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대담

[대담] 트랜스 휴머니즘 시대의 윤리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박일준 박사 편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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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pixabay)
▲트랜스 휴머니즘 시대 윤리에 대한 재정의가 요구되고 있다. 인공지능화된 시스템 속에서 어떤 윤리 의식이 요청되고 있는가?

지난 시간에는 트랜스 휴머니즘에 대한 정의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번 순서에는 트랜스 휴머니즘 시대의 윤리를 화두 삼아 이야기를 이어가 봅니다. 근대 주체의 해체를 도래한 (오늘날 사회의 또 다른 이름인)인공지능화된 시스템은 우리에게 새 시대에 걸맞는 윤리의 재정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박일준 박사와의 대담 두번째 편입니다. [편집자 주]

Q: 윤리는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즉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 휴머니즘을 서로 존중해주는 것이 윤리의 목적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리고 그러한 휴머니즘에 기대어 윤리체계가 형성되었다고 생각되는데 그런 휴머니즘이 없다면 윤리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박: 휴머니즘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실물적인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개념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개념의 경계가 애매하다는 점입니다. 개념이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루소는 원시공동체의 개인들이 사회적 계약에 합의함으로서 민주주의가 발생한 것처럼 쓰고 있는데 우리는 모두 그런 사회적 계약이 없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사회적 계약이란 휴머니즘의 신화일 뿐입니다. 원시시대만 신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도 신화에 근거해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데리다의 작업이 이를 밝혀내는 것과 다르지 않은데 그는 개념의 기의는 존재하지 않고, 기표의 끊임없는 연쇄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의과 휴머니즘의 개념은 바로 이렇게 기표들의 연쇄일 뿐입니다.

이것을 좀 더 친숙한 예로 설명할 수도 있지요. 음. 한민족이 존재할까요? 대한민국의 국가 정책은 이미 다민족으로 바뀌었지요? 그런데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자 단일민족이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주장한다면 이것은 개념의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한 필리핀 사람이 한국 국적을 취득해서 한국인이 되고, 심지어 정치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단일 민족의 개념이 그를 거부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단일민족, 혹은 한국 사람이라는 고정된 개념의 폭력입니다. 이것은 포스트 휴머니즘을 통해 우리가 배운 비판입니다. 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개념 비판을 겪고 나니깐 인간이라는 개념도 애매해지고, 따라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되는데 이제 포스트 휴머니즘은 그에 대해 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되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반문합니다. 우리가 사물들, 기계들과 연동되어 살아갈 때 인간은 무엇일까를 반문하는 것이 포스트 휴머니즘입니다. 포스트 휴머니즘은 존재를 인간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모든 것이 연동된 생태계와 같은 네트워크 연결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네트워크의 연결은 반드시 디지털 네트워크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물성도 네트워크로 연계됩니다. 우리의 도시 문명이 기후라는 생태계를 변형시켰듯이 말이지요. 그래서 인간의 권리라며 이윤추구의 목적으로 생태계를 마구 훼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회에서 그것을 막을 법안은 가지고 있지 못한 듯합니다. 재산권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이 생태계를 마구 훼손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평가되곤 하기 때문입니다. 환경 훼손을 정당화하는 재산권이 모더니즘의 인권 개념에 기대어 있는 것은 분명하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제는 생물권, 사물권의 윤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Q: 박사님 말씀은 화이트헤드의 이론을 기조로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전에 단순정위의 오류로 휴머니즘을 비판하시던 것이나 디지털과 물성이 네트워크로 서로 연계된 생태계의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본다는 말씀은 화이트헤드의 물리적 극과 정신적 극을 떠올립니다.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들의 수준에 따라 개념들이 파생된다는 화이트헤드의 이론은 포스트 휴머니즘의 개념비판과 일맥상통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여전히 드는 의문은 우리 사회의 윤리체계가 여전히 휴머니즘을 그 기조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기심과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휴머니즘 윤리를 대체할 새로운 윤리가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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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박일준 박사(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가 장효진 객원기자(연세대 종교철학 박사과정생)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박: 우리는 지금 심각한 생태계의 위기를 겪고 있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생태계 위기의 본질은 기후문제가 아니고 개념의 문제입니다. 기존의 휴머니즘 개념이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생각해왔던 생태, 인간의 개념 자체가 더 이상 작동하고 있지 않아요.

페미니즘이 기존에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고정된 인간의 개념은 언제나 차별의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페미니즘의 휴머니즘 비판은 아주 소중한 유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에 대한 비판이 현실의 문제들과 분리되어 있는 것일까요? 전 그러한 생각은 아주 낡은 이분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실제로 80년대에는 실천 없는 개념은 무의미하다며 개념과 현실을 엄밀히 구분하기도 했었지요. 물론 그 당시에는 이러한 주장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직까지 그러한 주장이 통용되는지는 의문입니다.

