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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식 칼럼] 교권과 신학
이장식(한신대 명예교수·본지 회장)

입력 Dec 14, 2015 01:58 P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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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회장/ 혜암신학연구소 소장)

교회의 교권은 교회의 권위와 사명을 올바로 보장하는 것이며 신학은 교회의 선교 메시지를 천명하며 교회의 가시적 및 불가시적 제반활동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권과 신학은 각자 올바른 역할이 필요하지만 또한 서로 협력하는 동시에 서로를 견제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그러나 교권과 신학 어느 한 가지가 지배적이 될 때 교회가 분열되거나 아니면 변태적이 될 수 있다.

교권과 신학의 관계는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가 해석을 달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한 후에 하신 예수의 말씀("너는 베드로다 내가 내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우겠다")에 대한 해석에서 그 반석을 로마교회에서는 베드로라는 자연인으로, 교회를 베드로의 교회로 해석하여 이 고백을 가톨릭교회의 신학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그 반석을 베드로가 말한 신앙고백으로 생각하여 두 교회의 교권과 신학 사이의 차이가 생겼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자기신학을 가지고 베드로가 교회의 토대가 되고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의 판단에 따라 그 신학에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정죄하거나 또는 사죄하는 권한을 가진다. 그리고 이 대권을 가톨릭교회의 감독들에게도 주어서 소위 사도전성을 만들었다. 아무튼 가톨릭교회에서는 교권이 신학을 장악하여 신학이 전적으로 교권을 수호하는 것이 되었고 신학은 교권에 예속되었다. 반면에 개신교에서는 교회목사의 어떤 교권도 정의하여 보장하여 주는 신학이 없고 교회는 목사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 즉,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고백하고 목사는 그 집의 많은 일꾼들 중의 한 사람이며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집의 한 일꾼인 것과 마찬가지이다(히브리서 3:5).

교권과 신학이 가톨릭교회에서처럼 유착이 되면 다른 신학사상을 정죄하게 된다. 이런 현상이 초대교회 시대부터 있었고 중세교회로 접어들면서 점점 더 확고하게 되어갔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서방교회와 안디옥의 동방교회 사이에 심각한 신앙논쟁으로 교권대립이 극심했다가 325년 니케아 에큐메니칼 교회회의에서 공동으로 신앙고백을 만들어서 일단 교회평화가 찾아왔지만 그후 계속해서 신앙논쟁이 생겨 서로 상대방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러다가 451년 칼케돈회의에서 기독론 논쟁을 종식시켜서 신학논쟁은 일단 끝을 보게 되었다.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교회와 로마교회(라틴교회)는 신학이 사변적이 아니고 실천적인 것이 되어서 동서 두 교회의 논쟁 때 논쟁에 개입하지 않고 양교회의 주장을 접견시키는 중립적인 입장을 가지고 신학논쟁을 종식시키는 주요한 역할을 했었다. 그 결과로 로마라틴교회의 교권이 크게 인정받고 위상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자연히 로마교회가 세계교회의 으뜸이 되는 위치를 구축해갔다. 이것이 중세로마교회가 자칭 가톨릭교회, 즉, 전체교회라는 명칭을 부각시켜갔다. 그리하여 동방의 희랍정교회가 에큐메니칼교회라고 호칭했을 때 로마교회가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항의하였다.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회신학을 장악하여 다른 신학을 논하는 사람들을 가톨릭교회의 교리의 이단자로 정죄해서 파문하거나 사형까지 시켰다. 그리고 이단자들을 근절시키기 위해서 십자군 군대를 파송하기도 했다. 종교재판의 처벌은 세상국가의 법정의 처벌보다 더 가혹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의 절대교권을 부인하였으나 교황은 신앙과 윤리행위의 교훈을 주는 일에 있어서 절대무오라고 규정되어있다. 그리하여 중세신학자들은 신학하는 자유는 있었지만, 자기들의 신학적 결론을 도출하는 자유가 없었다. 그것이 교황의 결론에 일치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의 권위가 아니고 성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최고권위로 삼았다. 그리하여 개신교에서는 성서를 해석하는 신학이 중세교황의 자리에 대치되었다. 따라서 개신교에서는 신학의 힘이 커져서 신학이 교회와 교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생겼다. 이리하여 신학의 역할이 커지자 신학의 다른 이론들이 생겨서 신학논쟁이 생겼다. 그 결과로 교회가 분열되거나 따라서 교권도 분열되어 개신교에서는 많은 교파가 생겼다. 이것이 성서를 최고의 권위로 삼고 그 성서말씀에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개신교 본래의 신앙을 모순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되게 복종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교회의 사명을 바로 해석하고 지도할 신학이 오히려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었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도 어지럽게 만들고 교회의 평화를 깨뜨렸다. 장로교회의 본산인 스코틀랜드교회는 한 때 20여개로 분립되기도 했었다.

