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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타스

[김진호 칼럼] 사회적 영성이란 무엇인가(1)

입력 Sep 22, 2015 08:53 AM KST
신자유주의적 현상들로서의 ‘영성들’과 ‘그것 너머의 영성’
[편집자 주] 지난 9월19일(토) 오전 서울 종로구 사간동 화쟁문화아카데미(대표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에서는 종교포럼 “종교를 걱정하는 불자와 그리스도인의 대화: 경계너머, 지금여기” 3부 순서인 “지금여기: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시작되었다. 3부에서는 그간 논의해왔던 한국 기성종교들의 문제점과 그 원인을 토대로 앞으로 한국 종교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찰하는 자리로 꾸며나가게 된다.  
발제를 맡은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은 “사회적 영성”을 화두로 꺼내들었다. 김 연구실장의 발제문 전문을 두 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 
프롤로그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베리타스 DB
<종교를 걱정하는 불자와 그리스도인의 대화―경계너머, 지금여기>가 이제 제3부가 시작되었다. 3인의 발제자가 각 부마다 한 주제씩 발제를 하여 총 9편의 발제가 끝나야 이 포럼은 마무리 짓게 된다. 지금의 상황에서 한국종교의 걱정거리가 고작 9편의 글로 마무리될 수는 없겠지만, 1년 가까이 종교의 문제점을 큰 틀에서 짚어보고 분석적으로 논의해보고, 대안에 대한 상상력을 펼쳐보았으니 더 깊은 논의를 위한 하나의 징검돌은 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이 대목에서 개신교에 대한 나의 두 편의 글을 개략적으로 얘기하고 오늘의 발제에 들어가고자 한다. 제1부, ‘무엇이 걱정인가?’에서 나의 발제글은 〈개신교의 배타주의와 타자의 악마화〉였고, 제2부, ‘왜 걱정인가?’에서는 〈성형사회의 그리스도교〉를 발표했다.   
첫 번째 글의 제목에서 드러나듯 내가 진단하는 한국개신교의 가장 중요한 걱정거리는 ‘배타성’이다. 20세기 이후 전 세계 그리스도교 가운데 가장 강성의 배타주의가 불꽃을 일으킨 곳은 다름 아닌 한국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근대국가 형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최근 한국개신교 주류집단의 일부가 배타주의를 강력하게 드라이브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개신교가 사회 전반에서 갈등과 적대를 부추기는, 반평화의 주범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둘째 글은 이러한 한국개신교의 배타성의 배후를 묻고 있다. 나는 그것을 ‘과도한 성형 욕구’에서 보았다. 여기서 ‘성형’이란 ‘현실의 몸’을 부정하고 ‘이상적 몸’을 추구하는 의지와 행위를 말한다. 문제는 이 그 ‘이상적인 것’에 관한 상상력이 현존하는 ‘힘의 질서’에 과도하게 견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여 ‘이상적 몸의 추구’는 ‘더 강한 권력에의 욕구’에 다름 아닌 것이 되었다. 특히 한국개신교 형성 과정은 권력 욕구가 신앙으로 동일시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은 대형교회, 곧 ‘교회라는 몸’의 비대화한 실체다. 이는 독점적인 절대 1인에게 권력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기조의 사유를 일상화한다. 요컨대 한국개신교 신앙은 권력 독점적 사유의 일상화를 조장하고 있다.   
