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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규태 칼럼]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신자유주의 세계체제 (1)
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

입력 Nov 18, 2016 07:46 AM KST

들어가는 말: 근대적 자유개념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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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

근대적 의미에서 자유라는 개념은 인간의 사회적 삶에서 핵심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다. 프랑스 혁명에서 내어난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세쌍둥이 개념들은 한편으로는 이전의 부자유하고 불평등한 전제군주체제에 대항하는 투쟁구호였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의 개념이 가진 이중성을 해결할 수 있는 관계개념들이다. 이들 세쌍둥이 개념들은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상호협력하고 대결하면서 다양하게 변용되었고 지금도 상호 변용되고 있다. 그래서 철학자 루소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어디서나 속박당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그는 "인간은 자유와 함께 공동의 힘으로 인격과 재산을 함께 보호할 수 있는 사회형식"을 찾으려 했다. 즉 그는 평등에 기초한 자유를 찾으려 했었다.

이렇게 봉건시대의 부자유에 대한 투쟁으로부터 근대의 민주혁명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우리는 고대나 중세와 달리 오늘날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신체와 언론 결사 등의 자유를 누리는 시민적(부르주아적) 사회에 살고 있고 동시에 이러한 자유의 쟁취를 통해서 정치적 억압과 함께 경제적 착취로부터의 자유를 요청하고, 곤궁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게 된다. 밖으로는 외세로부터 정치적 해방과 함께 안으로는 사회적 불평등으로부터의 자유, 즉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억압과 착취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고 추구하는 자유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우리가 이 자유의 본질과 내용을 고려할 때 그 한계도 묻게 된다. 우리가 자유의 본질에 체계적으로 접근하면 우선 그것이 가진 이중적 모순에 직면한다. 그래서 철학자 쉘러(Max Scheler)는 "자유의 문제에서처럼 그 개념과 사용에서 발생하는 복합적 문제는 없다"고까지 말했다.

우선 자유에 대한 물음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제기될 수 있다. 첫째 우리가 개인을 고려할 때 인간은 행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고 자유로워야 하는가? 둘째 사회를 고려할 때 인간들의 관계에서 어떤 종류의 자유가 어느 정도 요구되는가를 묻게 된다. 전자는 인간학적 자유에 관한 물음이고 후자는 사회학적 자유에 대한 물음이다. 인간은 개체로서만 존재할 수 없고, 사회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실은 "사회 안에 있는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묻게 된다.

계몽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이 외적 동인들이나 내적 동인들에 대해서 긍정이나 부정의 가능성을 상실한 모든 행태를 부자유라고 했다. 그는 인간이 내적, 외적 요인들을 거부할 수 없을 때 그것을 부정적 자유라고 했다. 동시에 인간이 내적 요인, 즉 자기 이성을 통해서 규정할 수 있을 때 그것을 긍정적 자유라고 했다. 따라서 칸트에게서 자유란 모든 자의적 행동들을 이성의 통제 하에 두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래서 그는 "자유란 외적 요인인 자연의 충동을 넘어서 인간의 모든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규율이나 의도다"라고 했다.

이렇게 칸트에게 기원을 둔 부르주아 사회의 근대적 인간상에서 이성을 통해서 자기 목적(telos)을 향해 실천하기 위한 행동규범을 정하는 것이 곧 자유며 과거의 절대군주체제를 거부하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실현한 정치적 원리였다. 프랑스와 북미의 혁명들에서 탄생한 자유주의적 헌법들은 인간을 "자연규정"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결정"의 작업자로서 이해한 새로운 인간상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상으로부터 이전의 전제군주적 국가상에서 자유민주주의적 국가상이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왔다. 오늘날 민주주의 헌법의 기본명제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국가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지 인간이 국가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인격성의 존엄성은 침해할 수 없다."

오늘날에 와서 민주주의 제도에서 인간은 자율적 개체라는 인간학적 논거와 함께 사회적 존재라는 사회학적 논거에서 자유의 한계를 본다. 모든 개인들의 권리는 "한 사람의 자의와 다른 사람의 자의가 자유라는 보편적 한계에서 일치될 수 있는 조건들의 총체"에서 승인된다(Immanuel Kant). 그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한 많은 그러나 동시에 동등한 권리가 보장되는 자유라는 점에서 공동체 안에서의 자유는 상호적으로 행사되어야 한다는 한계성을 갖는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법치국가(freiheitlicher Rechtsstaat)로서 이해된 사회는 개개인에게 가능한 많은 자기실현의 공간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사회의 문명적이고 문화적인 발전의 기초가 되는 경제적 기초(하부구조)와 정신적 상부구조 사이의 자유의 변증법의 출현을 가져왔다. 말하자면 이러한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개인들의 자유로운 자기실현은 정치적 영역에서는 관용의 원리와 함께 경제적 영역에서는 분배의 원리를 요청한다.

