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혐오의 문화를 끊어낼 한국교회를 향해

이숙진(한국여성신학회장)

한국여성신학회장
(Photo : ⓒ 한국여성신학회)
▲이숙진 한국여성신학회장

최근 한국여성연구학회협의회에서 관련 학회장들과 사담을 나눈 적이 있다. 미국연방법원이 동성결혼을 합헌 판결했다는 소식을 전하던 젠더법학회장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 덧 이야기는 할랄 산업을 둘러싼 일부 기독교인들의 무례함으로 이어졌고 말을 꺼낸 여성경영학회장 역시 나의 존재를 의식했다. 어쩌면 그들의 시선을 내가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기독교인은 늘 누군가를 적대시하며 광장으로 우르르 몰려나와 그 혐오의 감정을 분출하는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한국교회에서 등장하는 혐오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이슬람포비아에서 호모포비아에 이르기까지, 혐오하는 그 상대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면서도 선입견과 편견으로 증오의 감정을 키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혐오는 혐오를 낳는다. 그래서 안티기독교인들의 한국기독교에 대한 혐오의 감정 역시 만만치 않다. 이렇게 서로를 혐오하는 가운데 어느새 한국기독교인은 혐오의 사회를 만드는데 한 몫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쳤지만, 우리는 증오를 실천하는 꼴이다.

누군가로부터 "교회 다니세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예"라고 대답은 하지만 늘 꺼림칙하다. 특정집단을 혐오하는 '그런'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사족을 달고 싶은 유혹에 구차한 마음이 든다. 또 "기독교인이셨군요. 그런거 같더라구요"라고 누군가 내 신앙적 정체성을 언급하면 "아, 예"라는 대답과 동시에 내 머릿속은 '칭찬일까, 욕일까'를 가늠하느라 복잡해진다.

사랑의 종교이면서도 혐오를 일삼는 대표집단이 되어버린 한국기독교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여기에서는 늘 있었기에 너무나 익숙한, 그래서 잘 보이지 않았던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에 대해 생각해보자. 지난 5월 17일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은 그간 누적된 공포를 세상에 꺼내놓기 시작했다. '여자라서'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 의해 살해당했기에, '여자라면' 공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사건의 본질을 두고 첨예한 성대결이 있었고 또 다른 젠더폭력으로 이어졌다. 한 여성의 추도 메모지에 적힌 '살아남았다'는 말이 대변하듯 스스로를 잠재적 피해자로 인식하는 여성들의 시선과 잠재적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의 시선 사이에 상당한 온도차가 감지되었다. 조현병 환자에 의한 우발적인 사건으로 깔끔하게 정리하려는 사람들은 여성들의 공포와 그에 따른 리액션이 지나치다고 몰아세웠다.

과연 여성들의 반응이 지나친 것일까? 우리나라는 살인사건 피해자 중 여성비율이 51%로 G20 국가 중 1위(UNODC, 2008)이고, 강력범죄 피해자 중 90.2%(경찰청, 2013)가 여성이다. 이 통계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사건을 보도하는 헤드라인은 "늦은 밤 묻지마 살인," "여자가 무시해서," "유흥가 화장실," "목사의 꿈" 등이었다. 이 문구가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유흥가'나 '목사의 꿈' 등은 누구의 입장에서 쓴 표현인가? 사건의 발단은 분명 가해자로부터 시작했으나, 피해자의 자리는 완전히 삭제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에 이어 검찰도 "(강남역 살인남이) 여성 관련 자료와 성인물을 여러 차례 검색한 점, 어머니로부터 소개받은 여성과 잠시 교제한 경험도 있는 점 등을 들어 여성을 '싫어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황당한 결론을 내렸다. 혐오의 사전적 정의인 "싫어하고 꺼려함"에 여성을 덧붙여, "여성을 싫어하고 미워함"을 여성혐오(misogyny)로 이해한 무지 탓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내 말/행동이 여성을 혐오하는 거라구? 아니야. 내가 얼마나 여자를 좋아하는데..."하며 억울함을 토로하는 남성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여성혐오'로 번역된 미소지니(misogyny)는 이러한 정의와는 사뭇 다르다. 우선, 여성을 무시해도 되거나 보호해야 하는 열등한 존재로 인식할 때 그것은 여성혐오다. 대체로 여성에게 제대로 '가르쳐주고' '설명해주고' '대신해주고' '도와주는' 형식으로 혐오가 실천된다. 또한 여성을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볼 때, 이것도 여성혐오다. 이러한 인식 탓에 여성폭력의 피해자에게 왜 그런 옷을 입었느냐, 왜 그 시간에 다니느냐, 그 장소에 간 이유는 무엇이냐 등등의 질의와 발언이 쏟아진다.

