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25 "교회주의 자폭 선언"
정재현의 신앙성찰

입력 May 23, 2016 07:54 AM KST
jungjaehyun
(Photo : ⓒ베리타스 DB)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3.1. 다원주의(2) 니터: '참된 종교'

이제 니터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중개자일 뿐 그 자체가 아니니 절대성 주장을 접고 참됨을 향하자고 역설합니다. '절대종교에서 참된 종교로의 전환'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공식적인 카톨릭이 자신의 절대성 주장을 고수한다 해도, 교회 안에는 언제나 '익명의 그리스도교인들'(anonymen Christen), 즉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가치들과는 일치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절대성 주장을 공유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 ... 그들의 종교를 신빙성 있고 성숙한 것으로 긍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의 그리스도교적인 상징들, 교의들, 도덕률, 제의형식들이 신비의 참되고도 신뢰할만한 중개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신비 자체는 아니라고 하는 고통스럽긴 하지만 자유롭게 해 주는 지각과정을 통과하거나 현실화하며 승인하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니터 57)

이는 작게는 현대 로마 가톨릭의 자성적인 선언이지만 꼭 가톨릭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개신교를 포함한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에도 해당합니다. 중세교회를 비판하면서 개신교가 나왔지만 교회와 구원을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것은 개신교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찌 보면 로마 가톨릭이 1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천명했던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선언에 대해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로 자성을 담아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면, 개신교 중 상당수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명제를 아직도 줄기차게 고집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른바 '이단'이라 불리는 소종파일수록 자신들과 구원을 밀접하게 연결시킨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단'은 자신들에게로만 '구원'을 제한하여 적용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단과 정통의 경계선이 상당부분 모호해진 오늘날 교회현실에서 이단을 구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일지도 모릅니다.

모르몬교, 안식교 둘 다 기원은 명백히 사교집단이었습니다. 특히 모르몬교는 남성, 백인 우월주의 집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러하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집단이 제도에 편입되면 모두 나름의 개혁을 거칩니다. 모르몬교, 안식교 등이 지닌 과거의 백인 우월주의, 남성 우월주의 성향은 이제는 흐릿해졌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떤 면에서는 장로교, 감리교와 같은 주류 교단의 구성원들보다 윤리적으로 훨씬 청렴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것으로 이들의 이단성을 논하는 것은 이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서 이단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는 주장에서 찾을 수 있고 찾아야 할 것입니다. 모르몬교는 여전히 모르몬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며, 안식교는 안식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와 견주면, 다른 교단들은 타종파를 비판하기는 하지만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계에서 결정적으로 이단을 구분하는 방법은 바로 교회가 구원을 붙들어 매는지의 여부입니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이 비판한 중세교회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재자에 불과한 교회가 사실상 구원의 중개자가 아니라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주체를 자임한 것에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교회가 하느님의 자리를 표방한 죄에 대한 외침이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통한 개신교회가 교회주의는 넘어서려 했으되 이미 초기에 성경주의에 빠졌고, 만인사제설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교직주의, 교회주의로 돌아가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구원에 관하여 하느님의 자리를 표방하려는 경향들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서 논문을 이루는 절의 제목들을 살필 때 이미 느꼈겠지만 니터는 자신의 논의를 순환적이면서도 나선형적으로 끌고 나아가는 방식으로 전개합니다. 그래서 다시 배타주의에서 포괄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 대해 말합니다. 물론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기 위한 예비적인 작업이고 포석의 의미를 지닌 것일 터입니다.

만일 가톨릭전통이 구원은총의 보편적인 가능성을 주장한다면, 그 전통은 이 은총이 종교들을 통해 중개된다는 사실을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니터 58)

게다가 이 신학자들이 세계종교들이 그리스도교와 어떻게 비교되는가를 기술한다면 그들은 이 종교들을 구약성서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궁극적 현현을 기다리는 형태들," "사전 계획들," "길을 예비하는 자들"로 명명할 것이다. 혹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 종교들은 "복음의 준비"이다. (니터 59)

배타주의는 특수에서 출발해 보편으로 갑니다. 여기서는 나사렛 예수로 구현되는 시공간의 특수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포기될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의 구세주가 되는 것은, 아직 그렇지는 않지만 역사가 완성되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견주면 포괄주의는 은총의 무조건성, 선행성을 강조합니다. 무조건, 선행은 곧 보편입니다. 우주에 넘실거리는 이 은총을 누군가 알아챕니다. 포괄주의에서는 이를 알아챈 이가 바로 그리스도교인이고, 모르는 사람은 익명의 그리스도교인입니다. 그러니 알아챈 이는 모르는 이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포괄주의의 노력은 어떻게 되었다고 니터가 진단할까요?

