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설교] 향기로운 제물(에베소서 5장 1-7절)

2015년 11월 29일 강남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전병금 목사

junbyungkeum
(Photo : ⓒ베리타스 DB)
▲전병금 목사

성경본문

(에베소서 5장 1-7절)

설교문

세계 선교 역사 가운데, 호주 가까이에 있는 뉴 헤브라이디스(New Hebrides) 섬의 선교이야기는 우리 모두를 감동하게 합니다. 복음이 아직 증거되지 못한 이 지역에 영국 선교사이자 신학자였던 존 윌리암스가 1839년 11월 20일 처음으로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그는 상륙 즉시 해변에서 살해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해리스 목사가 그 섬에 들어갔는데, 그 역시 3일도 안되어 원주민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세 번째는 존 골든 부부가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원주민과 사귀는 데까지는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원주민 가운데 백인을 증오하는 사람들에 의해 살해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선교의 문턱도 넘기 어려웠지만, 이 섬에 대한 선교사의 발길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로 맥네이 선교사가 도전했고 그도 1년을 채 못넘기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섯 번째로 수년 전에 순교한 존 골든의 동생이 그 섬에 들어갔는데, 그동안의 선교사의 희생이 드디어 결실을 맺어 원주민들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그들의 언어를 연구하고 신약성경 번역에 착수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그의 서재에 침입한 괴한의 손에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가 흘린 피가 마침 번역을 하고 있던 사도행전 7장, 스데반의 순교 부분의 원고를 적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여섯 번째로 그 섬에 들어간 로버트슨 목사에 이르러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펼치게 되었고, 40년 후에는 80개 섬의 전 주민이 복음화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이 섬에 선교하기 위해 들어갔던 선교사들의 공통점은 처음 그 섬에 가서 순교한 윌리암스 목사의 신앙을 계승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윌리암스는 말하기를 "복음의 전진은 중단될 수 없다. 나는 내 계획으로 이 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윌리암스는 본문에서 나온대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었습니다.

본문 에베소서 5장 2절에 보면,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희생제물로 드렸다는 것인데, 여기서 바울이 말한 "향기로운 제물"은 구약에서 제사에 대한 규정을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은 희생제물이 제단 위에 바쳐질 때, 고기를 태우는 향기가 하늘로 올라가는데,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맡고 기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는 그것을 그들의 손에서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번제물을 더하여 불사르라 이는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니 곧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출 29:25)

"그 소제물 중에서 기념할 것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2:9)

"너희는 또 이 떡과 함께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양 일곱 마리와 어린 수소 한 마리와 숫양 두 마리를 드리되 이것들을 그 소제와 그 전제제물과 함께 여호와께 드려서 번제로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며"(레 23:18)

구약에는 이와 유사한 구절이 무려 50번이나 나옵니다. 그만큼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으로 예수님의 희생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향기로운 희생제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단에서 고기 태우는 냄새를 기뻐 받으신 것처럼,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주시며 희생제물로 삼으신 것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드린 희생제물은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서 말한 것처럼, "죽기까지 복종"하신 '완전한 복종'이야말로 예수께서 드린 희생제물의 의미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의 '십자가 복종'을 통해 온 인류는 죄와 사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찔리고, 상하고, 징계받고, 채찍에 맞고, 죽임까지 당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했는데, 에베소 교인들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을 본받으라고 권면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엡 5:1).

그리고나서 바울은 하나님을 본받는 구체적인 방법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 5:1-2)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사랑은 희생과 헌신의 사랑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았다고 하는 성도들은 서로 희생하고 양보하는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단순한 낭만적 감정의 차원이 아닙니다.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비우고, 이웃에 대해서 사랑과 용서와 자비의 태도를 일상 생활에서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이 타고난 이기적인 성정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본받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볼 때만 그러한 일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우리가 "향기로운 제물"로서 어떤 모습을 갖춰야 하는 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 핵심은 "순결함"입니다. 이 역시 구약의 제사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너희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일곱 마리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로 드릴 것이며"(민 29:2)

바울도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자, 예수 그리스도처럼 향기로운 제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그 당시의 타락한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 5:3)