한국교회는 여성혐오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러한 질문 자체를 불쾌하게 생각할 교인들이 많을 것이다. 대체 교회가 왜 여성을 혐오하느냐? 교인의 60~70%을 차지하는 순종적인 여성교인이야말로 교회성장의 주역이라고 치켜세우고 여성들의 무릎기도가 자녀와 가정을 지킨다고 칭송하기 바쁜데 말이다. 한국교회의 여성혐오는 동성애, 공산주의, 이슬람에 대한 물리적이고 노골적인 혐오와는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다.

언뜻 칭찬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교회공동체의 의사결정 구조와 절차를 보면 여성은 아주 자연스럽게 배제되고 있다. 공동체 생활에 관한 사안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여성이 소외된다면 공동체는 여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며 할당된 자리 역시 열악할 것은 자명하다. 공동체를 공정하게 유지하는 데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와 절차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자 조건이다. 누가 의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가? 의사를 결정하는 과정이 권위적인가? 민주적인가? 토론의 장에는 누가 참여하는가? 등은 그 공동체의 젠더정의에 대한 감수성을 나타내는 지표다. 일례로 여성안수를 허용하는 교단이 늘고 있지만 전체 목회자 인원에 대비해 볼 때 여성 목회자의 비율은 매우 낮다. 교단의 법규로는 여성안수를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교회들은 좀처럼 여성 목사를 청빙하지 않는다. 매우 낮은 여성 담임목사 비율은 개교회, 노회와 총회에서도 발언권을 거의 갖지 못하기에 한국교회의 젠더부정의 현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젠더정의가 지켜지지 않은 상태에서 여성교인들에게 보내는 칭송과 찬사는 서구가 동양을 신비화하면서 착취하는 오리엔탈리즘의 구조와 닮았다. 이러한 제도적 한계를 가진 한국교회는 여성혐오의 사회 문화를 공고화하는 동력이 된다.

다시 '강남역 살인남'으로 돌아가 보자. 신학교를 자퇴한 뒤 교회에서 일했다는 그의 행동반경을 보아 교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음은 분명하다. 앞 뒤 맥락 없이 여성들의 묵종을 요구하며 인용하는 "여자는 잠잠하라"부터 "여자가 목사 안수를 받는다는 것은 택도 없다," "어디 여자가 기저귀 차고 강단에 올라와," "여목사들은 원한 가득 찬 불독 같이 생겨..."라는 끔찍한 혐오의 지껄임이 신학교 교육현장에서, 그것도 총회장이나 신학교 이사장의 입에서, 말씀선포의 공간에서 발화되는 한국교회를 여성혐오와 무관하다할 수 있을까?

교회의 오랜 가르침과 성서해석은 여성을 열등하고 유혹하는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여성혐오를 조장하거나 방조해왔다. 여성에게 동등한 인격성을 인정하지 않는 교회문화가 여성혐오로 이어지는 것은 자명하다. 지금도 교회현장에서는 새로 부임할 목사님이 "여자라서..." 혹은 "여자 목사는 인정 못하기에 교구를 바꿔 달라"는 교인들의 푸념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언행은 남성이 더 능력과 신뢰를 갖춘 존재임을 전제함으로써 여성의 열등성을 반증하는 여성혐오의 자취다. 가부장적 교회에서 교육받고 성장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은 가부장적 가치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받아들이게 되며 그 과정에서 여성은 열등한 존재이거나 유혹하는 존재라는 여성혐오 사상을 내면화하게 된다.

거듭 강조하지만 여성에게 가해지는 갖은 폭력들은 일탈적인 일부 남성이 느닷없이 벌인 우연적 사건이 아니다. 알고 보면, 하나님의 질서로 이해된 차등적 성역할 구분, 관행이 되어버린 성차별적인 조직문화, 공공연히 발화되는 성차별적인 발언이 만든 필연적 사건이다. 또한 성차별적인 조직과 언행을 보고 듣고도 침묵한 우리의 무심함의 퇴적물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여성들에게 늦은 시간 나다니지 마라, 그런 옷 입지마라, 행동거지를 조신하게 하라 등의 권고로 여성에 대한 혐오·차별·폭력의 고리를 끊어낼 수는 없다. 혐오와 차별과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정의의 원칙'으로 차별적인 제도와 구조를 바로잡아 개혁하며, 잘못을 저지른 개인에 대해서는 '사랑의 원칙'으로 품어야겠다. 교회는 그 어떤 조직보다도 여성들의 자발적 참여가 남성보다 더 활발하다. 만약 이러한 교회가 젠더정의에 민감성을 갖춰 양성평등적인 이상적 모델이 된다면 편견과 혐오 없는 사회의 디딤돌이 될 것이다.

(* 이 글은 『기독교사상』 2016년 7월호에 실린 이숙진 회장의 "한국교회, 혐오문화 치유의 센터가 되기를"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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