우리는 최근 등장한 산업화와 대중민주주의 사회를 경험하면서 자유의 한계성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한다. 자율적 개체인 인간의 자유에 기초한 이른바 서구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적 법치국가는 개인의 자기규정과 자기발전으로부터 생각해낸 진보적 파토스와 인도주의적 에토스를 요구한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적 정치질서에서 개개인이 사회적 자기실현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이 자유개념은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 따라서 자유의 문제에서 인간을 "사회 한가운데서 독립된 개체로서만" 다룰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의 문제에서 인간학적 논거는 이미 낡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자유의 사회학적 명제가 정당화되고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철학자 포이에르바허가 말한 것처럼 자유의 인간학적 명제와 사회학적 명제는 "사회적 관계의 조화"(Ensemble der gesellschaftlichen Verhältnisse), 말하자면, "사회에서 평등의 회귀"(Wiederkehr der Gleichen in der Gesellschaft)로 그 시각을 옮겨봐야 할 것이다.

인간은 개인적이며 동시에 사회적 동물이며 따라서 우리는 인간학적 차원과 동시에 사회학적 차원으로의 자유의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여기서 개인의 형식적 자유와 사회의 물질적 자유가 문제된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의 보장만으로 불충분하며 개개인에게 사회적으로 가능한 한 동등한 기회의 제공이 중요하다. 그것은 특정 인간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비인간적 사회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개개인들의 욕구가 충족되고 개인의 능력들을 발휘할 수 있는 동등한 권리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Karl Marx). 여기서 모든 인간들에게 한 국가 안에서 형식적이고 물질적 자유가 보장되는 "자유주의적 사회국가"(freiheitliche Soziaalstaat)를 지향하게 된다.

국가 자체가 물질적 권리의 보장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전제들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보편적 자유의 보장은 공허한 것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다면 그들에게 주어진 개인의 정신적 자유는 공허한 것이다. 그동안 자본주의 체제는 법치(권리)국가로서 형식적 자유를 보장해주었으나 모든 시민들을 위한 물질적 자유를 보장해 주지 못했다. 다른 한편 사회주의적 체제인 공산주의 국가는 물질적 자유를 보장한다고 하면서 정신적 자유를 보장해주지 못했다. 자유가 없는 군주국가나 사회주의적(sozialistische) 국가와는 달리 자유가 있는 법치국가나 사회적(sozial) 국가가 주어져야 하는데 거기서는 개인의 형식적 자유뿐만 아니라 사회의 물질적 자유도 보장되어야 한다. 개인적 자유권과 사회적 복지가 공히 보장되는 국가가 오늘날 우리가 지향하는 국가, 즉, 사회국가이다. 우리의 이상은 자유주의적 법치국의 정신적 자유와 자유주의적 사회국가의 물질적 자유가 점진적으로 일치되는 것을 지향한다.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개념의 왜곡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세편의 종교개혁문서들을 편찬했다. 참고로, "독일 기독교인 귀족들에게 보내는 글"은 1) 교황이 정치적 권위 위에 있다는 정치적 수장권, 2) 교황의 모든 교리를 결정할 수 있다는 교리의 수장권, 3) 교황이 공의회를 소집하고 그 결정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공의회 수장권의 오류를 지적하고 비판한다. 그리고 "교회의 바빌론 포로"는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일곱 개의 성사를 비판하고 예수가 제정한 두 가지 성사, 즉 세례와 성만찬만이 참된 성사임을 주장한다. 1520년에 편찬된 "그리스도인의 자유"(Freiheit von eines Christenmenschen)라는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대해서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만물에게 예속된다." 루터의 이 짧은 명제는 서구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존재양식의 "대헌장"이 되어 왔다. 그러면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명제를 가지고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여기서 우선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대해서 자유인이고, 만물에 대해서 종이라는 명제다. 루터는 주인과 종이라는 대립명제, 자유인과 노예(종), 주인과 신하라는 당시의 봉건적 사회-정치적 개념영역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러한 주인과 종이라는 쌍둥이 개념은 이미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등장하는데 당시 독일의 사회상도 반영한다(όεσπότου όντος δούλός έστιν, καί δούλου όντος δεσπότης έστίν).

