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방관의 죄
2016년 7월 17일 청파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김기석 목사

입력 Jul 25, 2016 01:42 PM KST
kimkisuk
(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성경본문

옵 1:10-14

["네 아우 야곱에게 저지른 그 폭행 때문에 네가 치욕을 당할 것이며, 아주 망할 것이다. 네가 멀리 서서 구경만 하던 그 날, 이방인이 야곱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적들이 그의 문들로 들어와서 제비를 뽑아 예루살렘을 나누어 가질 때에, 너도 그들과 한 패였다. 네 형제의 날, 그가 재앙을 받던 날에, 너는 방관하지 않았어야 했다. 유다 자손이 몰락하던 그 날, 너는 그들을 보면서 기뻐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고난받던 그 날, 너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지 않았어야 했다. 나의 백성이 패망하던 그 날, 너는 내 백성의 성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어야 했다. 나의 백성이 패망하던 그 날, 너만은 그 재앙을 보며 방관하지 않았어야 했다. 나의 백성이 패망하던 그 날, 너는 그 재산에 손을 대지 않았어야 했다. 도망가는 이들을 죽이려고, 갈라지는 길목을 지키고 있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고난받던 그 날, 너는 살아 남은 사람들을 원수의 손에 넘겨 주지 않았어야 했다."]

설교문

* 물숨을 피하려면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프랑스 니스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으로 희생 당한 이들과 그 가족들, 사드 배치가 발표되면서 분노에 사로잡힌 성주 군민들에게도 주님의 도우심과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악몽같은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 삶이 어떠했는지 자꾸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떼제 찬양 가운데 '생명의 샘물'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생명의 샘물 찾아서 어둔 밤중에 떠나리/오직 목마름 따라 오직 목마름 따라". 우리는 지금 무엇에 목마른 사람입니까? 이 곡을 반복하여 부르는 동안 폭력이 지양된 세상의 꿈은 우리의 꿈인 동시에 하나님의 꿈이라는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우리는 생명의 샘물을 찾아 가는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소서를 지나 대서를 향하고 있는 오늘은 초복입니다. 무더위가 심한 때니 활동을 좀 줄이고 조용히 지내야 할 때입니다. '물숨'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제주 해녀'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감독 고희영은 해녀들의 금기어인 이 단어의 의미를 알기까지 꼬박 6년이 걸렸다고 말합니다. 해녀들이 물속에서 숨을 참다 끊어지기 직전 수면 위로 올라와 길게 내는 휘파람소리처럼 "호이~ 호이~" 소리는 '숨비'라고 합니다. '물숨'은 해녀들이 물속에서 '좋은 물건'을 발견했을 때 내는 마음의 숨인데, 그 숨을 내쉬지 못하고 삼키는 순간 곧 죽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물숨을 피하기 위해서 해녀들이 딸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욕심을 내지 말고 숨만큼만 따. 눈이 욕심이야. 욕심을 잘 다스려야 해."(이길우 선임기자, "해녀들의 금기어 '물숨' 의미 깨닫기까지 꼬박 6년", 한겨레신문, 2015년 6월 1일) 숨만큼만 따면 되는데, 그러지 못해 위험에 빠집니다. 이게 어쩌면 인간의 우매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이 더 좋은 것을 가질세라 서두르다 보면 자기 숨을 잃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숨을 헐떡이며 삽니다. 이사야는 행복을 바라면서 행복을 피하는 어리석은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신들을 찾아 나선 여행길이 고되어서 지쳤으면서도, 너는 '헛수고'라고 말하지 않는구나. 오히려 너는 우상들이 너에게 새 힘을 주어서 지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구나"(사57:10). 가끔은 멈추어 서서 자기가 걸어온 길을 돌아봐야 합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도 가끔 멈추어 섰다고 합니다. 자기 영혼이 따라오길 기다리는 것입니다.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은 노자의 말을 연상시킵니다. '다섯 가지 색이 눈을 멀게 한다'(五色令人目盲)는 구절이 나오는 장(12장)에서 그는 치빙전렵영인심발광(馳騁畋獵令人心發狂)이라 말합니다. 말을 몰아 사냥질하는 것이 사람 마음을 미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자꾸만 멈추어 서서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자기 마음을 조율해야 인간다워집니다. 우리 마음은 뒤틀린 목재처럼 자기 속으로 자꾸만 구부러지곤 합니다. 그 마음들이 빚어내는 것이 갈등과 분쟁입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문제를 개인의 덕성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착하게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도록 만드는 구조적 문제가 심각합니다. 세상에 만연한 악을 외면하면서 늘 자기 반성만 하고 살면 안 됩니다. 그러다 보면 악인들에게 이용당하기 쉽습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자기 마음도 살피고, 구조적인 악도 살펴야 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죄에 공모자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 너의 교만이 너를 속인다