최근에 가톨릭 신학자들은 비그리스도교인들을 뒷문을 통해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들을 포기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가 자기 밖에서 경험되는 구원을 중개하거나 구성해야 한다고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 (니터 59)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그럴 듯해 보이는 설명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한계를 지니며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지막 절 제목인 '종교들 간의 통일적 다원주의'를 두고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이것이 니터의 결론입니다.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 니터는 어떠한 작업을 수행하는지요? 다시 한 번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비판적으로 정리합니다. '미래의 방향들: 교회중심주의에서 그리스도중심주의를 넘어 신중심주의에 이르기까지'라는 그 전 절의 제목이 이를 보여줍니다. '교회중심주의,' '그리스도 중심주의,' '신중심주의,' 이 셋이 어떠한 면에서 어떻게 충돌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좀 더 나아가, 왜 니터가 구태여 '교회중심주의'에서 시작해 '그리스도교 중심주의'를 넘어 '신중심주의'에 이르러야 한다고 했는지 생각해봐야합니다. 이 순서는 얼핏 어색합니다.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입장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사를 보면 그리스도에서 교회를 거쳐 신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니터는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거쳐 신으로 갑니다. 앞의 순서를 1,2,3이라 한다면 니터는 2,1,3으로 순서를 다시 짠 셈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또한 교회든, 그리스도든, 신이든 '중심주의'라는 말을 포기하지 않았음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서 니터가 말하는 다원주의의 방향과 색채가 드러납니다. 그는 다원주의로 가긴 하지만 '통일성'을 포기하지 않는 다원주의입니다. '일원적 다원주의'라는 것 말입니다. 더 세세히 살피기 전에 먼저 이렇게 방향과 감을 잡아놓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교에게 하나의 새로운 결정적 시간(kairos)을 선사했으며, 이 새로운 시간에 상응하기 위해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들과의 새로운 관계와 하나의 새로운 자기이해를 추구해야만 한다. (니터 60)

그렇다면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교회중심주의에서 그리스도중심주의로, 또 그리스도중심주의에서 신중심주의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원적 다원주의로 가는 그의 길을 따라 가봅시다. 우선, 니터는 교회중심주의를 건드립니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라든가 그리스도 자체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일반적인 견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들이 추론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종교 형식들-신앙고백, 법규들, 그리고 제의-은 단연코 변경할 수 없는 진리진술로 절대화되어서는 안 된다. ... 교회중심주의의 포기는, 교회는 보편적으로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승인과 선포를 요구한다. 교회의 근본적인 사역은 구원사업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촉구하는 과제이다. ... 교회는 하느님 나라가 형성되는 표징이며 봉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말이 오기 전에 모든 인간이 교회의 지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하느님의 계획"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니터 62)

이 긴 인용구절에서 핵심은 "교회의 근본적인 사역은 구원사업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촉구하는 과제이다"라는 문장일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구원의 주권이 교회에 있지 않다는 것을 실토합니다.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재천명한 것이 그리 오래전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새롭게 혁명적인 자화상을 정립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가톨릭이 이 교회주의를 깨는 데는 실로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뿐 아니라 칼 라너가 주축이 되어 활동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주장한 것은 아직도 '교회주의'였으며 여전히 주류는 '교회주의'를 고수합니다. 교회주의에 대한 반성을 한지 아직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니터는 교회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 중심주의에서도 벗어날 것을 제안합니다. 아래 구절은 그리스도중심주의의 역사적 배경과 그 한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묵시적인 지평과 그 당시의 혼합주의적인 종교들 속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초대교회의 두려움에 직면하여, 게다가 초대교회의 "고전적인 의식"에 근거해 볼 때 교회가 "독생자," "유일한," "다른 어떤 이름도 불가함," "유일한 자"와 같은 자격부여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했었다는 사실은 당연하고도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자격부여는 아마도 하느님께서 나사렛 예수 안에서 행하셨던 것을 의미심장한 것으로 선포하기에는 당연하지도 않고 필연적이지도 않은 것 같다. (니터 65)

