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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35 "종교간 만남에 대한 시비"
정재현의 신앙성찰

입력 Nov 14, 2016 08:29 PM KST

2. 종교간 만남의 허구성과 그 극복을 위하여(1)

jungjaehyun
(Photo : ⓒ베리타스 DB)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사람은 삶이 두려워서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두려워서 종교를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듣기 나름으로 여러 가지 풀이가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인간에게 있어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것이라면 종교와 사회의 관계도 마땅히 그러할 것이라는 통찰은 쉽게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종교적 인간'이라는 이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또 다른 이름과 한 뿌리에서 나온 표현이라는 점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영위하기 위한 지극히 본능적인 발로로서 사회와 종교가 서로 얽히면서 생겨나고 다듬어져 왔다는 것을 여실히 확인시켜 줍니다. 작금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이슬람문화권의 저항이 '성전' 또는 '테러'로 나타나고 이에 대해 미국이 응전적인 전쟁을 일으키면서 '피는 피를 부른다'는 악순환의 고리 안으로 그저 빨려 들어가는 모습들에서도 사회와 종교 사이의 뒤얽힌 관계를 확인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한국 전쟁 이후 최근 반세기 동안 불교, 가톨릭, 개신교가 엄청나게 성장했습니다. 세계 어디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종교황금기를 맞았다고까지 평가되지요. 남한의 종교인수를 어림잡으면 불교 1,200만, 가톨릭 600만, 개신교 800만이라고 합니다. 가톨릭의 한 신학자는 이런 종교분할을 두고서 매우 다행스러운 '황금분할'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한국 사회에서 각 종교들 사이의 인구분포는 오묘하리만큼 황금분할구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에 의하면 만일 어느 한 종단이 국민의 2/3를 확보했다면 자기네 식으로 헌법을 고치려 할 것이요, 국민의 1/2을 확보했다면 법률 개정을 좌지우지했을 것이라고 합니다(정양모, 「오늘과 내일의 그리스도교」, 『믿고 알고 알고 믿고』, 정양모 은퇴기념 논총간행위원회 편 [분도출판사, 2001], 129). 다소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종교인 절대다수가 소수를 억압하지 않은 사례는 역사상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대다수가 한 종교에 속하지 않은 덕분인지 한국사회 안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전쟁도 불사하는 유혈충돌과 같은 극한적인 갈등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는 소지는 언제든지 지니고 있는 것이 또한 한국사회임은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규모나 심각성에서는 상대적으로 미미할지라도 여러 형태의 종교간 갈등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것 또한 우리 사회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황금분할이란 힘의 균형적인 안배를 통한 평화공존의 기틀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 끝없는 갈등의 원천적인 조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고 또한 미리 염려해서인지 한국 사회 안에서도 종교간 관계구성에 대한 논의가 적지 않게 있어 왔습니다. 마침 서구 기독교 신학계에서 촉발된 소위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논의가 한국으로 유입되면서 이미 다종교 상황인 한국 사회에서의 종교간 바람직한 관계구성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커다란 자극이 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과 마침 조성된 학문적 분위기에 힘입어 한국 사회 안에서 종교간 관계구성 논의는 본격화되었으나 서구에서 다소 무반성적으로 유입된 종교다원주의로 인하여 종교간 만남이라는 화두는 때로 '뜨거운 감자' 같은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도 그러하듯이 이 논의도 역시 유행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일어났다가 곧 사라져 버리는 일과성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학문적 성찰의 깊이까지 이르는 진지한 논의의 전개보다는 그 표피적인 표현들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고 열을 올리는 방식으로 공방이 벌어지다가 가라앉곤 해왔기 때문에 미래에 심각하게 벌어질 수도 있는 종교간 갈등과 충돌이라는 문제에 대한 예방적 차원에서 진단과 처방을 위한 이론적 체계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말입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부터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하여 서구에서 수입된 종교간 관계구성논의가 한국 상황에 대해 지니는 한계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한국사회에서의 바람직한 모형 제시를 거쳐 한국 사회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기여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본 연구는 한국 사회 안에서 기독교계가 앞장서 벌이고 있는 종교간 만남에 관한 논의는 물론, 실제적인 만남의 현장이 지니고 있는 '허구성'(여기서 '허구성'이라는 것은 의도적이지는 않았더라도 결국 그렇게 나타난 모습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종교라는 것이 이미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는 격의성을 지니고 있어서 '하나의 종교'라는 것은 허상일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종교간 만남은 마치 구체적인 종교들이 각각 '하나의 종교'라는 최소단위로 설정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간 만남이 결국 종교인들의 만남이라고 할 때, 한 인간이 종교인으로서도 여러 종교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아 얽히어 내는 중층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 종교적 정체성에 있어서도 특정한 하나의 종교인만으로 규정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구체적인 종교인이 그 하나의 종교만을 표방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오류에 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오류가 심각한 문제인 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뒤덮음으로써 만남을 만남되게 하는 다름의 말살을 통한 같음으로의 통폐합을 거쳐 결국 종교적 제국주의로 치닫게 되기 때문이다.)을 파헤침으로써 그러한 시도가 설정한 목표에 진정으로 이르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과제를 명확히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이미 다종교 전통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가운데 때로 종교간 갈등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에 적합한 종교간 관계구성을 위한 이해의 틀을 개발하려 합니다. 아울러 한국 사회의 배타적 정서를 더욱 증폭시킴으로써 결국 이러한 종교간 갈등 문제에 대해 더 큰 책임을 져야 하는 기독교가 자기반성을 통해 한국 사회의 정신문화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논리와 방법을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둘 것입니다.

