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풍류신학, 우주적인 하나님의 복음의 실재를 추구”
[기획 대담] 문화신학자 유동식 교수- 2부

입력 Feb 27, 2015 08:03 AM KST
[편집자 주] 문화신학자 유동식 교수의 자택은 숲속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듯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볕이 따사로운 정원을 끼고 있었다. 목줄 달린 강아지 한 마리가 오랜 지인인 듯 기자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그 정원에서는 정원을 가득 메웠을 목향의 기억과 30년간 드나들던 인적의 기억도 약간의 낯설음을 실은 반가운 얼굴을 하고 문가에 서있었다. 나무와 토양의 향취, 그리고 사람살이의 흔적은 그 정원뿐만 아니라 집의 건물에도 스며있어서 실제로 그곳에서 살았음, 그리고 그곳에서 살고 있음의 의미를 넌지시 알려주었다. 유 교수의 토착화 신학은 이처럼 이곳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토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토착화 신학은 하나님의 위상을 지역적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적인 실체로 이해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유 교수로부터 그의 신학적 토대와 가능성에 대해 들어보기로 했다. 설 연휴를 맞이해 기획된 이 대담을 총 3부에 걸쳐 싣는다.   
▲토착화 신학과 관련된 논란이 촉발된 지점은 어디였을까? 혹 제사 문제는 아니었을까? 유동식 교수는 "제사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며 오히려 "축자영감설, 즉 해석학의 문제가 주요 논란 거리였다"고 말했다. ⓒ사진=지유석 기자

문: 토착화 신학과 관련된 논란은 주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전개되었습니까? 예를 들어, 제사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유: 제사 문제는 교회에서 거론조차 되지 않았어요. 교회에서는 축자영감설, 즉, 해석학의 문제가 주요 논란거리였습니다. 해석학을 허락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주요 초점이었던 것이지요. 그 당시에 교회 강단의 설교는 여전히 구약성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한 분이신데 설교는 유대교의 전통에 매여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지요. 토착화 신학이 쑥스러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데도 유대문화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대화하려고 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통해서 계시하셨지만, 유대민족문화를 중요시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는 것은 우주적인 진리인데도 굳이 유대민족의 이야기를 문자대로 믿고서 설교를 하더란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이해에 따라서 하나님을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졌었지요. 
문: 토착화 신학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교수님께서 실제로 연구해오셨던 과정을 곁들여서 설명해주시면 시대상황적 이해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유: 토착화(indigenization)라는 말은 스리랑카의 감리교 주교 나일스(D. T. Niles)가 처음 사용했어요. 나는 한국토착화신학으로서의 풍류신학을 연구했습니다. 풍류신학이란 일종의 해석의 틀이지요. 우리가 이해하는 진리도 모두 다 틀에 의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영성의 틀에 의해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진실에 가깝게 다가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머리로 이해하기보다 우리의 존재로부터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68년에 샤머니즘을 공부하러 일본으로 갔습니다. 우리 민족정신의 뿌리가 샤머니즘이고 우리 민중의 가치관적 뿌리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당시 일본 동경 국학원대학의 호리 이치로 교수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그 분은 멀치아 엘리아데 교수의 친구인데 그 분이 함께 연구하자고 승낙해서 샤머니즘을 공부하게 되었지요.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해결하고 약간의 해외장학금을 얻어서 생활비를 충당했습니다. 협동연구를 하는 동안 민간신앙 세미나를 주로 했습니다. 일본의 민간신앙 전통을 연구하면서 『한국 무교의 역사와 구조』를 썼지요. 여기서 주로 다룬 것이 화랑도이며 풍류도였습니다.  
나는 화랑도, 풍류도를 천착하는 동안 그것이 기독교와도 연결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한국의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에 달하는데, 아시아에서도 특이한 일이거든요? 이것은 기독교가 샤머니즘의 유목문화(기마문화)적 구조와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맥족이 기마민족이거든요? 부여, 고구려, 백제, 일본으로 그 문화가 전달된 것이에요. 우리 민족은 샤머니즘을 전수하면서 거기에 새로운 문화를 가미했습니다. 바이칼 호수 부근의 원시종교가 문화의 옷을 입고 전승되어온 것이 우리의 문화라는 말이지요. 아주 독특합니다. 
두드러진 것은 가무를 즐기는 모습, 즉, 『위지동이전』에 나오는 대로 제천의식에서 연일 주야로 음주가무를 즐기는 풍습입니다. 이것은 성경 레위기에 나오는 초막절의 행사 풍습과 흡사해요. 그리고 구약에서는 갯버들 가지를 꺾어서 춤을 췄다고 하거든요? 갯버들이 생명을 상징하는데 우리 탈춤에서는 취발이가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춤을 춥니다. 
▲유동식 교수는 풍류의 정신이 우리 민족 문화의 DNA로 보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며 현대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정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지유석 기자
문: 이런 특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 화랑도이고 풍류도라는 말씀이시군요? 거기서 풍류신학이 창출된 것입니까?   
유: 그래요. 이런 특성을 국가교육이념화한 것이 화랑도입니다. 9세기경에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 화랑도에서 유불선(儒佛仙)의 이념을 포괄하는 민족의 얼을 확인했지요. 중국이나 일본에는 화랑이라는 말이 없어요. 고운 선생이 파악한 화랑의 교육과정에는 유불선의 철학적 사고를 훈련하는 상마이도의(相磨以道義)와 노래와 춤으로써 즐기게 만드는 상열이가락(相悅以歌樂) 그리고 명산대천을 다니며 심신을 단련하는 유오산수(遊娛山水)의 정신이 들어있습니다. 고운 선생이 이것을 풍류도라 명명했지요. 
문: 이러한 풍류의 정신이 우리 민족 문화의 DNA라고 보시는 군요. 그러면 현대 한국의 기독교 문화 속에 그러한 문화의 DNA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 풍류신학의 주지입니까?   
유: 그렇습니다. 그러한 풍류의 정신이 우리의 기독교 문화에서도 드러나야 하는데, 현대 한국기독교는 그것을 무시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만큼 찬송을 잘 부르는 민족이 없는데 한국 기독교는 답습되어온 유교적인 전통에 매달려서 그러한 DNA를 억압해 왔어요. 풍류신학이란 새로운 그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인 DNA를 되살리는 것입니다. 유교적인 기독교, 율법적인 기독교가 우리의 본래적인 영성을 억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 문서와 계율을 숭상하는 문화적 압력이 우리의 본래적인 영성에 작용했다는 말이군요? 
유: 영성을 억압한 데는 그러한 문자숭상의 태도와 기복신앙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현대 한국의 기독교는 그 영향아래 복음 정신이 왜곡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샤머니즘의 한 원리가 기복신앙인데 거기에 유교적인 형식주의가 결부되어서 현대 한국 기독교의 문화적 특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지요. 나는 우리의 본래적인 모습을 복음의 이해와 연결시켜야 진정한 의미의 복음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샤머니즘의 기복신앙과 유교의 형식주의를 결부시켜서 복음을 왜곡시켰습니다.   
역사적으로는 1930년에 이용도라는 부흥사가 있었는데, 그이가 부흥회를 하면서 3년 동안 전국을 휩쓸며 성령의 불을 지폈지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이를 이단으로 매장해버렸습니다. 하나의 역사적인 사례입니다. 우리의 신명에 와 닿는 복음, 우리가 흔쾌히 받아들이는 복음적 해석을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헬레니즘의 보편주의를 통해서 유대교의 계시내용을 신학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풍류도를 틀로 삼아서 복음을 해석해야 합니다. 
문: 현재 한국의 교육은 거의 서구화되어 있고 생활풍습도 서구적인 경향을 띠고 있는데 이런 단계에서도 토착화 신학의 가능성을 전망하고 계십니까?  
유: 지금은 2단계라고 생각해요. 1930년대만 해도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이 손으로 꼽을 정도였거든요. 이제는 외국박사가 넘치잖아요? 21세기에는 수입신학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풍류신학, 예술신학이 전개될 것이라 전망합니다. 내가 해마다 연초에는 연세대 대학교회에서 설교를 하는데 이번에는 풍류신학의 도표를 설명했어요. 풍류라고 하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어서 요즘은 예술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어쨌든 외국의 신학이론을 수학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내용을 설교한 것이지요.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토착적인 신학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유동식 교수가 2015년 1월11일 연세대학교회 설교 시간에 활용한 복음적 실존의 도해 자료.

