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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타스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36 "사람에게 믿음이 지니는 뜻"
정재현의 신앙성찰

입력 Nov 28, 2016 03:20 PM KST

2. 종교간 만남의 허구성과 그 극복을 위하여(2)

jungjaehyun
(Photo : ⓒ베리타스 DB)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그렇다면 인간 해방을 향한 몸부림은 어떻게 전개되어 왔나요? 이제부터 조금은 더 자세하게 서구 동네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피지기이든 타산지석이든, 기독교 신학이라는 것이 그 동네 이야기들을 배경으로 생겨나고 자라왔으니 말이죠.

그런데 자고로 인간해방을 향한 몸부림은 인간의 정체 물음과 떼려야 뗄 수 없으며, 이는 결국 죽음으로부터의 요구에 뿌리를 둡니다. 그런데 죽음이 묻게 한 인간의 정체에 관련된 이야기가 그 핵심에 마땅히 자리해야 할 몸에까지 이르는 길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결코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실마리를 풀기 위해 이렇게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즉, 죽음이 없었다면 물을 필요도 없었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결국 참된 삶을 갈구하는 것이었다면 해방에의 몸부림은 곧 '참' 물음의 진화과정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얽힘의 시원인 '참'에 대한 물음은 어떻게 제기되었나요? 이 대목에서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는 진화론적 통찰을 빌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즉, 어린아이들이 스스로를 본능적으로 느끼기 시작하면서 이내 주위에 대해 관심하게 되고 이는 곧 '무엇?'이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해보자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정신문화사적 차원에서도 '참'에 대한 시원적 물음은 당연하게도 다음과 같이 제기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참'이란 무엇인가?

과연 그렇습니다. '참'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이러한 궁극적 물음은 그냥 아무런 동기 없이 단순한 지적 유희를 위해서 상아탑에서의 탁상공론식으로 제기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강조하지만 죽고 사는 문제였지요. 왜냐하면 이러한 물음이 물음으로서 제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있었다가 없어지는 사건, 즉 죽음에 대한 이모저모의 체험들이 삶의 어두움에 눈을 돌리게 하였고 이로써 인생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 등을 직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이제 죽음을 계기로 자연의 명백하고도 불가피한 생성소멸을 간파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라는 삶의 어두움에 대한 체험은 당연하게도 확실성과 안정성을 향하게 하였으니 바로 이러한 지향이야말로 생성소멸과 같은 변화의 굴곡들을 넘어서는 항구성과 영원성을 갈망하게 하는 동인이 되어버렸지요. 그리고 바로 그러한 항구적 영원성에 대한 염원이 이제 '참'이라는 이름으로 결집되었습니다. 따라서 조변석개하거나 변화무쌍하여 믿을 수 없는 가엾은 삼라만상에 대해서 '참'은 명실공히 확실성과 안정성을 제공해 주는 항구적 영원성의 근거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애써 종교를 떠올리지 않아도 그러한 '참'이 곧 신(神)으로 새겨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는 어떠한 것들이 있었을까요? 물론 유감스럽고도 다행스럽게도 부지기수였습니다. 한편으로, 그것이 유감스럽다는 것은 단 하나로 정리될 수 있었으면 사람들이 부질없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으리만큼 편리했을 텐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다행스럽다는 것은 만일 그렇게 단 하나로 압축되었다면 세상은 천편일률적이고도 무미건조한 황무지가 되었었을 것이라는 끔직한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이렇게 부지기수인 '참들'은 대략 추려질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참'에의 추구를 촉발시킨 원초적 동기를 떠올림으로써 시도될 수 있었습니다. 생성소멸의 운명을 직시하면서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넘어서는 자리에 모셔져야 하는 '참'은 당연하게도 결코 없어져서는 안 되는, 또한 없었던 적도 없었던, 그리고 없어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있음, 즉, '있음이기만 한 있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없음이 없는 있음,' 즉, '있음 자체(esse ipsum),' 이것이 바로 "참이란 무엇인가?"라는 시원적이고도 궁극적인 물음에 대한 종국적인 대답의 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의 무엇'에 관한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참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물을 수밖에 없었던 원초적 동기를 떠올린다면 '있음 자체'라는 대답은 추호의 의심의 여지없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물음에 대해서 이 대답이 그 자체로서 모든 요건을 만족시키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는 데에서 결정적인 분기가 촉발됩니다. 왜냐하면 '있음 자체'라는 것은 제아무리 완전하더라도 그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것이며, 규정이란 모름지기 한정이라고 할 때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넘어서는 항구적 영원성을 책임져야 할 '참'이라는 것이 결코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면 '있음 자체'라는 대답으로 만족되고 종결될 수는 없겠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제 "참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 그러한 규정을 넘어서는 '무규정성'이 요구되었고 이러한 무규정성을 의미하는 무(無), 즉 '없음'이 '있음'에 맞서는 대답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참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등장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어떠한 관계를 지닐까요? 이들은 형식논리적으로 보면 철저히 상호모순관계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대답들은 양자택일의 관계로만 읽혀져야 할 것일까요? 여기서 자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상호모순적인 항목들 사이의 긴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참의 무엇'이라는 물음 자체에 대해서 되묻게 하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말하자면 과연 '참'에 대해서 '무엇'이라는 물음이 적절한가? 혹은 '무엇'이라는 물음으로 충분한가? 그리고 바로 이러한 되물음은 드디어 '무엇'에서 '어떻게'로 넘어가는 계기가 됩니다: "참이 그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도대체 '어떻게' 드러나는가/알려지는가?"