개신교회에서 신학의 역기능이 있었는데 이것은 16세기 종교개혁자 시대에도 있었고 거기에 따라 신학을 달리하고 신앙이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이단으로 처벌하는 일도 있었다. 이것은 중세로마가톨릭교회의 전철을 밟는 것이었다. 심지어 루터교구에서와 칼빈의 교구에서도 재세례파교인들을 이단으로 처형했었다. 칼빈도 제네바에서 한 이단자를 사형시키는 일에 동의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후 개혁파 교회의 보수세력이 강력했던 화란에서는 1618년에 도르트(Dort) 노회를 열고 칼빈주의 신학의 수정파 또는 관용파를 정죄하고 한 사람을 사형시켰다. 그리고 칼빈주의의 5 가지 주요 보수교리를 만들었다. 이처럼 개신교회에서 신학이 교회와 교권을 지배하는 것은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에서 교황의 교권이 신학을 지배한 것과 같은 것이다.

해방 후 한국 개신교회는 신앙논쟁으로 교회가 많이 분열되었다. 그중에는 한 교회가 두 개 이상의 교회로 분열되었는데, 특히, 장로교회의 분열이 격심했다. 그중에서도 보수파 합동측 장로교회의 분열이 너무 심해서 한국장로교회의 수치거리가 되어있고 이것은 세계 장로교역사상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교파의 신학의 분열은 분석하기 힘들고 논쟁거리가 될 만한 신학의 문제도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므로 그 교단의 분열은 비복음적이거나 비신학적 요인으로 인한 분열이다. 따라서 교회지도자들의 교권욕의 행패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장로교회 안에서는 교단들 사이에서도 신학논쟁이 있고 또 개인들이 다른 사람의 신학이나 신앙을 문제 삼고 이단시비를 해왔다. 어떤 이단시비는 신학보다도 개인의 신앙체험이나 어떤 영감에 따라서 한 말과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단시비자들이 지목한 어떤 사람에게서 돈을 받고 시비를 멈춘 일도 있었다 한다. 이렇게 하여 지금도 한국교회에서는 다른 나라 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단시비가 있어서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개신교회에서 신학논쟁은 성서말씀의 해석의 차이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성서해석의 차이로 성서를 최고의 권위로 삼고 그 말씀을 풀이하여 전하는 것을 가장 큰 사명으로 생각하는 교회를 오히려 분열시키고 그리스도인들의 사랑과 친교를 훼손시키는 것은 또한 개신교회의 또 하나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고 전해서 그 말씀에 교회와 신도들이 절대복종하게 함으로써 교회의 사명을 바로 수호할 책임이 있는데 모종의 교권을 행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학은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말씀을 풀이하고, 그 말씀으로 하나님이 세계를 위하여 자기의 늘 새로운 섭리를 수행하는 일을 늘 변해가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풀이해 주어야 할 것이다.

* 본 글은 혜암신학연구소에서 연중 2회 발간하는 기관지 <신학과 교회> 4호 권두언에 실린 글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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