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자유의 복음

2015년 03월 01일 사순절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예레미야서 23:5-8 
내가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가 하나 돋아나게 할 그 날이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는 왕이 되어 슬기롭게 통치하면서,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그 때가 오면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이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보아라, 그 날이 지금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않고, 그 대신에 `이스라엘 집의 자손이 쫓겨가서 살던 북녘 땅과 그 밖의 모든 나라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 것이다. 그 때에는 그들이 고향 땅에서 살 것이다." 아멘. 
로마서 10:9-13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8:32-36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일이 없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사람은 다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물러 있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아멘. 
설교문
오늘은 3.1절 기념예배와 주님께서 수난 당하신 일을 기념하는 사순절 예배도 겸하고 있습니다. 96년 전 오늘 서울과 전국 교회예배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일제 경시청의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감시가 삼엄했던 곳은 선언서를 일부분만 낭독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던 곳은 다 읽었을 것입니다. 교회 예배시간에 낭독 된 독립선언서는 비록 일반적인 언어표현과 여러 종단 대표들이 함께 쓴 글이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진 교인들은 나름대로 신앙의 입장에서 나라사랑에 대한 선언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독립운동에도 함께 동참 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함께 이 선언에 동참했습니다. 이 마음으로 선언에 ‘아멘’으로 동참했고, 이 아멘은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독립선언서를 읽으면서 주님의 은총으로 아멘 했습니다. 일본 경시청 사람들이 그 아멘 소리를 들었다면, 아멘이 아니라 가슴을 찌르는 회개의 목소리였을 것입니다. 같은 말도 누가 어느 상황에서 주고받느냐에 따라서 감동이 다릅니다. 은혜를 받는 아멘이 있고, 가슴을 쥐어 뜯는 아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똑같으시지만 똑같은 은총이지만 받는 사람의 태도와 결단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집니다. 
저도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96년 전 우리 선조들이 했던 선언은 지금 다시읽어 보아도 엄청난 철학적 혜안과 국제적 안목과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엄청난 선언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어려운 식민지하에서 이런 용기와 깊은 뜻을 지닌 선언을 우리 선조들이 했다는 것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정말 감동적입니다. 3월 1일 선언 전에 동경에서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동경 YMCA 앞에서 문인 이광수씨가 초고를 쓰고 서로 고치며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2월 8일 낭독되었습니다. 이후 국내에서는 최남선씨가 기초를 닦은 독립선어서가 마무리 되고 기독교회와 천도교 교당 그리고 불교사찰에서 낭독되었습니다. 
오늘 제가 그 내용들을 다 말할 필요도 또 그럴 수도 없습니다만 꼭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있다고 생각합니다. 독립선언서의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몇 가지 큰 줄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원합니다. 두 번째, 우리 민족은 자주독립을 원합니다. 세 번째, 우리는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그 말을 ‘인도주의’라고 표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조선의 독립과 자유와 평등을 원하는데 그 목적은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 동아 주변의 다른 국가와 민족들 그리고 전 세계 흩어진 사람들과 함께 자유와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독립, 자유, 그리고 해방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홀로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와 함께 자유로 함께 살고, 모든 식민국가들이 독립하고, 온 세계가 화평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선언서의 목적입니다. 아마 이것을 듣는 전 세계 사람들은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에도 불구하고 조선 사람들의 마인드는 세계공동체 지향적, 평화 지향적 백성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 정신을 우리들도 닮아 받아야 합니다. 
이 선언과 관련해 당시의 교회사를 살펴봤더니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이 선언을 낭독할 것을 미리 예고하면서 어떤 성경 본문을 읽었느냐 하면 오늘 여러분이 읽으신 요한복음 8장 32절 말씀을 주로 택하여 읽었읍니다. 만일 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분의 능력 때문에 자유함을 얻습니다. 자유는 허공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 이름하는 바탕에서 나옵니다. 예수의 말씀과 예수 자신의 삶이 바로 진실이며 진리입니다. 그 속에 있으면 예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힘으로 우리는 자유라는 선물을 받습니다. 그런 내용입니다. 갈라디아서 5:1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은 자유함을 입었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마십시오라고. 오늘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여러분이 받아 들여야 할 진리와 진실의 주인이십니다. 