한데 이러한 ‘성형 욕구,’ 즉 몸에 대한 집착이 권력 욕구와 중첩되게 된 것은 ‘몸의 외부’를 상상하는 능력의 결핍과 관련된다. 몸은 시공간적인 경험 공간 안에서 실존한다. 그러므로 몸에 집착하는 이는 현존하는 시공간의 질서 ‘밖’에서 몸만들기(body-building)를 도모하기 어렵다. 바로 이 점을 문제제기하면서 ‘몸의 외부’에 관한 신앙적 재구성의 시도가 그리스도교 신앙사 초기에 이미 있었음을 지적했다. 〈요한복음〉이 바로 그런 문제제기를 담은 텍스트다. 여기서 ‘몸의 외부’를 시사하는 용어로 제시된 것이 바로 ‘프뉴마’(πνυμα)다. 우리말로 ‘영’이라고 번역하는 바로 그 용어다. 이 문서에 의하면 예수의 죽음은 그이가 몸의 규율에서 벗어난 존재, 곧, 프뉴마가 된 것을 의미하며, 이 몸 밖의 존재인 프뉴마가 사람들의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주장한다. 하여 여기서 신앙은 ‘몸이긴 하되 바깥을 상상하며 살아가는 삶’을 뜻한다. 즉, 바깥에 대한 상상력이 유실된 몸에 대한 집착을 의미하는 ‘성형 욕구’와는 정반대의 문제제기다. 제3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나의 발제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잃어버린’ 〈요한복음〉의 ‘영’의 문제제기에 기반을 두고, 몸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성형 욕구에 휘말려 버린 한국개신교와 한국사회가 그 병증에서 벗어날 하나의 대안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영성 현상  
1990년대 이후 전 세계는 이른바 ‘영성의 물결’에 빠져들고 있다. 2003년 가톨릭성령쇄신봉사회에 따르면 성령체험자들은 개신교와 가톨릭, 정교회를 합쳐 전 세계적으로 약 6억 명이나 된다고 발표했다. 가톨릭계의 대표적인 성령운동 기관의 발표이니 그 수치가 다소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최근 매우 확산되고 있는 영성 현상의 추세를 반영하는 발표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과 미국처럼 강력한 근본주의적 개신교가 종교의 큰 줄기를 형성한 나라들에서는 개신교 성령운동의 기세가 여전히 강력하다. 또 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불고 있는 개신교의 맹렬한 팽창은 성령운동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한편, 힌두교나 불교, 도교 등 아시아적 종교성에 영향 받은 포스트모던 신종교 현상(Postmodern New-Religious Phenomenon)이 포스트모던한 문화가 발전한 사회를 중심으로 폭넓게 확산되고 있는데, 이 현상도 영성 체험을 통해 강력한 마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나 힌두교 같은 기성종교 내에서 일어나는 명상, 자기계발과 힐링 프로그램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단월드’나 ‘마음수련’ 같은 아시아적 기원을 지닌 신종교적 조직들이 수행하는 마음의 기획들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아가 종교제도나 담론의 형식을 갖지 않지만 수행적 효과의 차원에서 볼 때 종교적 기획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자기계발-힐링의 프로그램들(각종 코칭 프로그램 혹은 리더십 프로그램)도 성행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종교적 요소의 중심에 영성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 정치인에 대한 팬덤 현상도 영성 현상이라고 범주화할 요소를 갖고 있다. [이와 같이 종교적 제도화가 구축되지 않은 영역에서 나타나는 종교성을 조너선 스미스(Jonathan Z. Smith)의 표현을 빌려 ‘종교적인 것’(the religious)이라고 부르겠다.]   
그밖에 최근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시위문화로 자리잡은 촛불집회도 영성 현상의 맥락에서 다룰 수 있다. 근대 이후 대중적인 저항은 종교적 열정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고 펼쳐졌다. 종교적 열정은 ‘신의 기획’에 대한 대중적 믿음의 산물이라면,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이성의 기획’에 대한 대중의 확신이 불러일으키는 정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도 1980년대 전후에 이데올로기적 정념에 기반을 둔 대중적 저항이 불타올랐다. 하지만 최근 한국사회의 집단적 저항에서 이데올로기는 거의 대중적 결속의 틀이 되지 못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깃발’과 ‘촛불’이다. ‘깃발’에 새겨진 단체의 명칭이나 슬로건, 그리고 그 색깔은 하나의 명료한 기표로서 지향하는바 이데올로기를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요즈음의 집회에서 깃발은 더 이상 그러한 의미로서 대중과 만나지 못한다. 단지 “우리 모임의 회원들은 이리로 모이시오”라는 표식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반면 깃발이 차지했던 자리는 촛불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촛불에는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염원’이 있다. 그것은 이성의 자리를 종교성이 대체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촛불을 들고 집회에 참여한 대중은, 과거 깃발의 주체들처럼 낡은 질서의 전복을 도모하며 파괴를 행위의 양식으로 선택하기보다는, 마치 예배 참여자들처럼 염원을 갈구하는 노래와 기원을 한껏 부르짖다가 집회를 마치면 그곳을 깨끗이 정리하고 각자의 사적 공간으로 흩어진다. 사제복을 입은 가톨릭 사제가 주도하는 ‘시국미사’가 대중의 긍정적인 이목을 끄는 것도 집단적 시위가 일종의 탈제도적 종교의 예배로 변모하고 있는 또 하나의 징후로 보인다. 여기서도 영성 현상의 확산이라는 논점을 확인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최근 영성 현상은 우리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고,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많은 기성 종교들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나아가 (포스트모던 신종교라고 불리는) 새로운 종교 탄생의 주된 배경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종교적인 것’이라고 명명한, 종교적 제도나 양식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수행적 효과의 차원에서 종교성을 지니는 범주들에서도 영성 현상은 폭넓게 드러나고 있다.    