문: 우리의 신명에 와 닿는 복음 해석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신학, 토착화 신학이라면, 그것은 통합적 세계관을 기반할 것으로 짐작합니다. 이 통합적 관점을 기독교 신앙과 접목할 때 제일 우려스러운 점은 그것이 혼합주의로 흐를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풍류신학은 혼합주의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습니까? 
유: 통합이라는 용어를 쓰면 혼합의 우려가 생기지요. 예술과 토착화 신학은 통합보다는 승화에 초점을 둡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만, 혼합주의는 종교 간에 쓰는 용어입니다. 한국에서의 혼합주의는 종교혼합을 말하지요.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인데 그것을 흐리니까, 그 점에 대해서 이단시하는 것입니다. 내 입장은 로고스가 역사적 예수로 육화하는 공간, 즉, 도성인신(道成人身), 성육신의 단계가 ‘종교’의 세계인데 이것을 넘지 못하면 혼합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의 세계는 도를 자율적으로 깨닫는 경지가 가능한 영역입니다. 불교가 이러한 ‘종교’의 세계를 대표하지요.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은 ‘신’의 영역입니다. 도를 닦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율(神律, theonomy)적 경지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십계명)으로 다스리는 타율적 차원과 득도를 목표로 삼는 자율적 차원이 통합된 단계이기도 하구요. 대표적인 것이 성례전입니다. 성찬식에서는 눈에 보이는 포도주와 떡을 먹지만 영적인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내 몸에 지닌다는 의미가 있지 않아요?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은혜입니다. 신율, 즉, 신이 역사하는 경지이지요. 
요한복음 14장20절은 이 신율적 경지의 완성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궁극적 완성태인데 여기까지 오지 못하고 헤매면 혼합주의가 되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내가 하나가 되는, 소위 ‘삼태극’의 경지로 들어오면 십자가와 부활에 의한 인격적인 승화를 이루게 됩니다. 복음이 살아나지요. 불교는 여기까지 못 옵니다. 불교는 자율적인 깨달음에까지는 도달하지만 나를 영생으로 구원하는 경지,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이에요. 니고데모는 불교의 차원까지는 갔어요. 율법을 넘어서 불교의 차원까지는 갔지만 마지막을 모르니까 예수님을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지요? 거듭나야 한다고. 그 경지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원리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늘이 주신 은혜를 받아야 도달할 수 있지 자신의 의로만 도달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혼합주의는 자신의 의로 득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지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토착화 신학은 복음의 핵심을 문자나 제도의 틀에 따라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고 우주적인 하나님을 전제로 이해할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얼로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에요. 이 말은 하나님의 우주적 특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우주 도처에 임재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종교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고 봅니다. 다만 서로 차원이 달라지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어느 단계에 와 있느냐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마지막 완성의 경지를 복음적 실존이라고 지칭한다면, 복음적 실존의 삶을 살 때 “하늘 저편에 가더라도 거기 또한 여기거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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