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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타스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28 "상대주의를 넘어서게 하는 공통본성"
정재현의 신앙성찰

입력 Jul 12, 2016 03:59 PM KST

3.2. 다원주의(5) 스위들러: '종교간 대화'

jungjaehyun
(Photo : ⓒ베리타스 DB)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스위들러도 바로 이를 논의합니다. '상대주의라는 유령'(스위들러 137)이 바로 그것입니다. 절대성이 환상이고 허상이라면 모든 것이 상대적일 뿐이니 서로 다르기만 할 뿐 모두 다 옳다고 주장하는 상대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주장을 일삼는 무정부적 상대주의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도 사실상 절대성 주장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극단적 주장일 뿐입니다. 절대주의 아니면 상대주의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양분법적 사고에 젖어있다 보니 흔히 그리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삶의 현실은 그런 양분적 극단 사이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상충하는 꼴과 얼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차라리 실상은 그 사이의 넓이와 깊이에서 더듬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스위들러의 다음과 같은 정리는 부질없는 논의를 평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상대주의라는 유령은 절대주의의 정반대 극단이다. 중립적인 용어인 상대성이 단지 관계 속에 있는 특성을 표시하는 것과는 달리 상대주의는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용어이다. 대부분의 '주의'와 마찬가지로 만일에 사상의 의미에 대한, 진리에 대한 어떤 진술이 절대적이고 전적으로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우리의 실재경험과 조화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실재의 진리에 대해서 진술하는 모든 것은 완전히 상대적이고 전적으로 주관적이라는 주장도 똑같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실재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적합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서 다른 것들에 대한 모든 토론과 진술들을 중단하게 하는 원자화된 독아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스위들러 138)

그러니까 삶의 현실에서 보면 진리는 무조건 절대적이지도 않고 대책 없이 상대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절대적이기에는 삶이 복잡다단하고 또한 마구 상대적이기에는 삶이 공유하는 공통된 기초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렇게 공통적이면서도 복잡다단하기 때문에 이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만나고 대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화는 이러한 상황의 삶을 살아가는 데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그저 보조적이거나 부수적인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위들러는 이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강조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대화에 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입장이라는 관점에 갇힐 뿐만 아니라 지금 그렇게 갇혀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스위들러 140). 이 말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자신의 관점에 갇혀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바로 진리의 절대성이라는 이념이 자아내는 자기도취의 실상입니다. 도취되어있는 줄을 모른다는 것이 도취의 핵심이겠지요. 그런데 도취는 자기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니 타자에게 자기를 강요하고 휘두른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무책임한 행위'요 '유태-기독교적 술어로 하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타자와의 만남 및 대화는 한가로운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위들러는 구체적으로 대화의 기본규칙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합니다. 이를 여기에 모두 열거할 필요는 없지만 그 중 몇 가지는 특별히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화의 목적은 서로 배우기라든지 양쪽에서 함께 기획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서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간 대화에서 자신의 이상들을 상대방의 현실적 실천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스위들러 144)는 항목은 우리가 자동적으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타종교인과의 만남에서 우리는 대체로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는 원론적으로 좋은 이상을 내세우고 타종교인에 대해서는 눈에 비치는 현실의 문제를 떠올리며 이를 맞대응시키는 습성을 무반성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범주의 오류인데 성찰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불일치에 대해서도 미리부터 전제를 가지고 제한하는 것도 부적절하다고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실제의 대화를 통해서 어떤 다름에 대한 판단은 오해로 드러나는가 하면 다른 다름이 새롭게 발견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만남과 대화에 앞서 먼저 스스로를 성찰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스위들러는 대화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동일성을 위해서도 자기비판은 필수적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렇게 잘라 말합니다: "동일성과 확신은 건전한 자기비판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포함해야만 한다. 그것이 없다면 대화도 있을 수 없고 사실상 동일성조차도 있을 수 없다"(스위들러 147). 말하자면 자기동일성은 오히려 자기비판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찰은 스위들러가 '에큐메니칼 에스페란토어'를 주장하는 데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서로 다름을 확인하면서도 만나고 대화할 수 있기 위해서 하나의 언어가 요구되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간 대화를 위한 공통언어라 할 수 있는 에큐메니칼 에스페란토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또 하나의 특정한 언어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소통가능성을 핵심으로 하는 발상인데 바로 '인간의 공통인성을 토대로 한 언어'를 뜻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단호하게 주장합니다: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언어를 통해서 종교적-이념적 통찰을 정리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즉, '위로부터'나 초월의 관점으로부터가 아닌 우리의 인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약간 다른 관점에서 말하자면 우리는 '밖으로부터'가 아닌 '안으로부터'의 언어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스위들러 156)

