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손규태 칼럼]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신자유주의 세계체제

들어가는 말: 근대적 자유개념의 발전
▲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근대적 의미에서 자유라는 개념은 인간의 삶에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다. 프랑스 혁명에서 내어난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세쌍둥이 개념들은 이전의 부자유하고 불평등한 전제군주체제에 대항하는 투쟁구호였다. 이들 세쌍둥이 개념들은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다양하게 변용되었다. 철학자 루소(Jean-Jacques Rousseaus)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어디서나 속박당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그는 “인간 모두의 공동의 힘으로 인격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는 사회형식”을 찾으려 했다. 즉 그는 평등에 기초한 자유를 찾으려 했었다.
이렇게 봉건시대의 부자유에 대한 투쟁으로부터 민주혁명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우리는 고대나 중세기나 근대와 달리 오늘날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신체와 언론 결사의 등의 자유를 누리는 시민적(부르주아적)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러한 자유에 대한 갈망이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로부터의 자유를 요청하고, 곤궁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게 된다. 밖으로는 외세로부터 정치적 해방과 함께 안으로는 사회적 불평등으로부터의 자유, 즉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억압과 착취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고 추구하는 자유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우리가 이 자유의 본질과 내용을 고려할 때 그 한계도 묻게 된다. 우리가 자유의 본질에 체계적으로 접근하면 여러 가지 모순들에 직면한다. 그래서 철학자 쉴러(Scheler)는 “자유의 문제에서처럼 그 개념과 사용에서 발생하는 복합적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
우선 자유에 대한 물음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제기될 수 있다. 첫째 우리가 개인을 고려할 때 인간은 행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고 자유로워야 하는가? 둘째 사회를 고려할 때 인간들의 관계에서 어떤 종류의 자유가 어느 정도 요구되는가를 묻게 된다. 전자는 인간학적 자유에 관한 물음이고 후자는 사회학적 자유에 대한 물음이다. 인간은 개체로서만 존재할 수 없고, 사회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실은 “사회 안에 있는 인간”으로서 파악한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이 외적 동인들이나 내적 동인들에 대해서 긍정이나 부정의 가능성을 상실한 모든 행태를 부자유라고 했다. 그는 인간이 내적 외적 요인들을 거부할 수 없을 때 그것을 부정적 자유라고 했다. 동시에 인간이 내적 요인 즉 자기 이성을 통해서 규정할 수 있을 것을 긍정적 자유라고 했다. 따라서 칸트에게서 자유란 모든 자의적 행동들을 이성의 통제 하에 두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래서 그는 “자유란 외적 요인인 자연의 충동을 넘어서 인간의 모든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규율이나 의도다.”라고 했다.
이렇게 칸트에게 기원을 둔 (부르주아 사회의) 근대적 인간상에서 이성을 통해서 자기 목적(telos)을 향해 실천하기 위한 행동규범을 정하는 것이 곧 자유며 과거의 절대군주체제를 거부하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실현한 정치적 원리였다. 프랑스와 북미의 혁명들에서 탄생한 자유주의적 헌법들은 인간을 “자연규정”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결정”의 작업자로서 이해한 새로운 인간상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상으로부터 이전의 전제 군주적 국가상에서 자유 민주주의적 국가상이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왔다. 오늘날 민주주의 헌법의 기본명제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국가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지 인간이 국가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인격성의 존엄성은 침해할 수 없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제도에서 인간은 자율적 개체라는 인간학적 논거와 함께 사회적 존재라는 사회학적 논거에서 자유의 한계를 본다. 모든 개인들의 권리는 “한 사람의 자의와 다른 사람의 자의가 자유라는 보편적 한계에서 일치될 수 있는 조건들의 총체”에서 승인된다.(임마누엘 칸트). 그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한 많은 그러나 동시에 동등한 권리가 보장되는 자유라는 점에서 공동체 안에서의 자유는 상호적으로 행사되어야 한다는 한계성을 갖는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법치국가(freiheitlicher Rechtsstaat)로서 이해된 사회는 개개인에게 가능한 많은 자기실현의 공간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사회의 문명적이고 문화적인 발전의 기초가 되는 경제적 기초(하부구조)와 정신적 상부구조 사이의 자유의 변증법의 출현을 가져왔다. 말하자면 이러한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개인들의 자유로운 자기실현은 정치적 영역에서는 관용의 원리와 함께 경제적 영역에서는 나눔의 원리를 요청한다.
