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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칼럼] 사회적 영성이란 무엇인가(2)

입력 Sep 25, 2015 07:29 AM KST
※ 1부에서 이어집니다.
사회적 영성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김진호 연구실장 ⓒ베리타스 DB
앞에서 개념적인 가설적 정의를 시도할 때 자기초월을 지향하는 종교적 감성의 정치를 영성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기성종교나 포스트모던 신종교, 그리고 ‘종교적인 것들’에서 시도되는 감성 과잉의 기획들이 다루어졌다. 한데 최근 이러한 영성 현상의 폭발적 확산을 나는 세 가지로 요약한 1990년대적 사회변동과 연결시켜 이야기하였다. 그것을 요약하면 감성 과잉의 사회에서 종교적 감성의 정치가 분출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감성의 추동력이 현저히 강화된 사회에서 종교 혹은 ‘종교적인 것’의 차원에서 감성을 정치화하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가치에 있다. 즉, 기존의 종교적 감성의 정치가 과연 타당한가에 관하여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영성 현상은 두 가지 범주의 종교적 감성의 정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집단적 영성이고 다른 하나는 개체적 영성이다. 전자는 외면적 요소를 강조하고 후자는 내면적 요소를 강조한다. 그리고 전자는 매우 동적인 양상을 보인다면 후자는 정적이다. 한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집단 영성의 수행적 서사들이 ‘우리’와 구별되는 외부를 ‘적’으로 지목하고, 심지어 우리 내부에서 ‘적’을 색출하려 하고 그렇게 색출된 ‘적’을 향하여 강한 공격적 태도를 두드러지게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개체적 영성은 외면 세계가 벌이는 피(彼)와 아(我)의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 내면의 전쟁에 몰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때 내면의 전쟁의 수행자는 ‘우리’와 우리의 외부‘에 대해 무심하다.   
그런데 이 둘은 이와 같은 매우 상반된 양상을 보이지만, 기실 하나의 뿌리를 가진 두 개의 가지다. 왜냐면 두 개의 영성 현상은 (‘우리’든 ‘나’든) 자기중심적 이분법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타자성’은 자기초월을 향한 영성 수행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아니 심상(心象)에서 타자성의 제거가 영성 체험의 비결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법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일정한 성과를 이룩했고, 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한데 이는 그리스도교가 애초에 발전시켰던 영성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적 영성은 타자인 신과의 만남, 그로 인한 두 존재의 ‘유착’을 언표화한 것이다. 유착이라 함은 두 존재가 하나로 붙어버림으로써 서로가 각각 변하게 되는 형질변화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상호적 자기초월’의 체험이다. 더욱이 그리스도교는 그 타자가 ‘저 높은’ 타자적 공간의 존재가 아니라 ‘가장 낮은’ 타자적 공간의 존재다. 신이 지극히 낮은 그곳으로 도래했다. 이것은 단지 방향이 바뀌었다는 것의 의미를 넘어 신의 도래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지극히 높은 타자’라는 속성은 그리스도로 인해 사라졌다. 그 신은 이미 ‘지극히 낮은 타자’가 되었다. 요컨대 그리스도교 영성은 지극히 낮은 타자와 나/우리의 만남, 그로 인한 두 존재의 자기초월적 유착을 가리키는 감성적 언표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영성 현상에서 타자성의 몰락과는 다른 가치의 영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것을 가리키는 용어가 ‘사회적 영성’이다.   
이러한 사회적 영성의 전범(典範)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울이다. 바울의 시대, 그리고 바울이 활동한 공간은 감성 과잉의 시공간이었다. 하여 그의 주위에는 환상, 환청, 방언, 몰아현상적 예언, 마술적 치료 등 영성 현상이 만연하고 있었다. 여기서 영성의 수행자들은 비상한 감성의 흐름을 조절함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타자를 압도하거나 배제하는 데 그 은사(카리스마)적 능력을 활용했다. 우리 시대의 기독교적 은사 수행자들처럼 말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영성의 은사주의적 서사 대신에 ‘사랑의 영성’을 제시한다. 이때 그가 말하는 사랑의 영성은 ‘타자됨의 영성’을 의미한다. 즉, 타자를 자신의 몸으로 초대하여 그가 되고자 하는 것, 그러한 배려의 태도로 시작해서 끝맺는 수행의 과정이 바로 바울의 주장하는 영성이었다. 
