 된다. 그것은 종파지도자가 신도들에게 교시를 내리는 것과 같다. 그것은 민주국가의 내각에서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활발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상식의 장과는 거리가 멀디.
셋째 박근혜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종파적 인물이라는 것의 결정적 증거는 늘 그의 주변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종파적 종교인들에게서도 발견된다. 박근혜의 최측근으로서 정수장학회 이사장이었던 목사 최태민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는 공적 성격을 띤 열린 공간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어느 교단에 속해있고 어디서 안수를 받았는지 그리고 그는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인지 과문한 탓인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추측컨대 그는 공적 교단의 목사라기보다 어느 특정 소종파의 목사인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실체를 밝히지 않고 뭔가 은밀하게 개인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여러 가지 소문을 몰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장학회의 구성원들도 대개는 공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따라서 박근혜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오랫동안 운영해온 정수장학회의 성격도 매우 폐쇄적이다. 정수장학회는 탄생배경도 비합리적 방식으로 타인의 재산을 가로채서 만들었다는 소문으로 여러 차례 도덕적 구설수에 올랐었고 장학회라면 공공성을 지녀야 하지만 사적 소유의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박근혜가 대통령선거를 치를 때는 윤정훈이란 목사가 소위 십자군 알바단을 만들어서 국정원과 함께 부정선거를 하는데 앞장섰던 것이 기억난다. 그 목사라는 사람도 추측컨대 특정 교단의 목사라기보다는 어떤 적은 종파적 집단의 목사일 것으로 생각된다. 목사라는 사람이 불법적 선거운동에 가담하고 그것도 비밀스러운 돈을 받아 은밀한 장소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부도덕하게 방식으로 상대방 후보를 비방하고 박근혜를 찬양하고 고무하는 알바작업을 한 것은 건전한 종교인의 자세가 아니라 종파적 인물의 행태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박근혜는 널리 알려진 공적 교회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실체를 알 수 없는 종파적 종교인들과 은밀한 관계를 맺고 그들과 같이 일하는 것을 봐서도 그가 종파적 인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박근혜는 정치인이고 지금은 대통령이면서도 정정 당당하게 열린 공간에서 공적으로 전국민을 상대로 해서 정치를 하지 않고 청와대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자기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은밀하게 만사를 처리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필자는 그를 종파적 지도자라고 보는 것이다.
종파형이 가져오는 종교적 사회적 폐해
이러한 종파적 현상은 비단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러한 종파적 교회들은 대체로 국가교회를 지향했던 유럽보다는 교파교회로 발전한 미국에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미국의 종파적 교회들은 한국과 같은 피선교지로 이주되기도 하지만 피선교지의의 종교인들 가운데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해서 시작되기도 했다. 특히 한국에서 만들어진 종파적 집단들은 대체로 성서적 가르침과 교회사적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는 전통적 교회들을 부정하고 자신이 특정한 지식이나 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에 의해서 시작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특정한 카리스마를 받았다거나 아니면 자신들을 메시아로 자청하기도 한다. 이러한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은 결국 전통적 교회로부터 떨러져 나가서 독자적 집단을 이룬다. 이러한 집단들을 교회사에서는 분파(종파)주의자들(sectarian) 혹은 이단들(heresy)이라고 했다. 이렇게 정의할 때 한국적 종파들은 분파주의자들인 동시에 이단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기독교계통의 다양한 종파형 집단들이 다수 만들어졌고 그것들은 대체로 사회적으로 역기능을 했었다. 눈에 띠는 것으로서는 박태선의 신앙촌을 비롯하여 문선명의 통일교, 조용기의 순복음교회, 요즘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신천지 집단 그리고 이번에 국가적 참화를 가져온 유병언의 일명 구원파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종파형 교회들은 성서의 진리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카리스마형 교주들을 맹신하고 맹종함으로써 기독교계가 사회적 신뢰성을 잃게 만드는 해악을 끼쳤다. 또 그들은 신도들에게서 비정상적 방식으로 끌어 모은 헌금(재산)으로 기업들을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기업 운영은 불가피하게 종교적 목적과는 반대로 이윤추구에 몰두하게 됨으로써 도덕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 결과 사업상의 필요에 따라서 권력기관들과 유착함으로써 부패하게 되고 사회적 해악까지를 조장한다. 그래서 이러한 종파적 집단들은 예외 없이 정치권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유착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이 한국에서 태어난 기독교형 종파들의 맨얼굴이다.
