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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규태 칼럼]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신자유주의 세계체제 (2)

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정치신학적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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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

우리가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바로 이해하려면 그의 신학의 해석학적 틀인 "율법과 복음"의 상관관계 안에서 그것을 해석해야 한다. 그는 로마서 강해(1516년)와 갈라디아서 강해(1516년)를 통해서 구약성서 전체의 중심내용인 율법과 신약성서의 핵심내용인 복음의 상관관계를 탐구한다. 한마디로 율법은 인간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Anspruch)이고 복음은 허락되는 모든 것(Zuspruch)인데, 루터는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서 성서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려 했다. 그는 이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의인"(Righteousness)이라는 통합적 개념으로 파악한다. 전통적 해석에서 하나님의 의인이란 율법의 요구에 따라 인간의 죄된 현실을 심판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나, 루터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은총)으로 이해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義)를 율법의 요구인 공로의 요구가 아니라 복음의 허락인 은총의 행위로 규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는 "의로운 사람"(義人)을 가리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와 인간들의 공로의 압제에서 자유로워진 그리스도인이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정의, 즉 복음의 은총에 대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율법의 공로(업적)신앙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살 수 있다는 종교개혁의 대명제를 제시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자연(인간의 공로)과 (하나님의) 은총의 종합을 주창한 스콜라주의의 신학체제에 항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총만의 신학,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루터는 제창한다. 즉 인간은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오는 믿음으로, 즉, 은총만으로 살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율법과 모든 압제로부터 자유함과 동시에 하나님의의 은총이 육화된 그리스도(실천자)에 대한 믿음에서 주어지는 은총의 자유를 말한다.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실존, 즉, 자유인됨과 동시에 섬기는 종됨의 논제를 보다 본격적으로 재해석하려한 신학자는 디트리히 본회퍼라 할 수 있다. 그는 1944년 5월 감옥에서 쓴 글에서 그동안 독일교회는 억압과 갈등으로 점철된 세상 한가운데서 화해와 은총의 담지자가 되지 못하고 내면(사고)의 세계로 도피하여 자기안위와 보존만을 추구한 것을 반성하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존재양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것, 즉, 기도하며 사람들 가운데서 정의를 실천하는 데서 성립된다"(Dietrich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S. 435).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뜻(의)을 찾고, 인간들 사이에서는 그의 뜻인 정의(은총)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같은 해 11월 21일자 옥중서신에서 믿는 자의 존재양태를 "저항과 복종"이라는 도식으로 좀 더 구체화한다. 즉, 하나님의 의(은총)에 복종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율)법들의 요구들에 저항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저항과 복종 사이의 경계가 원칙적으로 정해져 있지는 않다. 신앙이 그와 같은 역동적이고 생동적 행동을 요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고 그것을 결실 있게 만들 수 있다"(Bonhoeffer, Ibid., S. 334).

앞서 서론적 부분에서 자유의 개념을 역사적으로 해명할 때 인간은 인간학적 차원에서 개체로서 존재의 자유를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학적 차원에서 "집단 안에서 개체"로서 자유를 취급했었다. 이전 부르주아적 사회에서는 인간학적 차원에서의 개체의 내적(정신적) 자유가 주제였지만, 오늘날의 다원화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사회 안에서 개인들"의 제반 외적(물질적) 자유가 문제된다. 말하자면 개인들의 욕구가 충족되고 개인의 능력들을 발휘할 수 있는 동등한 권리와 기회가 주어지는 자유가 문제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사회적 개체"로서 인간은 내적이고 형식적 자유뿐만 아니라 외적, 사회적, 정치적 자유와 함께 물질적 자유가 담보되는 "자유주의적 사회국가"(freiheitliche Soziaalstaat)가 지향된다고 하겠다.

여기서 루터가 말하는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의 존재양태인 "내적으로는 기도하는 것과 외적으로는 정의(은총)를 행하는 것"은 인간학적 차원에서 주인으로서의 내적 혹은 정신적 자유와 함께 사회학적 차원에서 종으로서 타인을 섬기고 나누는 자유가 매개된다.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양태의 다른 모델인 "저항과 복종"은 세상의 모든 법적, 정치적 억압체제들에서 자유하기 위한 저항과 모든 억압체제들 아래서 고통당하는 사회적 타자들(약자들)을 위한 복종(섬김)에서 루터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변증법적 존재양태와 맥을 같이 한다.

