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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곤 칼럼] 물질풍요 때의 기쁨보다 더한 그 기쁨!

입력 Sep 27, 2014 07:50 AM KST

시편4편: 기쁨의 신학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현악기에 맞추어 읊은 다윗의 시   
1[2]. 나의 옳음[義로움]을 변호해주시는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곤궁에 빠졌을 때, 주님은 나를 넓은 길로 이끄셨으니  
      내게 은혜를 베푸셔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소서.  
2[3]. 인생들아, 내 영광을 부끄럽게 만들기를 어느 때까지 하려느냐?  
      헛된 것을 사랑하고 거짓을 탐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려느냐?  
(셀라)  
3[4]. 야훼께서는 자기에게 신실한 자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지시는 분임을 알아라. 야훼께서는 자기에게 부르짖는 자에게 응답하시는 분임을 알아라.   
4[5]. 분을 품고 죄 짓지 말지라. 마음으로 말하고 자리에 누워 잠잠하여라.  (셀라)   
5[6]. 올바른[義의] 제사를 드리고 야훼께만 의지하여라.   
6[7].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누가 감히 우리에게 선[善]을 보여 주랴?” “그러니 야훼여, 주의 빛난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소서” 하는구나.  
7[8]. 주님께서 내 마음 속에 넣어주신 기쁨!   
      그 기쁨은 햇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 큰 기쁨입니다.  
8[9]. 내가 편안히 눕고 쉽게 잠들기도 하나니,  
      오, 야훼여! 오직 주님만이 나를 믿음 안에서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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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히브리어  ‘nny를 우리는 MT의 독법(명령형)에 따라 번역하였고 LXX의 독법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가 가진 “확신의 시”로서의 분위기와 LXX의 번역을 참조하여, 이  ‘nny 를 “완료태”로 고쳐 읽는다면 1[2]c절의 시제도 모두 완료태로 읽어야 하는데, 그러나 LXX는 1[2]절 동사들의 시제를 모두 완료태 시제로 읽지는 않고 있다(특히 1[2]d절의  ‘nny 참조). 1[2]절의 이러한 시제 문제의 난점은 한국어 번역들(개역, 새 번역, 신 구교 공동번역)이나 영어권 번역(Jerusalem 역조차도)이 모두 해결하지를 못한 문제였다. 그리하여 이 번역은 MT의 독법을 문자 그대로 따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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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시 양식(詩 樣式)은 개인적 탄원(individual lament)의 요소가 주요구성 요소를 이루고 있는 “의지/확신의 시”(Psalm of trust/confidence)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주요 성격은 야훼께서 시인의 마음에 심어 주신 그 “기쁨”이 그 어떤 “물질풍요가 주는 기쁨”보다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크다는 확신을 가지고서 모든 “가진 자들”의 오만과 그들의 헛된 믿음을 경고하고 교훈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 이 시인은 분명, 자신의 “옳은 삶과 자신의 바른 믿음”이 오히려 웃음꺼리가 되고 비난꺼리가 되는 그런 부조리(不條理)한 현실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남다른 “내적 기쁨”에 만족해하며 행복해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리고 그 “기쁨”(“심하”; εὐφραίνω, “유프라이노”)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시편 4편의 시인을 비롯한 많은 시편 시인들은,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야훼가 기쁨의 근원”(시43:4)이시며 “야훼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다는 것”(시16:11)을 철저히 전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는 “주께서 즐거움과 기쁨의 소식을 들려주시면,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기뻐 춤출 것입니다”(시51:8[10])라고도 고백한다.   
“기쁨”의 의미가 창세기-열왕기라는 아홉 개의 역사서(Ennea-teuch)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신학적 문맥을 갖고 있지 않으나, 삼상2:1; 19:5와 같은 특별한 진술 속에서 보면 “야훼의 구원행위”를 찬양하는 예배의전적인 상황에서만 “기쁨”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이 역사가(dtr)는 여기서 “기쁨”의 원천은 “야훼의 구원사건”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나의 마음은 야훼 때문에 즐거웠으며 야훼 때문에 내가 얼굴을 쳐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 내 입이 크게 벌어졌으니, 야훼 때문에 내가 [비로소] 기뻐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삼상2:1b)라고 고백한다. 즉 기쁨의 근원은 야훼이고 기쁨의 원인도 또한 야훼의 구원행위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즉 “야훼”가 최고의 선(善)이요 이 “야훼”로부터 기쁨이 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쁨”을 예배의전을 통하여 가장 빈번하게 그리고 가장 분명하게 표현한 구절들은 주로 시편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한 감사 시(시30편) 시인은 야훼의 ‘구원행위’는 원수의 “기쁨”을 막아주되 더 나아가서는 그 기쁨을 기도하는 자의 “기쁨”으로 바꾸어주어 기도하는 자에게 “기쁨의 옷”을 옷 입혀 준다고 고백한 바가 있는데(시30:1[2], 11[12]), 이 말은 신앙인에게 있어서의 최상의 “기쁨”이란 전적으로 야훼의 구원행위에 근거한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부터 “악인의 보복 당함으로 인한 의인의 기쁨”(시58:10-11[11-12])이라는 다소 난해(難解)한 —해석하기 까다로운— 해석학적 언어까지 등장하게 된다. 그래서 여기서는(시58:10-11[11-12]) “악인의 보복 당함”에 의한 “의인의 보상”이란, 분명히, 그 어떤 혐오스러운 통속적인 “복수”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야훼의 구원 승리에 대한 한 상징”이라는 특수개념으로서 사용되었다고 하겠다. 즉 야훼의 정의로운 우주 통치권에 대한 신뢰의 고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야훼께서는 창조와 구원 역사에 개입 간섭하셔서 불의한 권세를 휘두르는 악마적 세력을 마치 잔혹한 피의 복수를 단행하시듯이 —악인들의 피로 의인들의 발을 씻기시듯이— 악을 분쇄(粉碎)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결단코 자기 지혜와 자기의 힘과 부유를 자랑하지 말고 오직 야훼의 신실한 사랑(“헷세드”)과 공평(“미쉬파트”)과 정의(“체다카”)만이 최후의 승리를 한다는 사실을 믿고 깨닫는 지혜를 자랑해야할 뿐(렘9:24)이라고 예언자 예레미야는 선포한 것이다. 그리하여 시편58편 시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의인의 열매”라고까지 결론지었던 것이다.    