근래 강남역 살인사건이 그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요. 강남역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아무 이유 없이 죽이잖아요. 그리고 자신은 여자를 혐오한다고 말하죠. 이 이야기의 진실성을 떠나서 이것은 우리 사회에 여성 혐오라는 사실을 각인시킨 사건이었어요. 여기에서 그 남자가 여성을 혐오의 대상으로 지목한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저는 그 이면에 그 남자가 자신이 죽인 여성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여성을 하나의 특정한 혐오 대상으로 지목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어요. 지금 우리는 이러한 현상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여성이라는 고정된 개념이 살인사건을 불러왔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남자가 여성을 혐오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한 요소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개념의 문제입니다. 인간이 세상과 사물을 보는 과정은 개념적이고 언어적입니다. 현실 자체와 개념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 인권, 자유, 평등, 민주주의와 같은 개념들은 한 뭉치, 하나의 세트를 이룹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들이 단순정위 되어 현재의 생태계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면 이제는 단순정위 된 이 모든 세트의 개념들이 수정되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우리는 90년대 후반부터 생태계 위기에 대한 경고를 지속적으로 받아왔어요. 그런데 국내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것이 사실이지요. 하지만 프랑스 같은 경우는 바디우 이후에 모두 사물철학을 한다고 보면 되지요.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지젝까지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지젝 이후에 유럽과 미국의 많은 철학자들은 이미 인권의 개념을 넘어서서 어떻게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어요. 어려운 문제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인데 인간이 아닌 사물의 시선에서 세례를 파악한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잘 납득이 되지 않잖아요? 사실 그것이 얼마나 납득하기 어려운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화이트헤드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자기 철학을 했는데 우연히 현대에 주목받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요. 장효진 선생은 화이트헤드가 익숙한 사람들이 제 얘기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제 생각에는 어쩌면 장 선생 본인이 화이트헤드 철학에 익숙해서 그렇게 이해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화이트헤드에 대한 이해와는 별도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알고 있을 수도 있어요.

우리 사회에 여성 혐오의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사람의 정신 상태를 분석하거나 여성보호 운동과 같은 실천들이 오히려 근본적인 문제를 가려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 시대의 문제는 눈에 보이는 조작들과 실천들로는 해결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는 더 이상 미래를 기약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진단들은 화이트헤드 이론에 익숙한지의 여부를 떠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문제이지요.

Q: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조금은 더 현실적인 문제들에 적용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의식도 새로운 현실적인 문제들에 직면하면서 제기되어진 것이니까요. 최근에는 알파고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화두들이 떠오르고 있고요. 저는 알파고의 등장을 보면서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렸었는데요. 영화에서는 인공지능이 스스로 인간을 지배하는데 사실 그러기 전에 현실적으로는 인공지능이 그것을 소유한 자본가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또한 트랜스 휴머니즘 시대에 우리가 부딪힐 수 있는 새로운 문제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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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박일준 박사가 트랜스 휴머니즘 시대 윤리를 말하고 있다.

박: 매트릭스부터 이야기하자면 매트릭스는 공각기동대에 영향을 받은 영화입니다. 물론 공각기동대만 영향을 준 것은 아니고 최근 번역된 <통제불능>이라는 책도 있지요. 그런데 지금 인공지능과 자본가의 문제잖아요? 그런데 장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제국>이는 책을 통해 마르크스와는 다른 자본비판을 해주었어요. 근대의 제국주의는 민족제국이었지요. 즉 하나의 민족이 정복을 통해 제국을 형성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20세기 후반부터는 이러한 제국에 대한 비판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아요. 그 이유는 지금의 제국에는 더 이상 민족과 같은 주인의 개념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돈이 있으면 주인행세를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자본에 진정한 주인은 없어요.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의 자본주의는 투쟁할 대상이 불투명하다는 특징이 있지요. 권력의 주체는 누구인가요? 권력의 주체는 없고, 시스템만 있을 뿐입니다. 대통령이 권력의 주체인가요? 대통령도 시스템에 복속되어 있을 뿐이지요.

매트릭스를 볼까요? 매트릭스를 움직이는 기계의 신은 어디에 있나요? 기계의 신은 못 나와요. 기계의 신을 만날 수가 없지요. 매트릭스 내에서 네오도 사실은 가상의 장치에서 기능하잖아요?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현실과 가상을 오고 가지만 사실 매트릭스도 공각기동대도 그 이상의 답을 제공해주고 있지는 않아요. 즉 현실과 가상의 지배구조에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구체적 답을 제공해주고 있지는 못한 것이지요.

권력의 주인과 자본의 주인은 없습니다. 자본은 자본 자체의 힘으로 돌아가고, 그 힘에 의존해서 정치가 돌아가고요. 그럼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떠한 대비를 해야 할까요? 분명한 것은 자본에 대한 비판도 이전 형태의 비판하고는 완전히 달라져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마이클 하트의 작업을 통해 20세기 자본주의가 이렇게 달라졌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네트워크의 문제는 네그리와 하트의 비판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즉 포스트 휴머니즘에서 다룰 수 있는 인공지능과 자본이 연계된 문제는 아직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지요. 우리가 이전에 이야기했던 주식을 하는 인공지능을 위해서 제리 카플란 같은 사람은 법인을 내주자고 주장합니다. 세금을 걷기 위해서요. 그랬을 경우 우리가 법인을 만드는데 인간이 없어요. 즉 주인이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문제가 일견에는 새로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것은 새로운 문제가 아니에요. 이미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지요. 삼성이 자본의 주인인가요? 삼성도 늘 애플을 쫓고 있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절대강자로 군림하지만 삼성도 이미 지구 자본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지요. 물론 남들보다 덩치가 더 크긴 하지만요. 이러한 의미에서 자본에 대한 비판의 툴도 이제 바뀌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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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효진 객원 anasynthetics@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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