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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33 "진정한 신앙을 위한 개종가능성"
정재현의 신앙성찰

입력 Sep 26, 2016 04:00 PM KST

1. 다름과의 만남, 우상파괴를 위하여: 파니카(5)

jungjaehyun
(Photo : ⓒ베리타스 DB)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파니카는 구성적 상대성이라는 얼과 꼴을 통해 드러난 다종교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신앙의 역동성을 강조함으로써 종교간 만남은 신앙성찰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주장합니다. 그리고는 이를 염두에 두고 스위들러처럼 종교간 만남을 위한 규칙을 세세하게 열거합니다. 물론 종교간 만남을 위해서 특정한 호교론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매우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파니카는 더 나아가 일반적인 호교론, 즉 종교 자체의 가치를 무조건 전제하는 태도로부터도 벗어나야 한다는 점까지도 강조합니다. 이런 규칙은 오늘날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 이유는 종교의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무종교인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지배했던 중세로부터 근세로 넘어가면서는 종교로부터 벗어난다는 탈종교(de-religion)가 세속화의 동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탈종교의 시대인 근세가 정점을 찍고 소외와 허무, 불안과 절망으로 던져진 인간을 보듬지 못하는 종교에 대한 반동이 현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니 이를 반종교(anti-religion)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도 잠시일 뿐 오늘날은 종교의 의미를 거부하고 아예 무관심하기까지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를 무종교(non-religion)라 부르고자 합니다. 그래도 탈종교나 반종교는 아직 종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거나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정서입니다. 이에 비해 무종교는 종교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입니다. 파니카는 이와 같은 시대정신을 간파하고는 종교에 대해 관심이 없는 무종교인들과의 만남까지도 가능하고 의미 있기 위해서는 종교의 가치를 열변하는 일반적 호교론도 내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렇게 하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걱정하시는 분들도 꽤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고로 종교는 인간이 욱여싸서 보호해주어야 할 그 무엇은 아닙니다. 그런 것이라면 종교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스로 신실하다고 여기는 골수 종교인들의 그러한 태도가 무종교인을 양산하는데 일조했다는 점을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종교의 위치를 다 내려놓고 인간으로 들어간다면 오히려 종교의 본뜻을 향해 질러갈 수 있는, 차라리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길을 만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서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파니카가 제시한 종교간 만남을 위한 규칙들 중 무엇보다도 가장 주목해야 할 항목은 '우리는 개종이라는 도전에도 직면해야 한다'라는 규칙입니다. 갈수록 태산이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 주장은 사실 교회 현장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어느 목사가 설교에서 다른 종교인과 만나는 것이 필수적인 신앙행위이고 심지어 다른 종교로 개종할 가능성까지 열어두면서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면 교회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이고 교단차원에서 파문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규칙은 참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유비적으로 살필 수 있는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결혼과 이혼의 관계입니다. 부부가 혼인 약속을 하고 반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서로 확약하고 주례자가 공표했습니다. 물론 그 결혼 관계가 절대적이기 위해서는 다른 상대로 대체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이 마땅히 포함해야 할 진정한 사랑과 신뢰가 파괴되는 경우, 즉 더 이상 사랑과 신뢰가 없이 절대성을 구실로 오직 관계유지만을 고수하려 한다면 이것을 참다운 결혼관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절대성은 우리 삶의 현실에 대해 부적절하거나 억압적일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현실은 이에 대한 무수한 증거들로 넘쳐납니다.