최근 한국사회 전체를 심각한 공황상태로 몰아간 세월호침몰사건도 복음침례교회라는 유사 기독교 계통의 종파가 일으킨 참사였다. 이 사건은 개방성과 공공성을 결여한 타락한 종파집단이 기업화되고 권력층과 결탁한 결과가가 국가적으로 어떠한 해악을 끼는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들 종파적 집단들이 주는 종교적 사회적 폐해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는 이 집단들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의 과도한 충성심과 배타성의 요구로 그동안 이 집단들에 속했던 다수의 신도들의 가정들이 파괴되었다. 대체로 이러한 종파들의 구성원들의 다수는 여성들로서 그들은 지나치게 교회생활에 몰두함으로써 때로는 가정생활을 멀리하거나 자녀돌보는 일을 소홀히 함으로써 시부모나 남편들과의 잦은 마찰을 가져온다. 그 결과 이들 가정들에서 고부간, 부부간의 간격이 생기고 다툼이 일상화되며 자녀들에게도 심대한 악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종파적 집단에 과도하게 충성하던 여성들은 마침내 가정을 버리고 종파집단에 합류하거나 이혼을 하게 된다. 결국은 가정이 파탄 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이 집단들의 과도한 헌금의 요구로 많은 신도들의 가정에 경제적 파탄을 가져왔다. 이러한 종파적 집단들은 종교생활에서 헌신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 충성의 표식으로서 많은 헌금들을 요구한다. 다양한 이름과 종류의 헌금항목들을 만들어서 신도들로 하여금 거기에 동참할 것을 강요한다. 특히 교단건물이나 시설들의 확장을 위해서 특별히 과도한 헌금들을 요구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헌금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그것을 감당하도록 한다. 예로서 신도들의 주택을 담보로 해서 은행대출을 해서 헌금을 하게 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이렇게 되면 신도들은 경제적으로 쪼들리게 되고 때로는 가정파탄에 이르기도 한다.
셋째 이러한 종파적 집단들은 자기들에 대한 과도한 충성과 폐쇄성의 요구로 신도들의 건전하고 열린 생활세계가 파괴되었다. 이러한 종파들은 신도들의 삶의 세계를 자기들이 요구하는 종교행사의 테두리에만 국한하게 하기 위해서 다양하고 많은 프로그램을 동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자들을 자신들의 울타리에 지속적으로 가두어 두기 위해서 다른 종교나 문화권과의 접촉을 가능한 한 차단시킨다. 그들 신도들의 생활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그러한 올가미를 씌워서 열린 사고와 열린 세계로의 개방적 인간이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 결과 이들 집단들의 신도들은 폐쇄적이고 배타적 사고를 갖게 되어 사회생활을 하는데도 장애를 받게 만든다.
이번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시월호 참사도 이러한 종파집단의 하나인 복음침례교회(일명 구원파)의 유병언이라는 자가 실질적 주인으로 있는 청해진 해운회사의 탐욕적 운영과 그것과 결탁한 부도덕한 권력기관의 합작품이다. 이러한 폐쇄적이고 비윤리적 종파와 비리로 얼룩진 권력기관의 유착으로 일어난 이번 참사는 폐쇄적 종파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종파형의 정치가인 박근혜에게도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그는 그동안 국민(서민) 전체를 보고 정치를 하지 않고, 폐쇄적이고 배타적으로 자기집단과 대기업들만 챙겨왔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서민대중들의 삶을 살리겠다고 제시했던 경제민주화의 약속은 헌신짝 버리듯이 내팽개치고, 소수의 대기업들의 횡포를 막을  규제들을 “암덩어리”라고 되뇌며 풀어 제치겠다고 나섰다. 이번 세월호 참사도 결국 전임 이명박이 풀어놓은 규제완화로 낡은 배를 사다 사용하게 했고, 규제완화로 증축할 수 없게 설계된 배를 증축했고, 규제완화로 화물들도 거의 무제한으로 실었고, 규제완화로 선장은 무책임하게 먼저 도망쳐 나왔다. 박근혜는 이러한 규제를 다 풀어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는 누구를 위해서 규제를 풀겠다는 것인가? 그는 온갖 규제를 다 풀어서 경제를 살리겠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한국의 무질서하고 무책임한 기업풍토에서 강자들만이 살아남는 미국 서부의 총잡이들의 세상으로 만들고 서민들을 그들의 희생제물로 만들려는가!
왜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들어선 이후 대한민국 사회가 점점 더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되어 가는가? 그리고 서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더 살기가 힘들어지는가? 왜 사회가 점점 더 불안해지고 미래는 보이지 않는 것인가? 박근혜가 국민 전체를 보고 통합의 정치를 하지 않고, 특정 세력들만을 위해서 일하므로 모든 국정에서 공공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박근혜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특정 종파의 교주처럼 대한민국을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종파적으로 폐쇄되고 배타적이며 독단적이며 특히 특정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박근혜는 앞으로 남은 임기를 제대로 마치려면 개방적이고 대화적이며 포용적이고 국민 정체를 대변하는 공적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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