"진리"가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의 사상계의 관심를 점유했습니다. 대학과 기관 등의 명칭에 보면 진리라는 말이 많이 쓰여 있습니다. 라틴어로는 베리타스(veritas)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헬러철학에서 시작해 오늘의 각양 철학사상,히브리철학을 거쳐 온 세계 사상계가 진리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고, 모든 종교도 여러 각도에서 이야기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진리의 복음도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다 할 수 가 없습니다. 다만, 오늘 요한복음에 나온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는 말씀 가운데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 진리는 첫째 ‘만남’입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이라고 하는 말은 그냥 무슨 공간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와 얼굴을 마주하고, 가슴을 마주해 예수를 만나면 예수라는 분이 주시는 힘과 나의 간절한 기대 그리고 그 분의 은혜라는 선물이 서로 만남이 있는 곳, 바로 그곳에서는 반드시 ‘사건’이 생깁니다. 그 사건은 대화하며 만드는 사건이며, 또 마음을 주고받는 상호간의 소통이 만드는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사람은 변합니다. 이 변화는 종의 신분에서 주인으로의 변화입니다. 죄 지은 사람은 죄를 탕감 받고 의인으로 바뀝니다.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사람은 의로운 취급을 받습니다. 바뀜이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진실입니다. 바뀜을 만들지 못하는 사건은 살아 있는 진실이 아닙니다. 사람은 만나고 살지요. 만날 때 바뀜이라는 사건이 없는 만남은 무익한 만남입니다. 서로 이야기를 하지만 서로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야기는 무익한 대화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분명합니다. "나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준다"고. 구원은 사건입니다. 변화시키는 사건입니다. 멸망에서 생명으로 이끄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가 오늘 8장에서 하는 말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예수 안에 거하면 ‘구원의 은총’ 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의 백성 누구에게나 값없이 주어집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에 의지하여 3.1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주님을 고백하고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우리에게 변화가 생깁니다. 그 변화는 자유를 선사하는 독립입니다. 이것이 성서가 주시는 말씀입니다 라고 설교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입니다. 우리 해방 받읍시다. 자유 합시다. 주님이 약속합니다. 그 약속을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봅시다.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여러분 독립선언서의 내용 중에서 중요한 것은 자유와 진실입니다. 그 진실은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면 사건을 만든 다는 것과 같은 형태의 진실선언입니다. 예수의 진실사건의 핵심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계신 예수를 만나면 그분이 우리 죄를 대신해 죗값을 치루십니다. 수난과 죽음이 아닌 십자가는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또한 그것 아닌 십자가는 여러분과 무슨 상관있습니까? 내/우리 죄를 대신 지고 그분이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우리는 예수를 만나고 그분을 만났더니 내 죄를 탕감 받았습니다. 죄를 탕감해 주신 사건, 제 잘못을 용서해 주시는 사건, 새사람을 만들어 주신 사건입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나/우리에게 새로운 부활생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일제식민지에서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을 위로만 하지 않고 위로를 넘어서 식민지로부터 해방시켜서 독립국가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이 독립선언서의 희망이요 내용입니다. 그 아멘이 얼마나 백성들의 간절한 요구이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누구든지 자기를 주로 고백하고 믿으면 구원의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나와 만나자고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배하는 이곳에 오셨지요. 여러분이 온 것은 이분을 만나고 대화하려고 왔고, 이분은 반드시 오늘 예배를 통해서 한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함께 수난당하고, 더불어 새 생명을 주시는 역사적 사건을 함께 경험합시다. 나라도, 공동체도, 개인도 똑같습니다. 이 사건이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의 복음이라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일어나 살고 앞으로 나아 가십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통해서 출애굽을 하면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라고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유일하신 분이시다. 그분 이외에는 우리는 누구도 신으로 받들지 않는다"고 약속했습니다. 오늘 예레미야서에 보면 그렇게 믿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우상을 섬기고, 유일하신 하나님 이외에 또 하나님이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약속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래서 식민지 치하에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은 나중에 헬라, 페르시아, 로마에 이르기 까지 계속 이들 제국하에서 식민지 생활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원한은 컷을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중간에 말합니다. 전능하시고, 유일무이하신 하나님 그분은 지금도 살아계신다. 그분을 믿는 우리는 왜 자유를 얻지 못하고, 도탄에 빠졌을까. 이렇게 한탄합니다. 