우리는 최근 등장한 산업화와 대중민주주의 사회를 경험하면서 자유의 한계성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자율적 개체인 인간의 자유에 기초한 이른바 서구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적 법치국가는 개인의 자기규정과 자기발전으로부터 생각해낸 진보적 파토스와 인도주의적 에토스를 요구한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적 정치질서에서 개개인이 사회적 자기실현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이 자유개념은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 따라서 자유의 문제에서 인간을 “사회 한가운데서 독립된 개체로서만” 다룰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자유의 문제에서 인간학적 논거는 이미 낡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자유의 사회학적 명제가 정당화되고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철학자 포이엘바하가 말한 것처럼 자유의 인간학적 명제와 사회학적 명제는 “사회적 관계의 조화”(Ensemble der gesellschaftlichen Verhältnisse) 말하자면 “사회에서 평등의 회귀”(Wiederkehr der Gleichen in der Gesellschaft)로 그 시각을 옮겨봐야 할 것이 아닌가?
인간은 개인적이며 동시에 사회적 동물이며 따라서 우리는 인간학적 차원과 동시에 사회학적 차원으로의 자유의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여기서 개인의 형식적 자유와 사회의 물질적 자유가 문제된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의 보장만으로 불충분하며 개개인에게 사회적으로 가능한 한 동등한 기회의 제공이 중요하다. 그것은 특정 인간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비인간적 사회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개개인들의 욕구가 충족되고 개인의 능력들을 발휘할 수 있는 동등한 권리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Karl Marx). 여기서 모든 인간들에게 한 국가 안에서 형식적이고 물질적 자유가 보장되는 “자유주의적 사회국가”(freiheitliche Soziaalstaat)를 지향하게 된다.
국가 자체가 물질적 권리의 보장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전제들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보편적 자유의 보장은 공허한 것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다면 그들에게 주어진 개인의 정신적 자유는 공허한 것이다. 그동안 자본주의 체제는 법치(권리)국가로서 형식적 자유를 보장해주었으나 모든 시민들을 위한 물질적 자유를 보장해 주지 못했다. 다른 한편 사회주의적 체제의 복지국가는 물질적 자유를 보장한다고 하면서 정신적 자유를 보장해 주지 못했다. 자유가 없는 군주국가나 사회주의적(sozialistisch) 국가와는 달리 자유가 있는 법치국가나 사회적(sozial) 국가가 주어져야 하는데 거기서는 개인의 형식적 자유뿐만 아니라 사회의 물질적 자유도 보장되어야 한다. 개인적 자유권과 사회적 복지가 공히 보장되는 국가가 오늘날 우리가 지향하는 국가 즉 사회국가이다. 우리의 이상은 자유주의적 법치국의 정신적 자유와 자유주의적 사회국가의 물질적 자유가 점진적으로 일치되는 것을 지향한다.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개념의 역사적 왜곡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1520년 종교개혁문서들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인의 자유”(Freiheit von eines Christenmenschen)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대해서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만물에게 예속된다.” 루터의 이 짧은 명제는 서구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존재양식의 “대헌장”이 되어 왔다. 그러면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명제를 가지고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여기서 우선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대해서 자유인이고, 만물에 대해서 종이라는 명제다. 루터는 주인과 종이라는 대립명제, 자유인과 노예(종), 주인과 신하라는 사회-정치적 개념영역을 염두에 둔다. 이러한 주인과 종이라는 쌍둥이 개념은 이미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등장하는데 당시 독일의 사회상도 반영한다.
그런데 루터는 사회-정치적 의미에서 주종관계를 말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주인과 종의 문제를 그리스도인의 존재양식에서 말한다. 이 개념은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9)라는 바울의 말에 그 기원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인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들을 얻고 섬기는 존재라는 선교 신학적이고 사회 윤리적 사고가 여기에 내포되어 있다.
바울은 신앙인의 이러한 이중적 존재양태와 행동양태를 영적 인간과 육적 인간이라는 도식으로 설명하기도 했다.(롬 8:3-13). 말하자면 영적 인간은 선을 행하는 자유인이지만 육적 인간은 악에 굴종하는 노예적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이해는 그리스 전통이나 스토아 사상에 기원을 둔다. 이러한 인간이해에 근거해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동시에 노예됨을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simul iustus et peccator)라는 도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영적(내적)으로는 자유인이지만 육적(외적)으로는 죄의 노예라는 것이다. 여기서 루터가 주창하는 자유개념은 뭔가 내적 인간과 관련되고, 종의 개념은 외적 인간과 관계되는 것으로서 이원론적 관점에서 이해된다.