과거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자유로운 자들은 강한 자들, 부자들, 즉, 상위자들이었고, 종들은 약하고 가난한 자들, 하위자들이었다. 오늘날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지만 등장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체제에서 우리는 다시 과거 부르주아적 불평등의 사회체제,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경제적 모순과 차별들을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본회퍼는 이러한 왜곡되고 모순된 사회상을 철저하게 전복시킨다. 그는 "저항과 복종 사이의 경계가 원칙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지만," 이제까지의 저항(자유)의 대상과 복종(섬김)의 대상을 철저히 전환시킨다. 즉, 그는 강하고 부한 상위자를 섬김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저항의 대상으로 보고 약하고 가난한 하위자를 오히려 섬겨야 할 대상으로 본다. 이러한 본회퍼의 생각은 그의 신관에도 나타난다. 즉,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자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무력한 자이기 때문에 인류의 구원자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십자가로 쫓겨났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무력하고 약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만 그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돕는다"(Bonhoeffer, Ibid., S. 534).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그의 약함과 수난을 통해서 우리를 돕는다(마태8:17).

결론: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체제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

우리 시대를 세계화 시대 혹은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제체제의 시대라고 말한다. 1980년대를 기점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초강대국 미국의 일극체제로 시작된 이 신자유주의 시대를 20:80 세계 혹은 더 심하게는 1:99의 세계라고 정의한다. 이 세계에서는 부유한 사람은 너무나 부유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해서 빈부격차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세계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는 빈곤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빈곤"(gemachte Armut)이라는 것이다. 즉 빈곤은 힘과 부를 독점한 상위집단들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생산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학자들은 오늘날 이 시대를 부유한 사람들이나 그들에 의해서 통치되는 국가가 가난한 사람들 혹은 빚진 사람들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2016년 3월3일부터 대부업 이자율이 34.9%에서 27.9%로 인하되어 약 350만 명의 가난한 이들이 혜택을 보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덜 가난한 사람들이 약 2.5%대에서 은행에서 정상적으로 돈을 빌릴 수 있지만 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30%대의 이자를 주어야 돈을 빌릴 수 있는 것은 정의로운 사회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 예언자 아모스가 말한 것처럼 오늘날 한국 사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머리털까지 탐하는 원시적 사회가 되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세계체제는 산업자본주에서 금융자본주의 시대로 넘어오는 1980년대를 기점으로 산정하는데, 학자들은 1987년에 금융자본의 이익이 산업자본주의의 그것을 넘어섰다고 말한다. 지금은 물건 만들고 팔아서 돈 버는 것보다 돈놀이로 이자를 받는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번다는 것이다. 예로서 우리나라 서민들의 가계 빚이 1200조를 넘어섰다. 그 빚의 이자가 평균 5%라면 빚진 자들이 1년에 약 55조의 이자를 부유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세계경제체제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부자들을 원조하고 있다. 과거에는 부자들이 자발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왔으나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가난한 자들이 강제로 부자들을 돕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가리켜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세계체제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유로이 부유하고 강한 자들이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자유롭게 착취할 수 있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당시의 휴머니스트였던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에 대해서 "노예의지론"으로 대항하면서 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예견했던 것 같다. 에라스무스는 1524년에 인간의 사후의 운명은 자기의 공로(자유이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신의 은총만(sola gratia)으로 규정된다는 루터의 논제에 반대하여 자유의지에 따라서 규정된다는 당시의 가톨릭교회의 명제를 제시했다. 여기에 대해서 마르틴 루터는 1525년에 "노예의지론"(De servo abitrio)으로 대항했었다. 여기서 루터는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 개념 속에 내포된 자유주의의 모순점을 정확히 보고 있다. 즉, 자유라는 개념이 갖는 자의성과 함께 그것이 강자나 부자들에 의해서 오용될 수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화 시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선도해가는 미국정부와 그들을 열심히 따라가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어떠한가?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이 기업의 경쟁력을 높인다고 감세정책을 도입하자, 이명박도 감세정책을 써서 대기업의 법인세를 큰 폭으로 감면해 주었다. 이명박 임기 5년 동안 약 100조원이 부자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거기에다 4대강 사업을 통해서 막대한 국민의 세금을 대기업들의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최근 박근혜 정부는 이렇게 해서 부족해진 세금을 대기업의 법인세를 다시 받아서 충당하지 않고 담배세, 주민세, 자동차세를 인상함으로써 서민들의 주머니를 짜내서 해결하려고 한다. 오늘날의 정치와 경제의 유착은 부자를 더욱 부유하게 만들고 서민들은 더욱더 가난하게 만든다. 기업에 종속된 미국이라는 국가모델을 한국도 따라가고 있다. 박근혜대통령은 거의 전적으로 기업활동의 지원의 테두리에서 수행된다. 그는 외교활동의 명목으로 국민들의 세금을 쓰면서 기업가들만을 동반하고 그의 사업을 돕는다. 그것을 경제 살리기라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나라 재벌이라는 대기업들은 몇 십 조씩 현찰로 쌓아놓고 일자리에 대한 재투자에는 인색하다. 그들은 금융사업(은행, 보험, 증권 등)에 눈을 돌려 이자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지만, 그들의 동반자인 노동자들의 존재는 무시하거나 탄압한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비정규직에서 아르바이트로, 일당 아르바이트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로 내몬다. 노동자들이 쟁의라도 할라치면 그들의 하수인인 정부가 특공대를 동원해서 노동자들을 진압하고, 사법부는 그들을 감옥에 보내준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세계체제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계명은 무엇인가? 제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힘없고 가난한 모든 사람들을 섬기라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제기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계명을 어떻게 우리는 실천해야 할까?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 아니, 사회개혁의 지표로서 공로나 업적이 아니라 믿음으로, 은총으로 만 살 수 있다고 갈파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체제는 은총의 사회가 아니라 공로와 업적을 내기 위한 경쟁의 사회다. 은총의 대상이 되는 사회적 약자들은 경쟁에서 탈락해서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고, 업적의 달성자들은 경쟁의 승리자요 존경의 대상이 된다. 또 이웃은 공동체로서 같이 살아가야 할 대상이 아니라 경쟁을 통해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부르주아 사회가 동틀 때 정치사상가 토머스 홉스가 말한 것처럼 오늘날 인간은 모든 인간에 대해서 늑대가 되었다.