최근 이슬람과 기독교가 철전지 원수가 되어 싸웁니다. 물론 싸우는 자들은 각기 종교안의 다수가 아니라 소수무리들 입니다. 우리 기독교도 한때는 십자가 운동으로 폭력적 이었습니다. 이제는 이슬람이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그리고 이슬람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철저히 원수로 사는 유대교와 이슬람, 그리고 기독교 세 종교 모두 똑같은 신앙의 아버지를 모시고 있습니다. 이름은 아브라함입니다. 모두 아브라함이 자신의 신앙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며, 유일무이하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 이름은 이슬람에서는 알라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절대 주님이신 분을 하나님으로 믿으면서도 그 이름으로 살륙의 전쟁할 수 있나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전쟁이 정당화 되나요? 모두가 다 알라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들의 반신적 전쟁을 정화하는 마가을 들어내며 이렇게 세상이 미친듯이 살아 왔습니다. 그게 옳은 신앙인가요? 
3.1운동의 선언은 불교, 천도교, 그리고 기독교가 했습니다. 절대자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도 동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공동선언 참여로 절대 하나님 유일신앙은 없어졌나요? 종교 혼합으로 변질됐나요?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절대신앙이라 믿는 아브라함 종교로 자처하는 자기들은 이렇게 전쟁하고 서로를 죽이고, 폭력을 정당화하고 살아요. 옳은 일인가요? 하나님은 폭력의 하나님이십니까? 해방의 하나님이십니까? 아니,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십니까? 전쟁의 하나님이십니까? 이런 의미에서 유대교, 이슬람, 그리고 기독교는 아브라함을 한 신앙의 조상으로 받는다고 하면서 신앙을 왜곡하는 정신 나간 ‘종교단체들’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이 보시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일무이한 하나님이 유일무이하신 것이지 그것을 믿는 종교나 종교인들이 유일무이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아 들어라. 유일무이한 절대자인 나는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아 축복하지만, 동시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유대교 아닌 사람까지도 포함하여 누구든지 회개시켜서 내 백성이 되게 한다. 유일무이하고 존경 받는 분은 나 하나님 뿐이지 어느 사람도 아니다. 사람이 만든 풍토도, 제도도, 사상도 아니다. 나 하나님만 유일무이하다. 그대들은 겸손하게 은혜를 받고 함께 어울려 평화롭게 살아라"고. 이슬람교에게도 말합니다. "내가 유일무이한 하나님이라고 너희가 믿으면 나의 유일무일성을 너희가 도적질하면 안 된다"고. 기독교에게도 동일하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유일무이하고, 그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서로 다양하기에 함께 한 하나님의 뜻을 담고 받들어서 평화롭게,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한다"고. 
식민지시대때 일본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일본정신을 바탕으로 일본만이 아닌 한국과 중국 모두를 포함하는 동아시아 전체에 평화지대를 세워서 일본이 주도하는 대동화권을 만들자고 말입니다. 그 핵심에는 일본이 주도하는 평화가 있었고, 일본이 주도하는 자유가 있었으며, 일본이 주도하는 민주정신이 있었습니다. 모두 모이되 일본이 중심이 되는 대동화권이 이들 구상속에 있었습니다. 똑같은 자유라는 말을 쓰지만 일본의 지배적 자유에 한국과 중국의 자유는 눌림받는 자유일 뿐입니다. 우리는 식민지에 고통당하는 민족으로서 한반도의 독립이 한반도 쁜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더 나아가 전 세계 평화 공동체를 위해서 한국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선언했읍니다. 그러니까 식민지배자인 일본이 말한 자유와 식민지에서 고통당했던 민족이 말한 자유가 똑같습니까? 똑같은 언어인데 그 의미는 다릅니다. 일본과 한국이 비정상적인 대칭의 갑과 을 이라는 반목의 상황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자유는 조선 사람이 말하는 자유일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유일성과 하나님의 자유를 탈취해다가 자기의 지배적 이익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비정상적인 상황,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황이 아닙니다. 요즘에 갑과 을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비정상적인 지배와 종속의 상황에서 을이 자유라고 말하고, 을이 정의라고 말하고, 을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정의요, 자유며. 의 일 것입니다. 진정으로 해방받는 자유를 누리면 그 자유는 홀로 자유를 만끽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자유가 있고, 봉사하는 자유가 있고, 협력하는 자유가 있습니다. 이런 자유가 우리가 실제로 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식민지에 있던 비정상의 상황에서 조선반도는 독립해야 한다. 자유 해야 한다고 마음을 결단하셨읍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독립을 원하면, 통일을 원하면, 행복을 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그 능력을 가지고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게 하심을 경험했음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는 우리의 이웃과 더불어 누리는 자유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상대와 함께 누리는 자유입니다. 정의도 함께 있을 때 정의지 나홀로 있으면서 누리는 정의가 아닙니다. 