물론 '종교간 만남'이라는 이 시대의 화두에 대한 연구는 사실상 진부하리만큼 엄청나게 수행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연구들은 대체로 종교간 만남의 의미와 타당성에 대해서 찬반양론을 펼치는 방식에 집중되어 왔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종교간 만남이야말로 다른 종교들과의 평화적 공존 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종교에의 성실한 신앙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하다는 주장으로부터 다른 종교(인)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종교에 대한 신앙의 순수성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반론에 이르기까지 양립불가하리만큼 폭넓은 논의들이 전개되어 왔었습니다.

그러나 본 연구가 제안하는 것은 그러한 논의에 또 하나의 입장을 추가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모든 입장들이 함께 빠져 있을 수도 있는 함정에 주목함으로써 어떠한 입장에서의 논의든지 현실적인 의미를 지니기 위해 반드시 검토해야 할 과제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본 연구는 기존의 종교간 관계구성 논의에 대해 혁신적으로 비판하고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새로운 시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종교에 관한 논의에서 핵심적이면서도 간과되는 인간에 대한 성찰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종교간 만남'이라는 과제는 그 숭고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논함에 있어 인간에 대해 정직하고도 진지한 고려를 하지 못해 왔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종교를 들먹일라치면 왠지 인간에 대한 생각을 최대한으로 억제해야만 제대로 종교를 말하는 것이요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라는 착각이 암암리에 우리를 지배함으로써 이런 따위의 비극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고 나발이고 이에 앞서 본디 죽음이 두려워서 종교를 만들은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사람이라면 사람에 대해 먼저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종교가 사람에게 의미가 없는 것이라면 관심되어야 할 이유도 없고 더욱이 이를 위해 순교 따위는 더더욱 폐기되어야 할 반인간적 작태일 따름일 터이니 말입니다!