한데 이러한 영성의 수행은 바울 자신에 의해서 위기에 빠졌다. 특히, 영성의 수행자가 된 여성을 대할 때 그는 타자됨의 영성을 보이지 못했다. 오히려 여성의 영성을 순응적 영성으로 만들어 가부장적 교회로 포용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이러한 실패한 영성의 역사는 그리스도교의 발전 과정에서 되풀이되었고 심화•확대되었다. 이후 신학의 역사는 영성을 제도 순화적인 것으로 순치시켜온 담론의 발전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한복음〉이 말했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영의 도발성이 무력화되는 제도의 역사인 것이다. 교회의 신앙 제도는 그렇게 영성을 순치시키려는 역사였다. 이는 영성 현상이 일으키는 제도에 대해 불안의 요소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제도에 대한 발본적인 개혁의 영적 동력도 사라졌다. 하여 영성 현상이 전 세계에서 전대미문의 성장을 일으킬 만큼 왕성했던 한국교회는 그 영성을 통해 조금도 개혁되지 못했다.    
하여 오늘 우리는 사회적 영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탈신학적 탐험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다. 탈신학적 탐험이라고 함은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신학의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으나 타자됨의 영성을 발굴하려는 탐험이고, 그리스도교 외부에서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영성과 계보학적 유사성을 갖는 종교적 혹은 비종교적 요소들을 발굴하려는 탐험이다.   
동시에 사회적 영성의 두 번째 과제는 탈신학적 탐험에 의해 발굴된 영성들에 이름을 짓고 신학적 서사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재신학적 탐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신학은 배타적 그리스도신학이 아니라 타종교, 타문화의 신학, 아니 타자성의 신학이다.   
마지막 과제는 사회적 영성 담론을 실천의 범주로 재해석하는 데 있다. 그것을 우리는 ‘수행으로서의 사회적 영성’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예배 같은 종교적 수행과 사회적 저항 같은 정치적 수행, 그리고 매일의 삶에서 영성을 실천하는 일상적 수행을 포괄한다.    
말했듯이 사회적 영성은 타자됨의 영성이다. 한데 신자유주의가 만드는 세계의 외부는 우리와 격리된 어떤 미지의 장소가 아니라 나/우리의 일상적 삶의 한 편에 있다. 그런데 나/우리의 바로 옆에 있는 그 장소를 우리가 볼 수 없게 하는 데 신자유주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앞서 말했듯이 영성 현상은 그러한 은폐의 도구로 작동하기도 한다.   
반면, 사회적 영성은 이러한 ‘타자성의 탈은폐’를 향한 수행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곳을 다시 만남과 소통의 장소로 바꾸려는 실천을 추구한다. 하여 그 과정에서 나/우리가 바뀌고 저 배제된 타자가 변화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 과정이 바로 우리와 타자가 함께 체험하는 구원이고 해방이다. 사회적 영성이 추구하는 자기초월은 이러한 구원과 해방의 과정을 가리킨다.
에필로그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사회적 영성에 관한 논지를 정리하면서 세 편의 글을 마무리해보자. 신자유주의는 세계제국이라는 몸에서부터 국가라는 몸, 지역사회라는 몸, 그리고 개개인의 몸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적 질서를 구축하는 데 모든 몸들을 총동원하는 체제의 이데올로기다. 자본주의적 질서란 모든 몸들이 가장 효율적인 생산의 기지가 되어야 한다는 규칙이자 원리다. 성형사회가 현실의 몸을 끊임없이 쇄신하여 이상적 몸을 추구하고자 하는 집단적인 열정으로 점철된 사회라고 한다면, 오늘날 성형사회의 이상적 몸은 가장 효율적인 교환가치를 지닌 몸이다. 누구나 그러한 몸을 만들고자 최선을 다한다.   
이렇게 온통 생산의 질서에 동원된 몸들이 너무나 피로하다. 아무리 열정적으로 몸을 동원하여 효율적인 생산의 기지를 구축해도,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더, 더, 더 힘을 발휘해야 한다. 잠시 쉬어간다면 그 사이 다른 이가 ‘나’를 압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실패자가 될 것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몸을 만들어야 한다. 불가능은 없다. 지금까지는 ‘나/우리’의 몸의 1%도 사용하지 않았다. 아직 99% 이상의 능력이 남았다. 무한긍정의 정신이 내 몸을 불태우고 있다.  
이런 이데올로기에 매진하다 지친 몸들은 병증을 일으키고 있다. 타자를 돌아볼 틈이 없는 사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병증들은 심지어 타자를 미워하게 한다. 증오의 정치가 판을 칠 수 있는 것이다. 한데 오늘의 종교들은 많은 경우 이러한 증오의 정치를 부추기고 있다.   