의미와 맥락  
그런데 이 글이 주장하는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성’(spirituality)이 종교학의 주요 개념으로 부상한 것, 그러니까 종교학적 작명의 저작권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그것이 최근 범종교적, 나아가 비종교적 종교성을 이야기하는 범주로 확장된 것도 주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발전 과정에서 유래한다. 그런 점에서 이 용어는 어원학(etymology)적 보편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적절한 대체용어를 찾기가 어렵고 이미 연구자들과 대중에게 영성이라는 표현이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편의상 이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우선 앞의 이야기에서 혼란스럽게 사용된 영성과 종교성이 같은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영성이라는 용어는 ‘체험’을 강조하는 종교성을 이야기하는 맥락에서 흔히 사용된다. 즉, 영성은 ‘체험으로서의 종교성’과 관련이 있다. 한데 기성 종교는 잘 짜인 제도를 통해 구축되는데 여기서는 체험 자체보다는 체험에 대한 해석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해석은 이해의 범주이고 이성의 영역이다. 반면, 체험은 감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제도로서의 종교는 체험을 해석하여 다스림으로써 발전한다. 하여 제도종교의 엘리트는 체험을 언어화하는 자로서, 체험을 제도 순화적 감정으로 조작하는 전문가다. 그들에 의해 제도종교는 순화된 체험을 포용하고 순화되지 않은 체험을 배제한다.   
한데 종교제도가 구원의 매개자로서의 위상이 실추하게 되면, 그 자리를 대체하는 개혁가들이 속속 등장하게 된다. 특히, 제도 해체적인 체험의 전문가들이 나타난다. 이 체험은 제도에 순화되지 않는 감정이며, 구원에 이르는 대안적 양식이다. 이들 체험의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감성의 정치가 바로 영성 현상이다.   
한편 최근 포스트모던 신종교들이나 ‘종교적인 것들’은 ‘덜 제도화된’ 혹은 ‘제도화되지 않은’ 종교성을 통해 그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감성이 지대한 역할을 하곤 하는데, 이때 이런 감성의 종교성은 곧 영성과 겹친다.   
그런 점에서 영성은 ‘종교적 차원의 감성의 정치’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영성은 집단적이든 개체적이든 이 감성의 수행을 통한 ‘자기 초월’을 지향한다. 이러한 자기 초월을 향한 영성적 수행,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종교정치적 효과를 조명하는 일이 영성학의 한 과제이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러한 영성 현상이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두드러졌다.  
그것은 어떤 맥락과 관련이 있을까?  
나는 세 가지 요인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는 ‘소비사회’의 대두다. 자본주의의 주요 동력이 ‘생산’ 패러다임에서 ‘소비’ 패러다임으로 이행하면서, 불안정하고 불온하기까지 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감성의 위상은 급반전되었다. 이러한 감성사회로의 변화가 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포착된 시기는 1990년대다. ‘양(量)의 시대’에서 ‘질(質)의 시대’로, 그리고 ‘다양성의 시대’를 거쳐 1990년대 이후 ‘감성의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 속도는 급가속 발진중이며, 전지구적으로 빠르게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한국사회도 ‘질’과 ‘다양성,’ 그리고 ‘감성’의 요소가 동시적이며 압축적으로 사회변화의 주요 동력으로 작동하게 된 시기가 1990년대다.   