그런데 루터는 사회-정치적 의미에서 주종관계를 말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주인과 종의 문제를 그리스도인의 존재양식에서 말한다. 이 개념은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9)라는 바울의 말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인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들을 얻고 섬기는 존재라는 선교 신학적이고 사회 윤리적 사고가 여기에 내포되어 있다.

바울은 신앙인의 이러한 이중적 존재양태와 행동양태를 영적 인간과 육적 인간이라는 도식으로 설명하기도 했다(롬 8:3-13). 말하자면, 영적 인간은 선을 행하는 자유인이지만 육적 인간은 악에 굴종하는 노예적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이해는 그리스 전통이나 스토아 사상에 기원을 둔다. 이러한 인간이해에 근거해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동시에 종 됨을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simul iustus et peccator)라는 도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영적(내적)으로는 자유인이지만 육적(외적)으로는 죄의 노예라는 것이다. 여기서 루터가 주창하는 자유개념은 뭔가 내적 인간과 관련되고, 종의 개념은 외적 인간과 관계되는 것으로서 이원론적 관점에서 이해된다.

이러한 루터의 인간이해는 오랜 역사적 수용과정에서 영적(내적) 자유를 개인의 내면성의 자유로만 이해하게 됨으로써 외적 자유, 사회적 정치적 영역과는 무관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외적 자유는 사회정치적 영역의 자의성에 맡겨졌었다. 그래서 저명한 독일의 사회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루터의 자유개념의 왜곡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마르틴 루터의 문서에는 부르주아적 자유개념이 구성되고 특별히 부르주아적 권위형성의 기초가 되는 제반 요소들이 최초로 총체적으로 집합되어 있다. 말하자면, 자유를 개인의 내면적 세계에만 국한시키는 것, 동시에 외적 인간을 세상권력의 지배체제에 굴복시키는 것, 이러한 세속적 권력들의 체제를 내적 자율성과 이성을 통해서 초월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이중 도덕으로' 인격과 직무를 갈라놓는 것, 실제적 부자유와 불평등을 '내적 자유와 평등'으로 정당화하는 것 등으로 나타났다. (Herbert Marcuse, "Studie über Autorität und Familie," in: Ideen zu einer kritischen Theorie der Gesellschaft. Edition Suhrkamp 300 [1969], 57f.)

이러한 자유인 됨과 종 됨의 개념의 왜곡은 오늘날 루돌프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의 내면성의 문제를 다루는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 의존하는 불트만은 인간의 "실존분석과 이해"를 그의 신학의 중심주제로 삼는데 마침내 종말론마저도 인간의 내면세계로 증발시키고 있다. 그는 인간의 외적 측면, 즉, 사회적, 정치적 측면은 물론 역사적 지평까지를 완전히 제거하고 만다.(불트만의 1930년대만 1940년대 초에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한 설교집인 "차안과 피안"[Marburger Predigten]을 읽어보면 히틀러의 독재체제와 만행에 대해 일언반구도 찾아볼 수 없다.) 또 다른 신학자 집단들은 루터의 두 왕국이론을 "정교분리의 원칙"의 기초로 삼아 종교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내세워서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차별 그리고 경제적 착취에 대해서 눈을 감았다. 파울 알트하우스와 같은 루터교신학자들은 독재자 히틀러의 정치탄압과 유대인 대학살 그리고 전쟁범죄를 외면하거나 심지어는 동조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실존주의 신학자들이나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내면성에 집중하거나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복음의 사회적 정치적 차원을 배제함으로써 루터의 사상, 아니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회적 측면을 외면하거나 왜곡하고 있다.

이렇게 오늘날에도 루터가 말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영적 인간, 혹은 내적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이해하고 외적 인간은 세상의 권위나 체제에 "복종하는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현실적 삶에서 주어지는 부자유와 불평등은 내적 자유와 평등으로 대체시키거나 피안적 종말론적 차원으로 밀쳐버린다. 보수적 루터교회 신학자들은 종교를 전적으로 개인적 사안으로 규정하고 자유를 순수 내적인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을 세상에서 사실상 무해하고, 무책임하며, 무의미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Max Scheler, Schriften zur Soziologie und Weltanschauungslehre, Gesammelte Werke, Bd. 6. 208).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내면성의 찬양이나 정교분리의 원리는 과거 독일인의 삶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커다란 기만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대해서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는 루터의 명제는 그 후예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은 영적 삶에서는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속적 삶에서는 누구에게나 예속되어도 좋다"라는 명제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잘못된 루터의 자유의 이해는 오늘날에 와서는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급기야 전 인류를 정치적 억압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자유롭지만 오늘날 불의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체제에서 그 억압의 주인으로 등장한 맘몬의 종으로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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