이러한 루터의 인간이해는 오랜 역사적 수용과정에서 영적(내적) 자유를 개인의 내면성의 자유로만 이해하게 됨으로써 외적 자유, 사회적 정치적 영역과는 무관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외적 자유는 사회정치적 영역의 자의성에 맡겨졌었다. 그래서 저명한 독일의 사회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루터의 자유개념의 왜곡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마르틴 루터의 문서에는 부르주아적 자유개념이 구성되고 특별히 부르주아적 권위형성의 기초가 되는 제반 요소들이 최초로 총체적으로 집합되어 있다. 말하자면 자유를 개인의 내면적 세계에만 국한시키는 것, 동시에 외적 인간을 세상권력의 지배체제에 굴복시키는 것, 이러한 세속적 권력들의 체제를 내적 자율성과 이성을 통해서 초월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이중 도덕으로’ 인격과 직무를 갈라놓는 것, 실제적 부자유와 불평등을 ‘내적 자유와 평등’으로 정당화하는 것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자유인 됨과 종 됨의 개념의 왜곡은 오늘날 루돌프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에서 나타난다. 인간의 내면성의 문제를 다루는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 의존하는 불트만은 인간의 “실존분석과 이해”를 그의 신학의 중심주제로 삼는데 마침내 종말론마저도 인간의 내면세계로 증발시킨다. 그는 인간의 외적 측면 즉 사회적 정치적 측면은 물론 역사적 지평까지를 완전히 제거하고 만다. 또 다른 신학자 집단들은 루터의 두 왕국이론을 “정교분리의 원칙”의 기초로 삼아 종교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내세워서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차별 그리고 경제적 착취에 대해서 눈을 감았다. 파울 알트하우스(Paul Althaus)와 같은 루터교신학자들은 독재자 히틀러의 정치탄압과 유대인 대학살 그리고 전쟁범죄를 외면하거나 심지어는 동조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실존주의 신학자들이나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내면성에 집중하거나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복음의 사회적 정치적 차원을 배제함으로써 루터의 사상 아니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고 있다.
이렇게 오늘날에도 루터가 말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영적 인간, 혹은 내적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이해하고 외적 인간은 세상의 권위나 체제에 “복종하는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현실적 삶에서 주어지는 부자유와 불평등은 내적 자유와 평등으로 대체시키거나 피안적 종말론적 차원으로 밀쳐버린다. 루터교회 신학자들은 종교를 전적으로 개인적 사안으로 규정하고 자유를 순수 내적인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을 세상에서 사실상 무해하고, 무책임하며, 무의미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내면성의 찬양이나 정교분리의 원리는 과거 독일인의 삶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커다란 기만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대해서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는 루터의 명제는 그 후예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은 영적 삶에서는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속적 삶에서는 누구에게나 예속되어도 좋다.”라는 명제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잘못된 루터의 자유의 이해는 오늘날에 와서는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급기야 전 인류를 서구의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정치적 억압으로 몰아넣고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체제에서는 그 주인으로 등장한 맘몬의 종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정치신학적 재해석
우리가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바로 이해하려면 그의 신학의 해석학적 틀인 “율법과 복음”의 상관관계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는 로마서 강해(1516년)와 갈라디아서 강해(1516년)를 통해서 구약성서 전체의 중심내용인 율법과 신약성서의 핵심네용인 복음의 상관관계를 탐구한다. 한마디로 율법은 인간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Anspruch)이고 복음은 허락되는 모든 것(Zuspruch)인데 루터는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서 성서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려 했다. 그는 이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의로움”(Righteousness)이라는 통합적 개념으로 파악한다. 전통적 해석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이란 율법의 요구에 따라 인간의 죄된 현실을 심판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나, 루터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은총)으로 이해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義)를 율법의 요구인 공로가 아니라 복음의 허락인 은총의 행위로 규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는 "의로운 사람“(義人)을 가리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와 인간들의 공로의 압제에서 자유로워진 그리스도인이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정의 즉 복음의 은총에 대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율법의 공로(업적)신앙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살 수 있다는 종교개혁의 대명제를 제시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자연(인간의 공로)과 (하나님의)은총의 종합을 주창한 스콜라주의의 신학체제에 항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의 신학,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루터는 제창한다. 즉 인간은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믿음으로 즉 은총만으로 살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율법과 모든 압제로부터 자유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의 은총이 육화된 그리스도(실천자)에 대한 믿음에서 주어지는 은총의 자유를 말한다.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실존 즉 자유인 됨과 동시에 섬기는 종 됨의 논제를 보다 본격적으로 재해석하려한 신학자는 디트리히 본회퍼다. 그는 1944년 5월 감옥에서 쓴 글에서 그동안 독일교회는 억압과 갈등으로 점철된 세상 한가운데서 화해와 은총의 담지자가 되지 못하고 내면(사고)의 세계로 도피하여 자기안위와 보존만을 추구한 것을 반성하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존재양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것 즉 기도하며 사람들 가운데서 정의를 실천하는 데서 성립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뜻(의)를 찾고, 인간들 사이에서는 그의 (뜻)정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같은 해 11월 21일자 옥중서신에서 믿는 자의 존재양태를 “저항과 복종”이라는 도식으로 좀 더 구체화한다. 즉 하나님의 의(정의)에 복종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율)법들의 요구들에 저항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저항과 복종 사이의 경계가 원칙적으로 정해져 있지는 않다. 신앙이 그와 같은 역동적이고 생동적 행동을 요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고 그것을 결실 있게 만들 수 있다.”