따라서 결혼이 진정한 사랑과 신뢰 관계이기 위해서는 상대를 대체할 수 없다는 절대성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결혼의 진정성을 위해서는 오히려 상대에 대한 대체가능성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이 오직 그 상대이어야 할 절대성만을 내세운다면 억압과 속박의 사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에 진정성을 부여하는 것은 결혼관계의 절대성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이혼 가능성입니다. 이혼가능성을 전제하고서도 결혼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절대성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매순간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한 긴장은 생동감을 부여할 것이니 결혼관계가 역동적인 생명성을 지니게 됩니다. 물론 이혼가능성이라는 것이 반드시 이혼이 더 좋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는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개종불가의 교리에 묶여서 속박당하고 있는 종교적 실제를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와 현실에 무수한 사례와 증거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개종가능성을 전제한다면 매일 새롭게 자신의 신앙을 선택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새롭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믿어서 잘 간직하고 있는 신관념을 지키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을 믿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래서 개종가능성은 우리 믿음을 참되고 살아있게 하는 매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겉보기에는 황당하지만 이게 우리 삶과 믿음의 역설입니다. 의심과 회의가 신앙을 살아 움직이고 성숙하게 하는 것과 같이 개종가능성이 믿음을 새롭게 선택하고 결단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파니카가 '개종가능성'을 말한 것은 이러한 견지에서 읽혀져야 합니다. '개종가능성'은 개종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 말자는 것도 아닙니다. 할 수도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은 이 순간 새롭게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하고 생동적인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익숙한 편안함을 은총으로 여기는 것에 대한 경종을 뜻합니다. 일상적 종교생활에서 관습으로까지 이어지는 익숙함이 가져다주는 평안함, 이는 심하게 이야기하면 '노예의 편안함'일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는 개종가능성은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숙고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개종가능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개종이 갈아엎고 새판을 짜는 것이라면 자기동일성의 논리에만 충실한 것일지언정 구성적 상대성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종교적 신앙이라는 것이 이미 다종교적 체험과 다문화적 해석의 불가분리관계를 토대로 하는 것이라면 개종이란 자기동일성적 정체성의 단순한 전환일 수는 없습니다. 결국 구성적 상대성과 다종교적 체험으로 인하여 개종이라는 것은 이전 것을 송두리째 갈아엎고 새 판을 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에 다른 것이 덧붙여지고 서로 뒤섞이게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굳이 표현한다면 개종(改宗; conversion)이라기보다는 '가종(加宗; adversion)'입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개종했다고 했을 때, 엄밀하게 보자면 그는 기존의 종교를 갈아엎고 다른 종교로 깔끔하게 바꾼 것은 아닙니다. 종교와 믿음이 앎의 차원이라면 혹시 그럴 수도 있지만 삶의 차원이기 때문에 그렇게 갈아엎고 다른 것으로 바꿔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삶이 그렇게 갈아엎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은 무색투명의 무전제성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적 유한성의 틀과 꼴에 내던져져 얽혀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환도 삶에서 삶으로 새겨지면서 일어납니다. 용어 몇 개 바꿔친다고 갈아엎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자기 종교에 머물러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종교만을 아는 것은 하나의 종교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역설합니다. 이유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지닌 종교적 정체성은 '구성적 상대성'으로 이루어지며 체험과 해석은 분리불가하기 때문입니다.) 구성적 상대성과 이것이 드러내주는 다종교적 체험으로 인하여 가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개종이 실제로 가종일 수밖에 없다면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훨씬 덜 거리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실상은 정직하게 보자면 이미 가종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종교간(inter) 대화가 참된 대화가 되려면 종교 안(intra) 대화가 수반되어야"(파니카 91) 합니다. 종교 안 대화란 자기성찰을 뜻하는데 타자를 만나기 전에 우선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성분부터 분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종교적 체험이 가리키듯이 다르고 새로운 것을 깨닫고 받아들여도 기존의 것에 덧붙여지고 뒤섞이는 것이니 이미 가종일 수밖에 없다는 구성적 상대성이 엮어내는 성분 말입니다. 실상이 그러하니 나 자신을 기준으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부터 물음에 부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나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고 나의 신앙의 상대성에 대한 물음과 더불어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파니카는 다음과 같이 심오한 자기성찰의 언어로 분석합니다:

만일 내가 대화상대자를 나 자신 안에서, 또 나 자신처럼 만나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상대방이 자기 자신을 만나고 이해하는 것처럼 그렇게 상대방을 만날 수는 없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자기는 상대방을 나 자신의 변함없는 자기로 환원시키는, 우선권을 가진 나의 자아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참된 만남의 장소는 나와 상대방과 무관한 어떤 변증법적인 중립영역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되면서도 또 상대방도 공유하고 있는 자기이다.

