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리뷰] 치정 복수극에 머문 ‘007스펙터’

전통은 간데없이 원한관계로 인한 복수만 난무해

▲007시리즈 최신작 <스펙터>의 한 장면. ⓒ스틸컷

첩보영화의 묘미는 첩보원의 치밀한 두뇌싸움, 그리고 그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강대국들끼리의 힘겨루기다. 그런데 007시리즈 최신작 <스펙터>의 연출자 샘 멘데스는 첩보영화의 특성을 잘 이해 못하는 모습이다. 전작 <스카이폴>은 50주년을 맞는 007시리즈의 전면적인 변화를 예고한 점에서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스펙터>는 첩보영화의 특성은 물론 007시리즈에 얽힌 향수마저 살리는데 실패했다. 

007팬이라면 제목만 들어도 흥분하기에 충분했다. ‘스펙터(spectre)’는 스파이들의 황금기였던 1960, 70년대 나온 007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가 상대했던 주적이었다. 
스펙터는 말 그대로 유령 조직이다. 이 조직은 세계도처에서 암약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극한대립을 이용해 핵전쟁을 일으키려는 공작을 꾸민다. 두 초강대국을 패망시킨 뒤 무주공산이 된 세계를 접수하려는 시도였건 것이다. 영국 정보부(MI6)는 스펙터의 음모에 맞서 세계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제임스 본드를 급파한다. 제임스 본드는 영웅적인 활약으로 세계평화를 지킨 뒤, 미모의 여성들과 로맨스를 즐긴다. 
이렇듯 제임스 본드 시리즈엔 첩보영화 특유의 긴장감과 함께 냉전 시절 국제정치 질서가 스며 있었다. 이 시리즈가 장수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스펙터>에서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는 마침내 ‘스펙터’의 보스 블로펠트(크리스토프 왈츠)와 마주친다. 블로펠트는 정보통신망 장악을 꿈꾸고, 이를 위해 세계 도처에서 테러를 저지른다. 이 과정에서 제임스 본드가 속한 MI6는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이 위기는 정치적이지 않다. 
블로펠트의 아버지 오버하우저는 부모 잃은 어린 제임스 본드를 입양해 키운다. 블로펠트는 여기에 앙심을 품고 아버지를 살해했다. 그마저도 성이 차지 않았던지 아버지 쪽 성을 따르는 전통을 버리고 어머니 쪽 이름인 ‘블로펠트’를 쓴다. 
▲007시리즈 최신작 <스펙터>의 한 장면. ⓒ스틸컷

전세계 네트워크를 장악하려는 악당이 고작 개인적 원한에 똘똘 뭉쳐 있는 모습은 무척 어색하다. 블로펠트 역은 <그린 호넷>, <워터 포 엘리펀트>, <장고 : 분노의 추적자> 등 출연하는 작품마다 강한 인상을 남긴 크리스토프 월츠가 맡았다. 그는 <스펙터>에서도 특유의 냉철함을 잘 표현해 내지만, 배역의 중량감이 떨어져 그의 연기도 빛이 바랜다.
시대변화에 맞게 진화한 제임스 본드 
위로가 되는 건 다니엘 크레이그의 본드 연기다. 숀 코네리, 조지 레젠비, 로저 무어까지 냉전 시절 나온 007시리즈에서 본드 연기를 맡았던 배우들은 전형적인 영국 신사들이었다. 그러나 <카지노 로얄>부터 본드로 분한 다니엘 크레이그는 엄청난 완력을 뿜어낸다. 근육으로 휘감긴 제임스 본드의 몸매를 보라. <카지노 로얄>, <퀀텀 오브 솔러스>, <스카이폴> 등 출연작에서 보여준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 연기는 007시리즈의 일대 혁신이었다. 
사실, 제임스 본드의 변화는 냉전 이후 국제정세에 불어 닥친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 냉전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졌다. 이러자 스파이 세계는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스파이들은 냉전 이후 활짝 열린 세계화 시대에서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냉전 종식은 곧장 평화를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질서는 더 불안정해져만 갔다. 소련의 부활을 꿈꾸는 러시아 군부의 강경파(골든 아이), 거대 마약조직(라이선스 투 킬), 세계 여론을 틀어쥐려는 언론재벌(투모로우 네버다이), 원유 공급망을 장악하려는 러시아 마피아(언리미티드) 등등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세력들은 초국적 네트워크를 형성해 지구촌을 활보했다. 
제임스 본드에게 이런 임무는 익숙했다. 이미 냉전시절부터 ‘스펙터’라는 초국적 조직과 싸워왔기 때문이었다. 단, 제임스 본드는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면모를 일신해야 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시대적 요구에 완벽하게 부응한 셈이다. 
▲007시리즈 최신작 <스펙터>의 한 장면. ⓒ스틸컷

시대적 맥락에서 볼 때, <스펙터>가 국경을 넘나들며 활보하는 초국적 네트워크의 실체를 그리기보다 블로펠트의 복수극으로 이야기를 몰아간 점은 너무나도 아쉽다. 사실 초국적 네트워크의 음모는 <스펙터> 보다 2008년 작 <퀀텀 오브 솔러스>에 더 잘 묘사돼 있다. 
이 작품에서 초국적 조직 ‘퀀텀’은 조직원인 도미닉 그린을 자선사업가로 위장해 볼리비아에 잡입시켜 군부 쿠데타를 획책한다. 그린은 자신의 사업체를 통해 제3국 망명 중인 메드라노 장군에게 자금과 조직을 지원한다. 동시에 미 중앙정보국(CIA)에 접근해 볼리비아의 쿠데타를 눈감아주면 대가로 미국에 석유채굴권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CIA는 석유에 솔깃한 나머지 그의 제안을 수용한다. 
제임스 본드는 퀀텀의 계략을 간파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본드를 저지한다. 영국 정부 역시 안정적으로 석유 자원을 확보할 필요성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미국과의 관계도 중요한 고려 대상이었다.
여기서 잠깐 현실 정치를 살펴보자. 故 후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재임 시절 국제정치 무대에서 반미-반서방 사회주의 노선을 성공적으로 관철해 나갔다. 차베스가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석유’였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명분도 실은 석유였다. <퀀텀 오브 솔러스>는 007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냉전 이후 세계질서를 지배한 ‘석유의 정치학’을 잘 묘사해 낸다. 이에 비해 <스펙터>, 그리고 전작 <스카이폴>은 그간 이어진 전통은 완전히 거세되고 치정에 얽힌 복수극만이 난무한다.  
이제 세계화는 대세다. 국경은 사실상 ‘국가의 경계선’이란 의미만 갖게 됐다. 세계지배를 노리는 악의 무리들은 이런 흐름에 편승해 지구촌을 활보한다. 제임스 본드는 이런 세력과 싸워야 한다. 더 이상 복수극은 안 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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