아! 의인에게는 반드시 열매가 있구나.
아!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예스-엘로힘”)라고 말한다(시58:11[12]). 
즉 의인의 삶은 결코 무의미하게 악인들의 악마적 권위에 굴복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신(神)들의 세계를 수용하여 총망라 한다고 하여도 결국은 “엘로힘” 즉 세계를 통치하시는 야훼만이 거기에 유일하신 신(神)으로 존재하고 계실뿐이라는 것이다(cf. 행17:22-31). 말하자면 의인에게 돌아오는 보상(reward)은 결국은 창조자 야훼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것, 그것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진정한 “기쁨”의 근원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하심’ 안에 있는 것이지 결코 인간 자신 안에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시편4편 시인의 신앙적, 신학적 사유가 도달한 그 귀착점이 바로 이것이라고 하겠다. 
주의 기쁨! 주께서 내 마음 속에 두신 그 기쁨! 그것은 “햇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 주는 기쁨”과 같은 것, 그것 가지고서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조리한 이 세상의 삶 속에서라도 시인은 단지 창조의 유일한 주요 역사의 유일한 주이신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자신의 절대 신뢰의 믿음 안에서만 비로소 살아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4:1-6[2-7]에 나타난 시인의 교훈적 성격의 “기원,” “훈계,” “책망,” “권고”가 모두 이제는 흔들릴 수 없는 한 확신, 즉 “주께서 주신 그 기쁨은 그 어떤 기쁨보다 더 크다!”는 확신(시4:7-8[8-9]) 안에서 융합되고 용해되고 정련되어 강하게 담금질된 하나의 ‘기쁨의 신학’을 창출해내게 된 것이다. 신약성서가 이 기쁨을 박해의 고난 속에서(마5:10-12) 그리고 약함 안에서(고후12:9-10) 발견한 것도 바로 이러한 문맥의 연장선상에서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하겠다.   
‘기쁨의 신학’은,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인간의 참 기쁨이란 ‘야훼께서 내 안에 [우리 안에] 넣어주신 기쁨뿐이다’라는 야훼를 향한 찬양고백 자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 하겠다.    
시편4편 시인이 어떻게 이런 ‘기쁨의 신학’을 창출하고 또 노래할 수 있었는지는 참으로 놀랍다. 비록 5-6[6-7]절을 통하여 인지(認知)하게 되는 바대로, 그 신학적 사유의 발전과정을 우리는 예배 때 경험하는 그 어떤 ‘현현’(顯現, theophany)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은 확인할 수 있지만, 그러한 신학적 사유(思惟)에 이르게 하는 진정한 유도점(誘導點)은 무엇일까 하는 것, 그것을 밝히는 것이 문제이다.    
놀랍게도, 시편4편에는 그러한 유도점(誘導點)에 이르게 한 과정이 그 어디에서보다 선명하게 나타나있는 것을 보게 된다. 즉 1-4[2-5]절 → 5-6[6-7]절의 전이과정(轉移過程)이 그것을 분명히 해주는 것을 보게 된다. 말하자면 야훼 하나님의 역사개입(Epiphany)에 대한 역사적 경험이 예배의전(cultic liturgy)의 현현(顯現, theophany) 체험 때 이러한 ‘기쁨의 신학’으로 전이되는 발화점이 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다.   
베스터만(C. Westermann)이라는 구약성서 신학자는 신현현(神顯現)을 epiphanie와 theophanie라는 두 용어로 나누어 구별하기까지 하였다(cf. Westermann, Praise and Lament in the Psalms [Atlanta: John Knox Press, 1981]). 즉 전자(前者)인 ‘에피파니’(epiphanie)는 역사적 구원개입 행위(行爲/事件)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지칭할 때 사용하고, 후자(後者)인 ‘테오파니’(theophanie)는 예배의전 드라마(cultic drama)를 통한 하나님의 뜻(意志)의 자기계시를 지칭할 때에 사용하였다(물론 Westermann 이외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두 용어를 이렇게 엄격하게 구분/구별하지는 않고 사용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시편4편의 전반부인 1-4[2-5]절은 에피파니(epiphanie)에 대한 반응이고 후반부인 5-8[6-9]절은 테오파니(theophanie)에 대한 반응으로 분명하게 구분 정리되어 있음과 동시에 이 둘이 잘 결합/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분명히 역사 안에서 구원활동을 하시는 구원역사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그 역사의 주님은 제의(祭儀)에서 시편낭송(cultic reenactment)을 통하여 시인의 마음속에서 현재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배는 기쁨과 감격으로 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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