제가 한 이야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한 달 전 바이체커 전 독일 연방대통령이 돌아가셨습니다. 바이체커 대통령은 강원용 목사님과도 친하셨고, 우리 교회 우리 백성들과도 친한 분이셨습니다. 이분과 관련 된 일화입니다. 이분이 1985년 충격적인 연설을 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5월 8일은 독일이 항복한 날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날을 패전일이라고 마음속으로 지켰습니다. 마치 8월 15일이 우리 한국백성에게는 해방일이지만 일본에겐 패전일인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5월 8일이 바로 전범이었던 나치 독일의 패전일입니다. 바이체커 대통령이 선언합니다. "우리는 전범국가라는 딱지를 갖고 있으며, 이제 우리는 온 세계에 대한 무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크게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날을 억울하고 아쉬운 패전의 날로 지키면 안 됩니다. 다시는 이런 범죄를 하지마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을 통해 해방시켜준 날입니다. 그렇기에 5월 8일을 해방의 날로 지킵시다"라고. 이와 같은 선언을 종교인들은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지만 정치인들이 하기에는 어렵습니다. 일본은 지금까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독일이 통일 할 때 유럽의 여러 주변 나라들이 반대했습니다. 독일을 하나로 묶어 놓으면 전쟁한다는 역사적 경험때문 입었읍니다. 독일은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일으켰읍니다. 이 두 전쟁기에 독일은 하나의 통일국가였읍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로 묶어 놓으면 힘을 과시하기 때문에 독일이 또 통일되면 평화를 깰것이기에 통일시키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우리는 유럽 속에서 무한 책임을 갖고 평화를 이루고 살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패전일을 패배의 날로 지키지 않겠읍니다. 오히려 유럽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라고 해방시켜준 날로 지키겠읍니다". 이것이 바로 분단된 나라의 한쪽인 서독 대통령의 제안입니다. 지금 돌아서 생각해 보니까 유럽 사람들은 바이체커의 연설을 통해 통일 독일에 대해 안심했을 것 같습니다. 돈일통일도 유럽 전체와 함께 사는 것이 전제된 사건입니다. 유럽은 이를 믿고 동서독 통일에 기꺼히 동조했읍니다. 그리고 세계의 냉전체제는 종말을 고했읍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이 유일하시고 사람은 다양한 공동체로 살아야기에 함께 평화롭게 살도록 정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 있든지 어떤 이웃이든지, 그 이웃과 함께 살 각오와 신앙의 결단으로 기도하며 평화롭게 살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약속했고 선언했읍니다. "우리한테 독립을 주시면 조선 반도는 세계 평화를 위해서 헌신하며 일하겠습니다. 우리한테 자유를 주시면 억눌린 모든 사람을 해방시켜서 함께 존중하며 사는 자유의 공동체가 되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면 우리는 우리뿐만 아니라 당신을 모르는 사람들, 당싱에게 저항하는 사람들까지 설득해 하나님 나라를 만들며 살아가겠습니다"라고. 그러면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다양한 백성들에게 함께 살 축복을 마음껏 주십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믿읍시다. 이런 하나님의 뜻과 달리 유일신 신앙을 자신의 집단 이기주의적 아집의 도구로 삼아 폭력과 전쟁에 나서는 유대교, 이슬람, 기독교 모든 집단등에게 호소합시다. 선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독점해서 세속적으로 유일화하지 말라. 사람을 신격화 하지 말라. 사람의 생각을 신격화해서 독재하지 말라. 함께 어울려 살아라. 이렇게 말이죠. 
하나님과 소통하며 삽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든지, 어느 민족이든지, 어느 계층이든지 함께 살기로 결단하고 선언하십니다."나한테 와서 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라. 나 하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면 구원을 줄 것이다"라고. 3.1절 메시지도 이런 배경을 다른 표현으로 담고있다고 봅니다. 우리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 하나님과 함께 삽시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구원 받읍시다. 함께 헤엄쳐 나갑시다. 함께 이 자유와 공의와 기쁨이 넘치는 이 땅위에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에 동참합시다. 주님이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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