앞서 서론적 부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자유의 개념을 역사적으로 해명할 때 인간은 인간학적 차원에서 개체로서 존재의 자유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사회학적 차원에서 “집단 안에서 개체”로서 자유를 추구한다. 이전 부르주아적 사회에서는 인간학적 차원에서의 개체의 내적(정신적) 자유가 주제였지만 오늘날의 다원화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사회 안에서 개인들”의 제반 외적(물질적) 자유가 문제된다. 말하자면 개인들의 욕구가 충족되고 개인의 능력들을 발휘할 수 있는 동등한 권리와 기회가 주어지는 자유가 문제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사회적 개체”로서 인간은 내적이고 형식적 자유뿐만 아니라 외적 사회적 정치적 자유와 함께 물질적 자유가 담보되는 “자유주의적 사회국가”(freiheitliche Soziaalstaat)가 지향된다고 했다.
여기서 루터가 말하는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의 존재양태 “내적으로는 기도하는 것과 외적으로는 정의를 행하는 것”은 인간학적 차원에서 주인으로서의 내적 혹은 정신적 자유와 함께 사회학적 차원에서 종으로서 타인을 섬기고 나누는 자유가 매개된다.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양태의 다른 모델인 “저항과 복종”은 세상의 모든 법적 정치적 억압체제들에서 자유하기 위한 저항과 모든 억압체제들 아래서 고통당하는 사회적 타자들(약자들)을 위한 복종(섬김)에서 루터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변증법적 존재양태와 맥을 같이 한다.
과거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자유로운 자들은 강한 자들, 부자들 즉 상위자들이었고 종들은 약하고 가난한 자들, 하위자들이었다. 오늘날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지만 등장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체제에서 우리는 다시 과거 부르주아적 불평등의 사회체제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경제적 모순과 차별들을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본회퍼는 이러한 왜곡되고 모순된 사회상을 철저하게 전복시킨다. 그는 “저항과 복종 사이의 경계가 원칙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지만” 이제까지의 저항(자유)의 대상과 복종(섬김)의 대상을 철저히 전환시킨다. 즉 그는 상위자를 섬김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저항의 대상으로 보고 하위자를 오히려 섬겨야 할 대상으로 본다. 이러한 본회퍼의 생각은 그의 신관에도 나타난다. 즉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자로서가 아니라 무력한 자이기 때문에 인류의 구원자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십자가로 쫓겨났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무력하고 약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만 그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돕는다.”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그의 약함과 수난을 통해서 우리를 돕는다.(마태8:17).