'왜 종교인가?' '종교'를 애써 관심하는 것은 다소 구태의연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결국 '인간'에 대한 관심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라면 종교가 굳이 이렇게 관심되어야 할 이유는 별로 없지요. 물론 여기서 '인간'에 대한 관심과 물음은 배부르고 등 따스한 상아탑에서의 지적인 자위(masturbation)일 만큼 한가로운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이 물음은 과연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새삼스러이 묻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이 물음은 물은 지는 너무 오래됐지만 신통한 대답을 들어본 기억은 어느 누구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치부할 만큼 무식한 용기도 선뜻 생기지도 않지요. 해서 이런 생각 하나 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사람이란 참으로 기묘한 존재입니다. 자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규모의 건물도 만들 수 있는가하면, 그보다 힘이 엄청 세고 덩치도 큰 짐승들을 도구를 써서 제압할 수도 있습니다. 또 그의 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높이로 날 수도 있고 허파로 숨 쉬는 동물이 살 수 없는 바다 속 깊은 곳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렇게도 위대할 것 같은 사람은 어쩌다가 그 몸 안에 약간의 세포변형이라도 일어나면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며, 급기야 그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지극히 작은 세균에 의해서 어이없이 파멸되기도 하지요. 이처럼 거대를 이루는 능력과 극소에도 침몰하는 무능이라는 양극단 사이를 오가는 것이 인간이라면 인간만큼 양극단 사이의 간격이 큰 피조물도 달리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누군가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말하자면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이러한 능력으로 그는 그의 일상적인 한계를 넘어서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오늘날 인류의 복지를 위한 문명을 이루었습니다. 물론 '생각'이라는 것이 그렇게만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굳이 지적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간이 또한 '갈대'라는 사실입니다. '갈대'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요? 갈대는 작은 바람에도 쉽사리 일렁이고 조금이라도 세게 불면 곧 꺾일 듯이 휘청거립니다. 인간은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위대하면서 동시에 한없이 나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조금 젊잖게 말해주어 '사람이라는 것의 오묘한 역설'이라 하겠습니다.

기왕 '오묘한 역설'이라고 한다면 서양 근세 초기 파스칼이 읊조렸다는 '생각하는 갈대'보다 앞서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일갈했다는 '이성적인 동물'도 곱씹을만합니다. 물론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라는 명제는 전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구절에 등장하는 '이성'과 '동물'의 관계이지요. '이성'은 누구에게나 동일할 것 같은 보편성이라는 성질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면서 유구한 역사 안에서 모든 것을 판별하는 기준과 근거로 군림해 왔지만, '동물성'이라는 것은 이성과는 상반되는 감정 뿐 아니라 육체까지도 아울러야 하는 것이어서 그 동안 별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해왔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억눌려질 감정이 아니었고 다스려질 욕망이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돌이켜 보건대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나요? 우리들의 일상을 보더라도 막상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생각했던 것보다 매우 미미합니다. 더욱이 그것마저도 이성과는 매우 다른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것에 의해 에워싸여 채색되고 변형되며 육체 안에서 육체를 거쳐 굴절되기까지 하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성을 드높이 모셔왔지만 그것이 인간을 굴절에 의한 왜곡으로부터 해방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인간의 감정과 육체를 억압함으로써 인간성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던 것 또한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진리의 보편타당성이라는 신화와 객관성이라는 허상에 콩깍지가 씌어 이를 방해할 듯한 '동물성'을 억누르고 '이성'만을 옹립해왔던 역사가 도리어 인간성 말살의 궤도로 질주해 왔던 것이지요. 말하자면 '이성적 동물'이라는 위대한 선포에도 불구하고 동물성을 억누르다가 아예 잊어버리고 이성만 붙들고 늘어졌던 것입니다. 이성의 항구성이 동물성의 가련함을 씻어 줄 것이라고 기대했었지만 해결은 고사하고 오히려 동물성의 다름을 이성의 같음에 가두어 옥죄었으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어찌 이성만으로 살 수 있을까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이성만으로는 결코 인간을 살릴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인간을 이루고 있는 '동물성,' 즉 '몸'에 대해서 좀 더 솔직해져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배가 고프면 하늘도 노랗게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마디로, 동물성에 대한 적절한 고려 없이는 이성이고 나발이고 아무런 의미도 소용도 없습니다. 몸 이야기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몸 이야기는 다름 아닌 인간해방을 향한 몸부림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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