둘째 요인으로 매체 환경의 변화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16세기 인쇄술의 발전과 더불어 형성된 이른바 ‘구텐베르크 은하계’가 종말을 향해 추락하고 새로운 은하계가 도래하고 있다는 논제가 제기된 것은 1990년대 이후다. 15~17세기 지리상의 발견은 인쇄기술로 인한 문자혁명과 함께 찬란한 자본주의 문명을 이룩했다. 그러나 지리상의 확장이 멈춰 버린 18세기 이후 유럽은 공간의 확장을 대신하는 새로운 범주의 확장을 시간을 통해 구현한다. 이때 시간의 확장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유토피아 담론이다. 이것은 일종의 이성의 기획이었다.   
한데 이성의 기획으로서의 유토피아는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종말과 더불어 영향력이 크게 감쇄되고 있다. 사이버스페이스로의 확장을 불러일으킨 디지털전자기술은 이해보다는 직관이 더 강한 소통능력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이성의 기획인 유토피아주의의 위상을 격하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감성이 소환되어 문명의 장치들을 왕성하게 재구조화시키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를 ‘포스트구텐베르크 은하계’라고 한다면, 이러한 새로운 은하계 도래의 징후가 눈에 띄게 부상한 시기가 바로 1990년대 이후다.   
마지막으로 감성의 결정력이 확대된 요인은 신자유주의와 관련이 있다. 신자유주의는 기술로서의 지구화(globalization of technologies)의 전개와 함께 자본주의의 매트릭스 역할을 해왔던 근대국가의 족쇄가 풀리면서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지구적 자본운동의 이데올로기다. 한데 이 이데올로기가 극적으로 강화시킨 것은 무한경쟁의 문화다. 그리고 이 무한경쟁의 문화는 끝없는 자기쇄신의 소용돌이를 거의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장하였다.   
하여 존재는 자기계발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성공에 대한 장밋빛 꿈이 일으키는 열정의 이펙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패에 대한 예감된 공포가 만들어내는 절망적 몸부림이기도 하다.   
이 둘은 상반된 듯이 보이지만 서로 얽혀 있는 서사구조를 지닌다. 신자유주의적 구원론은 바늘귀보다도 작은 문을 열어놓고 극소수의 승자에게만 보상을 약속한다. 그 승률이 극도로 낮으니 보상의 크기는 어마어마하다. 물론 상상 속의 궁극적 성공에 도달하기 전에 마주하는 작은 현실의 성공들은 무수히 많다. 신자유주의 서사 속에서 이 작은 성공들은 궁극적 성공의 전조다. 한데 동시에 이 모든 잠정적 성공의 보상물은 언제 회수될지 모른다. 작은 성공들은 궁극적 성공의 예감을 낳지만 동시에 실패의 예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여 사람들은 승자의 달콤한 꿈을 꾸면서도 동시에 패자에게 덮쳐올 가혹한 징벌의 악몽에 시달린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몸이 다 소진(burning out)되도록 자기 쇄신을 위해 전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심혈관계 질환, 당뇨병, 위장질환, 그리고 우울증 같은 소진성 질환에 몸과 정신이 노출되어 있다. 건강 염려증은 단지 복지의 확대로 인한 건강검진의 활성화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무수한 사람들로 하여금 몸과 정신의 질병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쉼 없이 일하게 한다. 1990년대는 바로 그러한 소진성 질환의 위기가 빠르게 전 세계로 확산되던 시기다. 이런 상황에서 다친 감성을 치유하고 부정적 감성을 긍정적 감성으로 전환시키는 ‘종교적 기획들’이 확산되었다. 혹은 저 찌질한 일상을 한방에 뒤엎어버리는 전복의 정치(politics of subversion)로서의 메시아주의가 거세게 불타올랐다. 이러한 메시아주의는 병든 몸을 낫게도 했고, 병든 체제(국가라는 몸)를 무너뜨리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한국사회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의 금융대란을 거치면서 신자유주의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고, 이후 신자유주의의 가장 난폭한 자장 안에 포함된 사회가 되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희망보다는 절망에 더 깊게 빠져들었고 몸과 정신이 병들었으며, 사회도 회생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질병의 수렁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해방을 갈구하며 감성 과잉의 종교에 빠져들거나 ‘종교적인 것’의 수행에 몰두하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는 바로 그러한 시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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