문제는 이런 병증이 만연한 사회로 인해 모두가 위협을 받고 있음에도 누구도 그 밖을 상상하지 못하는 데 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외부를 상상하지 못하도록 몸들을 휘몰아치고 있다. 하여 기성의 종교 내에서 다른 방식의 종교적 정념들이 불타올랐다. 또한 기성의 종교 밖에서 새로운 종교성들이 춤을 춘다. 나아가 종교적인 범주가 아닌 데서도 종교성이 나타나고 있다. 내가 이 글에서 영성 현상이라고 부른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세계의 무수한 영성 현상들의 지도자들과 이론가들 대부분은 피로에 찌든 자신의 몸에 집착하는 마음의 기술들을 개발하는 데 몰두했다. 바로 이 점이 사회적 영성 프로젝트가 요청되는 지점이다. 사회적 영성은 말했듯이 ‘타자성의 영성’이다. 타자를 내 몸 안에 모심으로써 내가 구원/해방  받는다는 것, 그것이 바로 타자성의 영성인 것이다.     
일찍이 이러한 타자성의 영성을 신앙의 기조로 제시한 것은 서기 90년대의 문서로 보이는 〈요한복음〉이다. 서기 30년대 활동했던 인물 예수를 추종하며 1세기 말경에 하나의 종교로서 등장하기 시작한 그리스도파는 예수의 부활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으며 발전했다. 죽은 이가 살아났다는 것은 다시 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른바 부활 신앙은 ‘몸의 부활’이라는 것으로 의미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주류 그리스도파가 도달한 몸의 신학은 다시 살아난 예수의 몸은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한데 〈요한복음〉은 이러한 몸의 신학에 불편해 한다. 그것은 누군가를 배제하는 제국의 몸의 질서에 편승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여 이 텍스트는 몸에 관한 새로운 논지를 편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이가 몸이 되었다는 데서 끝난 게 아니라, 그 뒤엔 그리스도가 다시 ‘영’이 되었다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영은 몸의 질서 안에 있지 않다. 영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은 누구도 독점할 수 없다. 영은 이 세계의 규칙에 규율되지 않는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영이 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타자가 된 존재다.   
한데 〈요한복음〉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 영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 곧 신앙이란 그 영을 내 안에 모시는 것이다. 이제 영은 몸 안에서 몸이 규율되지 않을 수 없는 세계의 질서 밖을 상상하게 하는 내적 동력이 된다. 
하지만 이게 〈요한복음〉 이해의 전부가 아니다. 이 텍스트는 죽음으로써 타자가 된 그리스도는 원래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신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 선재론이 현존하는 문서로는 〈요한복음〉에서 처음 등장한다. 한데 그이가 세상에 왔다. 그것은 신이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몸을 이 텍스트가 사릌스(σαρξ)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데 있다. “호 로고스 싸릌스 에게넨토”(ὁ λογος σαρξ εγενεντο). 초기 그리스도교가 만들어낸 가장 섹시한 이 문장을 우리말 성서는 “말씀이 몸이 되었다”라고 번역한다. 그런데 이 번역은 이 문장의 핵심어인 싸릌스를 잘 드러내지 못했다. 일찍이 바울은, 많은 그리스도파 문필가들처럼,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킬 때 ‘소마’(σομα)라는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간략히 말하면 소마는 성화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몸이다. 
반면 싸릌스는 성화될 수 없는 몸이다. 예컨대 노예의 몸, 여자의 몸, 이방인의 몸 같은 것이다. 한데 〈요한복음〉은 신이 사람이 되어 왔다는 예수를 불경하게도 싸릌스라고 표현한다. 성화될 수 없는 몸이 곧 신의 몸이다. 이것은 1세기 말의 지평에서 성화된 몸임을 주장하는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한 〈요한복음〉의 맹렬한 비난이다. 그리스도가 싸릌스라면 교회도 씨릌스여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교회라는 몸을 향해 타자인 신을 모시라는 주장은 저 높은 곳의 영적 존재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저 낮은 곳, 가려진 곳에 죽은 시체처럼 존재하는 이를 내 몸 안에 모심으로써 나/우리는 구원/해방에 이른다는 주장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타자화된 존재를 은폐함으로써 배제를 실행에 옮기는 성형사회적 질서를 구축하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그 밖을 상상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추구하는 감정의 정치를 우리는 사회적 영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영성 현상이 만연한 오늘의 세계에서 사회적 영성 프로젝트는 세 가지 과제를 통해 ‘타자됨의 영성’이라는 새로운 감성의 정치를 불러일으키려는 종교적 기획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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