결론: 신자유주의 세계체제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
우리 시대를 세계화 시대 혹은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제체제의 시대라고 말한다. 1980년대를 기점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초강대국 미국의 일극체제로 시작된 이 신자유주의 시대를 20:80 세계 혹은 더 심하게는 1:99의 세계라고 정의한다. 이 세계에서는 부유한 사람은 너무나 부유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해서 빈부격차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세계다. 그런데 학자들은 오늘날 이 시대를 가난한 사람들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오늘날의 빈곤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빈곤”(gemachte Armut)이라는 것이다. 즉 빈곤은 힘과 부를 독점한 상위집단들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생산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세계체제는 산업자본주에서 금융자본주의 시대로 넘어오는 1980년대를 기점으로 산정하는데 학자들은 1987년에 금융자본의 이익이 산업자본주의의 그것을 넘어섰다고 말한다. 지금은 물건 만들고 팔아서 돈 버는 것보다 돈놀이로 이자를 받는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번다는 것이다. 예로서 우리나라 서민들의 가계 빚이 1천조를 넘어섰다. 그 빚의 이자가 5%라면 빚진 자들이 1년에 약 50조의 이자를 부유한 사람들에게 갚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세계경제체제는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을 원조하고 있다. 과거에는 부자들이 자발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왔으나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가난한 자들이 강제로 부자들을 돕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화 시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선도해가는 미국정부와 그들을 열심히 따라가는 이명박, 박근혜정부는 어떠한가?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이 기업의 경쟁력을 높인다고 감세정책을 도입하자, 이명박도 감세정책을 써서 대기업의 법인세를 큰 폭으로 감면해 주었다. 이명박 임기 5년 동안 약 100조원이 부자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거기에다 4대강 사업을 통해서 막대한 국민의 세금을 대기업들의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최근 박근혜 정부는 이렇게 생긴 부족해진 세금을 대기업의 법인세를 다시 받아서 충당하지 않고 담배세, 주민세, 자동차세 인상으로 서민들의 주머니를 짜내서 해결하려고 한다. 오늘날의 정치와 경제의 유착은 부자를 더욱 부유하게 만들고 서민들은 더욱더 가난하게 만든다. 기업에 종속된 미국이라는 국가모델을 한국도 따라가고 있다. 박근혜대통령은 거의 전적으로 기업활동 지원의 테두리에서 수행된다. 그는 외교활동의 명목으로 국민들의 세금을 쓰면서 기업가들만을 동반하고 그의 사업을 돕는다. 그것을 경제 살리기라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나라 재벌이라는 대기업들은 몇 십 조씩 현찰로 쌓아놓고 일자리에 재투자에는 인색하다. 그들은 금융사업(은행, 보험, 증권 등)에 눈을 돌려 이자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지만 그들의 동반자인 노동자들의 존재는 무시하거나 탄압한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비정규직에서 아르바이트로, 일당 아르바이트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로 내몬다. 노동자들이 쟁의라도 할라치면 그들의 하수인인 정부가 특공대를 동원해서 노동자들을 진압하고, 사법부는 그들을 감옥에 보내준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세계체제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계명은 무엇인가? 제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억압으로부터 해방과 함께, 힘없고 가난한 모든 사람들을 섬기라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제기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계명을 어떻게 우리는 실천해야 할까?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 아니 사회개혁의 지표로서 공로나 업적이 아니라 믿음으로, 은총으로 만 살 수 있다고 갈파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체제는 은총의 사회가 아니라 공로와 업적을 내기 위한 경쟁의 사회다. 은총의 대상이 되는 사회적 약자들은 경쟁에서 탈락해서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고, 업적의 달성자들은 경쟁의 승리자요 존경의 대상이 된다. 또 이웃은 공동체로서 같이 살아가야 할 대상이 아니라 경쟁을 통해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부르주아 사회가 동틀 때 정치사상가 토머스 홉스가 말한 것처럼 오늘날 인간은 모든 인간에 대해서 늑대가 되었다.
이러한 늑대의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미국을 필두로 한 강대국들의 탐욕과 경쟁이 인간의 경제적 삶의 근간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있으며 인간들의 정신을 황폐화시켜 온갖 조직적이고 집단적 범죄와 인간 생명에 대한 멸시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지난 4월 16일 신자유주의적 정치체제와 결탁한 사이비 종교기업이 운영하던 시월호 참사는 모두가 맘몬이라는 업적의 우상을 숭배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을 저버린 오늘날 한국사회의 총체적 타락의 표징이다. 온 국민이 나서서 그 원인 밝히고 범법자들을 처벌하고 온 국가가 새로 나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 이것이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맘몬)를 숭배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제체제를 따라가는데서 생긴 비극이다.
우리는 앞서 서론적 부분에서 부르주아 사회에서 인간학적 차원에서 개인의 자유는 오늘날 사회적 차원에서 자유와 상관관계에서 발전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공로(업적)가 아니라 은총으로 만 살 수 있다는 루터의 종교개혁표제어는 오늘날 유럽의 스칸디나비아나 독일 등 사회적 국가들(Sozialstaat)을 통해서 다소나마 응답되고 실현되고 있다. 거기서는 사회적 강자들이 공적을 독차지하지 않고, 은총의 정신으로 이웃과 나눔으로써 사람들이 보다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곳에서는 다수의 국민들이 자기의 업적으로 얻은 수익의 상당부분을 사회적 약자들에게 세금으로 내놓음으로써 복지사회를 이루어가고 있다. 이제 인류가 살 수 있는 길은 업적이나 공로가 아니라 사랑과 은총의 길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오직 은총만으로 라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구호가 오늘날 사회개혁의 구호가 될 때에만 우리는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삶의 계명이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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