자기가 주체로 등장하고 타자를 주체의 방식으로 객체화하는 아전인수의 폭력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종교의 영역에서 더욱 극대화되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상대방도 공유하는 자기'를 역설하는 파니카의 통찰은 참으로 귀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아론적 선험주의로부터 상호동격적 대화주의로의 전환이 오늘날의 시대정신이라고 할 때 파니카는 이를 누구보다도 깊게 자기성찰에 적용하고 이것이 종교간 대화에 앞선 필수과제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파니카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종교인들과의 만남에서 아전인수도 문제이지만 호교론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이유로 신앙에 대한 판단중지도 무조건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고 경고합니다. 여기서 '판단중지'란 종교간 대화의 경우 자신의 입장을 잠깐 뒤로 재껴 놓고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입니다. 서로 입장이 다른데 그 입장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면 다르다는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끝나지 않겠냐는 염려로 인하여 입장을 유보해야 건설적인 만남이 되리라는 생각이 함축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봅시다. 그렇다면 입장을 유보하고 어떤 공통의 목표를 지니고 대화를 나누어야 할까요? 그렇다면 종교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내고 그곳에서 어떤 통일을 지향하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앞서서 복음주의 입장을 살필 때 맥그라스가 이미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파니카도 마찬가지일까요? 일면 비슷해 보이더라도 논거는 다릅니다.

종교간 대화는 무엇보다도 양쪽 모두가 우월감이나 선입견, 어떤 숨겨진 의도나 확신을 배제한 참다운 대화이어야 한다.... 대화가 본래적인 대화가 되려면 그 대화의 목적이나 결과를 미리 추정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대화의 결과를 이미 가정해 놓은 상태에서는 대화에 임할 수가 없다.... 둘째, 종교 간의 대화는 참으로 종교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교리나 지적인 의견의 교환이 아니다. 따라서 종교간의 대화는 나의 생각, 즉 바로 내 삶의 틀이 되는 나의 가장 개인적인 지평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는 모험을 수반한다.... 이해의 노력은 나의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그 신앙 안에서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것을 옆으로 제쳐 놓는다면 결코 있을 수 없다.... 신앙인의 믿음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현상에 속한다. 믿는 사람과 분리되는 "벌거벗은" 혹은 "순수한" 신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파니카 104-6)

'순수한 신앙이 존재하지 않는다!' 분노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순수'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불순한 교만과 비열한 횡포가 저질러졌는가를 돌이킨다면 그렇게 '거룩한 분노'는 이내 식을 것입니다. '벌거벗은 신앙'을 전제하는 자기동일성에서는 판단중지가 필요하고 가능하다고 하겠지만 그 전제가 불가능하니 아전인수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판단중지도 가능한 줄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종교적 체험으로 인하여 아전인수가 부적절하고 판단중지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나아가 개종조차도 가종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정직하게 직시한다면 파니카가 그렇게 강조하는 '개종가능성'에 대해서는 신앙을 되돌아 성찰하게 하고 나아가 살아 움직이게 하는 현실적인 동인이 된다는 점에서 그 긍극적인 의미를 추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바로 이런 목적으로 아전인수의 주관주의와 판단중지의 객관주의 같은 환원주의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파니카의 지론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결론적으로 추려집니다:

모든 종교를 하나의 동질적인 혼합종교로 환원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한 덩어리로 뭉치기보다는 인간의 종교적 뿌리를 발견함으로써 참된 종교철학을 갖게 될 것이다. (파니카 107)

이처럼 파니카는 '순수'라는 허구를 폭로함으로써 이를 가정하는 서구 그리스도교에서 나온 통일적 다원주의를 거부하면서 그의 입장을 분명하게 개진합니다. 더 나아가 그럴 수밖에 없는 마땅한 이유를 찾기 위해 종교간 관계 논의를 종교로부터 인간으로까지 들어가 '인간의 종교적 뿌리'를 심층적으로 해부하고 조망하는 태도를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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