여기서 '아래' 또는 '안'이라는 공간은유는 종래 신학방법론에서의 표현을 빌려오기는 한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의 공통본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고자 스위들러는 '아래'나 '안'의 터인 '우리'는 "가능한 한 넓은 우리이어야 하며 사실상 점점 더 넓어지는 우리이어야 한다"(스위들러 156)고 과감하게 확장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초월자에 대한 믿음이나 언어를 제외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종래 초월에 대한 언어는 당연히 유비를 사용해왔는데 이것이 "우리의 일상과 과학적 경험 그리고 언어들과는 관계없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감각 안에서 불가피하게 지극히 '종교적'이었다"(스위들러 157)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본성이나 현실과는 동떨어진 방식과 내용의 언어로 점철된 유비이다 보니 사실상 다른 종교인들과의 소통은 고사하고 동일한 언어를 쓰는 같은 종교 안에서도 의미를 함께 나누고 모으는 것조차 쉽지 않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의 공통본성'에 주목하자는 현대적 전환 덕분에 비현실적 언어로 엮어졌던 유비도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현대에 이르러 점차로 인정되는 유비는 우리의 일상, 과학적 경험, 그리고 언어 속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스위들러 157)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인간의 공통본성에서 시작하는 현대의 시대정신에 의한 요구에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초월적인 것이 새로이 자리를 깔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하게 주목되는 '초월적' 차원이라 함은 우리의 일상 즉 '아래로부터,' '안으로부터,' '내재적인,' '인간다운' 경험이나 언어와 조화되지 않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안에 간직된 것이니 결국 존재하거나 이야기된 모든 것 안의 안식처이다. (158-59)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초월이 내재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초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사유되고 추구되며 관계되는 방식이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초월과 내재가 만나야만 하는 이유는 새삼스럽게 주목하게 된 '인간의 공통본성'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전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형이상학적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근대적인 의미에서 잘난 주체로서의 인간의 중심주의적 본성을 강조하는 것도 전혀 아닙니다. 초월의 자리로서의 내재를 요구하는 인간의 공통본성이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삶의 꼴과 얼을 가리킵니다.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형이상학적 본질에서는 살아가는 삶, 즉, 죽음을 싸안는 삶이 자리 잡기 어렵습니다. 중심적 주체로서의 인간에서도 역시, 아니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시대에 이르러 죽음과 얽힌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 새삼스레 폭로됨으로써 '인간의 공통본성'을 주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즉 서로 대조적인 듯이 보이는 삶과 죽음의 역설적 얽힘이라는 '공통본성'으로 인하여 대립항인 초월과 내재도 그렇게 역설적으로 얽힐 것이 요구되고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정신이 자기비판을 향해 혁명적으로 전환하는 과정이 에큐메니칼 에스페란토어에 근접해가는 문명사적 계기였다고 스위들러는 평가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의 말에 귀 기울여보는 것은 적지 않은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물론 과거 동서양 사상의 여러 위대한 전통과 유산들이 에큐메니칼 에스페란토어의 발전에 기여해왔다. 공통의 인간성과 세계시민성을 강조한 근세후기 유럽의 계몽주의에 의해 이를 향한 진일보가 이루어졌다. 계몽주의는 그 후에 역사주의의 철저한 비평, 회의의 해석학(포이어바흐, 니체, 프로이트), 비교문화적 분석 등을 통해 순화되고 심화되었다.... 게다가 에큐메니칼 에스페란토어는 합리적인 어휘에 의해서만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는 상징들, 미학적 표현들과 행위들을 수용해야 한다. (스위들러 159-60)