오늘의 본문인 오바댜는 한 장 밖에 되지 않는 짤막한 책이지만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오바댜는 에돔의 죄와 그에 따른 심판을 예고하는데 온통 할애되고 있습니다. 에돔은 사해의 동쪽에 있으면서 고대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습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늘 크고 작은 분쟁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에돔인들의 조상이 에서라고 말합니다. 에서는 야곱의 쌍둥이 형인데, 둘은 어머니 리브가의 태에서부터 싸웠다고 합니다. 리브가가 괴로워하면서 주님을 찾아가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 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창25:23)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삼아 에돔을 지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주장했습니다. 에돔 사람들은 이것을 유대인들이 만들어낸 허구의 신화로 여겨 불쾌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좀 새롭게 해석할 수는 없을까요? 이스라엘의 에돔 지배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거듭 주장하기보다는, 두 나라가 비록 갈등 관계 속에 있기는 하지만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형제 국가임을 상기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평화로운 공존도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고대 국가인 에돔은 요르단의 남부에 해당되는 지역입니다. 에돔의 중심지였던 '페트라'는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입니다. 깎아지른 듯한 붉은색 사암이 좌우로 늘어서 있고 그 사이로 난 좁은 소롯길을 따라 걷다보면 그곳이 천혜의 요새임을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2km쯤 걷다보면 소롯길이 끝나면서 넓은 광장이 나오는데,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 하는 짧은 탄성을 발하곤 합니다. 붉은색 바위를 파서 만든 거대한 구조물이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신전처럼 보이지만 실은 무덤입니다. 그걸 시작으로 하여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고대 문명의 찬란한 흔적들을 보면 누구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바댜는 찬란한 문명을 만들었던 그 국가에 닥칠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돔을 여러 민족 가운데서 가장 보잘것없이 만들어 모든 민족의 경멸을 받게 하겠다 이르십니다.

"네가 바위 틈에 둥지를 틀고, 높은 곳에 집을 지어 놓고는, '누가 나를 땅바닥으로 끌어내릴 수 있으랴' 하고 마음 속으로 말하지만, 너의 교만이 너를 속이고 있다."(1:3)

독수리처럼 그의 보금자리를 높은 곳에 마련해도, 별들 사이에 둥지를 튼다 해도 하나님은 에돔을 거기서 끌어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에돔과 동맹을 맺었던 나라들도 등을 돌릴 것이고, 평화조약을 맺었던 나라도 돌변하여 에돔을 정복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에돔에게 화가 나신 것일까요? 그것은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했을 때 보여준 에돔의 태도 때문입니다.

* 불행을 당하는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

에돔은 오랜 갈등 관계에 있던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속절없이 유린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쾌재를 불렀습니다. 이웃에게 닥친 불행을 기뻐하는 것처럼 비인간적인 일이 또 있을까 싶지만 그게 또한 인간 현실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이라는 뒤틀린 목재에서 곧은 것이라고는 그 어떤 것도 만들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너무 비관적으로 들리지요?

"네 아우 야곱에게 저지른 그 폭행 때문에 네가 치욕을 당할 것이며, 아주 망할 것이다. 네가 멀리 서서 구경만 하던 그 날, 이방인이 야곱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적들이 그의 문들로 들어와서 제비를 뽑아 예루살렘을 나누어 가질 때에, 너도 그들과 한 패였다."(10-11)

에돔은 '멀리 서서' 유다의 멸망을 구경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경만 한 것은 아닙니다. 유다가 회생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자 에돔도 유다 때리기에 나섰습니다. 참으로 비열한 일입니다. 12절부터 14절까지는 에돔이 하지 말았어야 하는 행동이 죽 열거되어 있습니다. "~한 날, 너는 ~하지 않았어야 했다"로 구조화된 지적이 8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겹치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에돔의 죄는 명확합니다. 형제 국가인 유다가 패망하는 날 그들이 하지 말았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방관하지 않았어야 했다

2) 기뻐하지 않았어야 했다

3) 입을 크게 벌리고 웃지 않았어야 했다(조롱)

4) 내 백성의 성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어야 했다

5) 재앙을 보며 방관하지 않았어야 했다

6) 그 재산에 손을 대지 않았어야 했다

7) 도망가는 이들을 죽이려고, 갈라지는 길목을 지키고 있지 않았어야 했다

8) 살아 남은 사람들을 원수의 손에 넘겨 주지 않았어야 했다

요약하자면 '방관, 조롱, 약탈, 강자와 동조, 인신 매매'가 될 것입니다. 두 번이나 강조되고 있는 것이 방관죄입니다. 나 몰라라 하는 것이지요. 방관하는 까닭은 뭘까요? 자기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무책임성과 복잡한 일에 연루되고 싶지 않다는 자기 방어 본능 때문일 겁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보면서도 그냥 지나쳐 간 제사장과 레위인이야말로 방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법정에서는 무죄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유죄입니다.