그런데 실상 그 당시는 "순결"이라는 개념은 세상에 없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성적인 부도덕은 전혀 죄악시하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첩을 가지는 것은 당연시 했고, 매춘 행위도 공공연히 이루어졌습니다. 일례로 고린도에서는 아프로디테 신전에 수 백명의 여사제가 있었는데, 그들은 거룩한 여자들이라고 해서 그들과의 성관계를 거룩한 행위로 취급했습니다. 또한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인 시세로까지 "로마사회에서는 젊은이들이 매춘부와 교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당시의 성적인 문란이 어느정도 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이 이러한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는 것을 조금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순결하도록 강권하였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생각은 당시 이방인들은 꿈도 못꾸던 일이었습니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이 들어가는 곳에는 도덕적 개혁이 수반됩니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은 교인들에게 금주, 금연, 축첩금지를 강권했는데, 그런 것들을 당연시 여기던 당시 사람들은 오히려 선교사나 교회의 가르침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도덕성 회복 운동'은 우리나라 가정의 질서를 세우는 역할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의 도덕적 우월성을 각인시키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회전반의 도덕 수준은 매우 저급하기 짝이 없습니다. 부정부패로 얼룩진 사회 지도층에서부터 각계각층에 이르기까지 도덕성을 논할만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저급한 대중문화는 날이 갈수록 가관입니다. 예컨대, 방송에서도 공공연하게 혼전 성관계를 조장하는 사회 풍조에서 혼전 순결을 지키는 것은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 우월성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 문화에 맞서 개인과 가정과 공동체를 순결하게 세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의 위상은 정반대로 나가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교계 지도자의 성적 스캔들, 재정비리, 금권선거, 반인륜적 범죄 사건이 터져 나오면서 교회의 위상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추락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현실을 개탄하면서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이러한 때일수록 오히려 더욱 순결한 모습을 견지하며 교회를 개혁하고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택하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바울은 순결한 성도들이 되기 위해서, 일상 언어 생활에도 주의를 기울일 것을 권면했습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하는 말들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말에는 그 사람의 인격과 생각 뿐만 아니라 삶과 신앙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희생제물이 되어야 할 성도가 더럽고 어리석고 희롱하는 말이나 하는 실없는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나 대중매체에는 저급한 말들로 넘쳐납니다. 아이들조차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달고 사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고 철저히 자기 관리를 해서 성결한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또 바울은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 5:6)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 당시 초대교회를 어지럽히던 유대주의자나 영지주의자 같은 이단 사상들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우월성을 앞세워 차별의식을 조장하거나, 이원론적 사상을 가지고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구분하여, 영적인 것은 선하고, 물질적인 것은 악한 것이라고 무시했습니다. 특히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이 영과 육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영은 중요하고 육체는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종종 도덕적 방종으로 이어졌는데, 어차피 가치도 없고 썩어 없어질 육체를 가치고 무슨 일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성적인 것은 육체의 관계된 것이지 영혼에 관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사회가 성적으로 타락한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론 사상은 기독교 사상과 거리가 멉니다. 기독교는 영혼과 육체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의 구원은 영과 육을 아우르는 통전적인 것이지 어느 한 부분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으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주셨으니까 우리는 무슨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죄를 범하면 범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 활동하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좋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악한 말로 우리의 신앙을 해체시키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깨어서 이런 이단 사설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는 참으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위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며 특권이지만, 우리에게는 동시에 책임과 의무가 부여됩니다. 우리는 아무런 댓가 없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그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이 되도록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제물이 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라고 한 것처럼, 신앙적 결단을 통해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 위해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7] 중세교회 대중들의 신앙생활

중세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스콜라주의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콜라주의 문헌들은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것을 읽거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6] 중세 신학의 대략적 지도: 서방의 '스콜라 신학'과 동방의 '비잔틴 신학'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5]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의 터전을 마련한, 아우구스티누스!

"서방신학은 동방신학보다는 출발이 좀 늦었으나 곧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교부들이 주축이 되어 착실하게 발전해갔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4] 카르타고 학파의 거침없는 변증과 교회론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의 신학을 오늘날 살피는 것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이들의 신학은 현실적이고 참여적이고 실존적이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