이제 에큐메니칼 에스페란토어는 인간의 공통본성을 이루고 있는 정신의 요소로서 지성 뿐 아니라 감정적인 차원까지 아우르는 과정을 거쳐 마땅히 더욱 풍부해져야 하고 또한 그렇게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써 명실공이 서로 다른 전통과 문화를 지닌 종교인들 사이에서도 앞서 말한 그런 뜻을 지닌 '인간의 공통본성'을 토대로 만나서 대화함으로써 같은 것을 나누고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탁월한 틀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수행함으로써 인간은 그 개인이 속한 종교전통 안에서 신앙의 성숙과 발달을 평가할 수 있으니 신앙발달단계란 바로 다름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같음과 이으면서 자신의 같음이 만남의 상대에게 다름일 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다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일컫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주목한 자기비판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그는 이러한 성찰을 위해 신앙발달론에 참여한 에릭슨, 삐아제, 콜버그, 파울러 등의 논의를 소개하면서 에큐메니칼 에스페란토어의 타당성과 당위성을 재차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런 탁월한 도구를 사용해서 만남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어떤 종교인에게든 적용되며 그리스도교인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위들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교인들이 비그리스도교인들을 만나는 곳에서 같은 진리들, 같은 통찰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면 (즉, 오늘날의 비판적인 세계에서 역동적이고 대화적인 언어로 효과 있게 설교하는 것) 그들의 그리스도교적인 헌신도 불충실한 것이 될 것이다. (스위들러 198)

분명한 것은 이제 다른 종교인들과의 만남이나 대화는 그 행위의 상대가 되는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지니거나 타자를 위한 것이기에 앞서 우선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 구성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자기비판이 자기동일성의 핵심이라는 것과 같은 맥락의 통찰입니다. '하나만 아는 것은 하나도 제대로 모르는 것'이라는 지론이 여기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확인됩니다. 이러한 주장은 드디어 다음의 선언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궁극적으로 어떻게 세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는가와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하느님과의 이러한 화해, 즉,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수단을 통한 인간 삶의 궁극적 의미의 습득을 경험할 것인가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 사이에 반대가 있을 필요가 없다. (스위들러 199-200)

매우 관대한 듯이 보이기까지 하는 스위들러의 위와 같은 진술은 다른 수단을 통한 의미 습득이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교적인 길과 충돌하는 것으로 새길 이유는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스위들러도 우아한 방식으로 통일적 다원주의를 귀결시키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귀결은 역사성과 상대성을 향한 적극적인 취지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공통본성'이라는 표현이 지니는 지향성에 의해 이미 예견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평가를 확인시켜주는 결정적인 선언이 스위들러의 논문 마지막 줄에 다음과 같이 등장합니다: "차후의 대화의 한 결과로서 필요할지도 모를 수정과 관계없이 내가 전적으로 성공했다면 우리는 '보편적 종교-이념 신학'으로 나아가는 데 한 발짝 나아가게 될 것이다"(스위들러 200). 이런 선언과 함께 우리는 현실적 다양성에 대한 그토록 풍부하고 심오한 통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통일성으로 끌고 들어가는 집요한 동일성 이념을 또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서구 그리스도교의 다원주의는 그 출발의 착상은 참으로 괄목할 만한 것이었지만 동일성에로의 귀소본능을 아직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나 하는 평가를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이제 비서구 그리스도교, 그리고 더 나아가 비서구 비그리스도교 진영에서의 종교간 관계 논의로 우리의 눈을 돌리고 귀를 세우며 입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동일성 회귀와 이에 의한 왜곡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도모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라이문도 파니카의 전율적인 통찰을 살피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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