* 처음 그들이 왔을 때

몇 해 전 베를린에서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작센하우젠 수용소(Sachsenhausen Konzentrationslager)에 들렀습니다. 작센하우젠 가는 길은 아름다웠습니다. 길가에는 아름드리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강에는 작은 배들이 떠있어 한가로워 보였습니다. 국도변의 집들은 깨끗했고, 햇살을 뚫고 달리는 자전거 라이더들에서 건강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36년 평화의 제전인 베를린 올림픽이 열려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실력을 겨루기 위해 집결하던 바로 그 때, 나찌는 작센하우젠에 정치범들과 양심수들, 사회 부적응자들, 전과자들, 동성애자들, 여호와의 증인, 집시 등을 가두기 위해 대규모 수용소를 만들었습니다. 1938년 이후에는 독일에 살던 유대인이 잡혀왔고, 전쟁 포로들도 많이 이송되어 왔습니다. 점차 그곳은 살육의 현장으로 변해갔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용광로 속에서 한 줌 재로 변했고, 전쟁 포로들은 학살당했습니다.

그 참혹한 현장을 둘러보다가 나찌 친위대가 운영하던 감옥에 당도했습니다. 감옥 밖에는 세 개의 나무 기둥이 서 있었는데, 그것은 죄수들을 거꾸로 매달고 고문을 가하던 도구였습니다. 감옥 창문은 나무 가리개로 가려져 있어 죄수들은 햇빛조차 누릴 수 없었습니다. 비감한 마음으로 감방을 둘러보았습니다. 각 방마다 그곳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대표적인 인물들의 사진이 놓여 있었습니다. 한 방에서 저는 마틴 니묄러(1892-1984)의 강고한 얼굴과 마주쳤습니다. 그는 독일의 기독교인들이 나찌에 부역하고 있을 때 나찌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바른 믿음을 견지하려고 했던 고백교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의 형형한 눈빛은 제게 바른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냐고 묻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때 그의 시 '처음 그들이 왔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그들이 공산주의자를 잡아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사민주의자를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민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체포했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대인을 잡아갔을 때

나는 방관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내게 왔을 때

더 이상 나를 위해 나서줄 사람은 없었다

불의에 침묵한 죄, 항의하지 않은 죄, 방관한 죄가 결국에는 자기에게까지 미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는 방관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일깨워줍니다. 지금 억울한 일을 당해 울고 있는 이들을 보고도 함께 아파하지 않고, 그들 편에 서기는커녕 그들의 입을 막으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은 언제나 안전지대에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그걸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남의 곤고한 처지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에돔의 가장 큰 죄는 방관죄였습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나찌 치하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너무 조금 일하기보다는 연약한 자들을 위해 세 배는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권리와 자유가 위협당하는 곳에서는 편안한 침묵보다는 차라리 불편하더라도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프랑크 옐레, <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 이용주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6년 3월 8일, p.138-9에서 재인용)

방관은 그저 방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에돔은 유다의 시련을 틈 타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약탈을 서슴지 않았고, 심지어는 전란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을 붙잡아 팔아먹기도 했습니다. 죄는 이렇게 인간의 탐욕에 깃들여 자기 몸집을 불려갑니다. 하나님은 그런 에돔의 파멸을 선언하십니다. 정의가 아니라 탐욕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할 때, 한 사회는 멸망을 앞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좋은 물건에 대한 욕심에 이끌려 물숨을 내쉬지 못하고 그것을 삼키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가르쳤던 제주 해녀들의 가르침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나날입니다. 불의한 세상을 보며 편안한 침묵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날 때 세상은 위험한 곳으로 변합니다. 불편하더라도 목소리를 높일 때 우리도 살고 다른 이들도 살게 됩니다. 휴가철이 다가옵니다. 분주하게 지내느라 잊고 있었던 것이 없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이웃이 됨으로 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사실 하나만 가슴에 담고 살아도 우리 삶은 맑아질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 계절 더욱 깊어지는 나날이 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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