이러한 늑대의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미국을 필두로 한 강대국들의 탐욕과 경쟁이 인간의 경제적 삶의 근간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있으며 인간들의 정신을 황폐화시켜 온갖 조직적이고 집단적 범죄와 인간 생명에 대한 멸시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지난 4월 16일 신자유주의적 정치체제와 결탁한 사이비 종교기업이 운영하던 세월호 참사는 모두가 맘몬이라는 업적의 우상을 숭배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을 저버린 오늘날 한국사회의 총체적 타락의 표징이다. 온 국민이 나서서 그 원인 밝히고 범법자들을 처벌하고 온 국가가 새로 나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 이것이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맘몬)를 숭배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제체제를 따라가는데서 생긴 비극이다.

우리는 앞서 서론적 부분에서 부르주아 사회에서 인간학적 차원에서 개인의 자유는 오늘날 사회적 차원에서 자유와 상관관계에서 발전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공로(업적)가 아니라 은총으로만 살 수 있다는 루터의 종교개혁표제어는 오늘날 유럽의 스칸디나비아나, 독일 등 사회적 국가들(Sozialstaat)을 통해서 다소나마 응답되고 실현되고 있다. 거기서는 사회적 강자들이 공적을 독차지하지 않고, 은총의 정신으로 이웃과 나눔으로써 사람들이 보다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곳에서는 다수의 국민들이 자기의 업적으로 얻은 수익의 상당부분을 사회적 약자들에게 세금으로 내놓음으로써 복지사회를 이루어가고 있다. 이제 인류가 살 수 있는 길은 업적이나 공로가 아니라 사랑과 은총의 길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오직 은총만으로"라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구호가 오늘날 사회개혁의 구호가 될 때에만 우리는 살 수 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삶의 계명이다.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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