초대교회에서는 주위의 많은 이방종교들 사이에서 구별되는 그리스도의 독특성과 유일성을 강조했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랬었지만 다분히 시대적이고 종교문화적인 차원에서 제한된다는 것입니다. 시대를 뛰어넘어서도 여전히 그 뜻이 통하기 위해서는 신중심주의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 니터의 지론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정체성 문제이니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중심주의에서 신중심주의로 전환하는 이야기도 좀 더 차분히 곱씹을 가치가 있습니다. 이 문장을 전체 텍스트의 핵심이라 볼 수는 없지만, 다원주의적 문제의식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전체성은 우주-신인적 원리(das kosmotheandrische Prinzip), 즉 하느님의 보편적 계시와 구원의 현재이지만, 그리스도의 전체성은 예수가 아니며 예수 안에 완전히 포함될 수도 없고 예수에게 국한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니터 65)

이 주장은 나사렛 예수의 독특성과 유일성을 주장하는 배타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여기서 초점은 나사렛 예수의 독특성이 아닌 그리스도의 전체성입니다. 전체성을 보편성이라고 읽으면 적어도 여기까지는 니터가 포괄주의와 궤적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전체성은 예수가 아니며 예수 안에 완전히 포함될 수도 없고 예수에게 국한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은 단적으로 예수의 독특성과 유일성으로 표현된 개체성이 그리스도의 보편성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배타주의적 성향이 강한 한국 개신교에 속해 있는 이들에게는 굉장히 낯선 표현입니다. 아니 사실상 낯설다기보다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보이는 주장입니다. 독특성과 전체성을 형식적 범주로 풀자면 각각 개체성과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터인데 그렇게 풀고 나니 익숙하지 않은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니터는 이 논의를 붙잡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신중심주의는, 언제나 위대하신 보편적 하느님은 제한된 특수 형식 안에 갇힐 수 없음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보편적 하느님을 하나의 특수한 형식 속에서만 실제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니터 66)

앞의 인용 구절이 낯설다면 이 표현은 더욱 혼란스럽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전체성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의 보편성을 말합니다. 사실 니터에게서 그리스도의 전체성은 하느님의 보편성을 말하기 위한 초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보편적인 하느님은 "특수한 형식 속에서만"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특수한 형식 속에서도"가 아니라 "특수한 형식 속에서'만'"이라고 한 것이 중요합니다. "특수한 형식 속에서도"라고 하면 보편적인 이념으로도 만날 수 있고 특수한 형식으로도 만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니터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오로지 '특수한 형식 속에서만'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모든 참된 종교 경험 속에는 보편과 특수 사이의 감추어진 역설적 긴장이 있다"(니터 66)고 니터는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니터는 포괄주의와 결별합니다. 왜일까요? 배타주의는 특수에서 보편으로 나아갔고, 포괄주의는 보편에서 특수로 갔습니다. 둘은 논리적으로 정반대이지만 보편과 특수 중에서 한 쪽에 우선권을 준다는 점에서는 같은 차원에 있습니다. 그런데 니터는 보편이 특수를 "통해서만" 만나고 경험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특수와 보편 중 어느 한 쪽에도 우선권을 두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보편과 특수는 역설적인 긴장을 이룹니다. 그리고 이는 상호 대등적인 관계를 이룬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원주의는 배타주의나 포괄주의와는 그 논리적 구성방식이 매우 다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겨먹은 꼴,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그 관계 속에서 신의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 할까요?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떠한 차원, 층위, 토대, 지평이 가장 적절할까요? 어떠한 관계 방식도 '틀렸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타당성이 지엽적이고 부분적일 뿐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을 벗어나는 순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의 꼴에서 보면, 타당성이 가장 넓어 보이는 다원주의에도 마찬가지의 물음을 들이대야 합니다. 자기 안에 이미 자기와는 다른 타자가 넘실거리며 자기를 구성하는 꼴을 보게 되면서 세계와 신에 대한 이해도 달라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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