'참'은 어떻게 알려지는가?

그렇습니다! "참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마땅히 하나이어야 할 것 같은데 현실은 부지기수일 뿐 아니라 심지어 이들을 묶어 추리더라도 결국 '있음'과 '없음'으로 귀결시킬 수밖에 없으리만큼 상충된다면 '무엇'만을 계속 묻고 기다릴 수는 없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여기서 당연히, 그 '무엇'이 주어지거나 다가오거나 드러나거나 알려지는 방법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을진대 이 물음은 바로 '어떻게'라는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이란 어떻게 알려지는가?"라는 물음은 이미 그 물음 자체가 이에 대한 대답의 형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결국 '알다'라는 행위에 주목함으로써 '앎'의 방식을 대답의 틀로 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안다는 것은 바로 그 앎이라는 행위의 주체와 대상이라는 관계를 전제한다고 할 때 '앎'이란 앎의 주체가 앎의 대상을 주체 안에 잡아내는 행위라고 묘사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것을 맞이(對)하여 주체 안에 잡아낸 모양(象)이라는 뜻을 지닌 대상(對象)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지요.

그런데 대상이 가리키듯이 주체에 관계하고 있는 그 무엇이 그것 자체로서 드러나기보다 주체 안에 잡혀지는 '모양'으로서 알려지는 것이라면 그러한 주체가 알게 된 대상이라는 것은 바로 그렇게 알려지게 한 그 무엇 자체일 수는 결코 없을 것인즉, 인식주체의 앎이라는 것이 대상으로 알려진 그 무엇 자체를 그대로 싸잡아 낼 수 없다는 점만큼은 명백합니다. 말하자면 앎이란 모름을 배제하는 통째로의 앎일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기에 그렇습니다. 이처럼 '어떻게'라는 물음에 얽힌 '앎'과 '모름'은 앞서 '무엇'이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 '있음'과 '없음'이 불가피한 긴장에 있다는 것과 궤를 같이하면서도 이와는 달리 양자 사이의 경계를 확연하게 설정할 수 없다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떻게'라는 물음에서 '앎'은 어디까지이며 '모름'은 어디서부터인가를 그 어느 편에서도 결정할 수 없다는 불확실성을 지니게 되지요.

그런데 이러한 불확실성은 '참 물음'의 원초적 동기와 궁극적 목적 모두에 대해서 지극히 위협적인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논했듯이 죽음으로 인한 삶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해서 확실성과 안정성 및 이를 보장하는 항구적 영원성을 구가하려고 바로 '참 물음'이 제기되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참'에 대한 '어떻게'라는 물음의 한계가 드러나는데 바로 여기에서 '참'에 대한 궁극적 근거 물음인 '왜'가 등장합니다. 다시 말해 '참'이 '무엇'이든, 그리고 '어떻게' 드러나고 가려지든, 도대체 "왜 참인가?"라는 물음에 비추어 판정되어야 할 것이라는 요구가 여기에서 제기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있음'인지 '없음'인지도 판가름하기가 만만치 않고, 더욱이 '안다'고 하기에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으니, 도대체 그 무엇인가가 '참'이라고 제시되는 근거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참'인가?

제아무리 참의 '무엇'이 어떠하고 '어떻게'가 저떠하더라도 도대체 그것이 '참'인 까닭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참' 물음을 제기했던 원초적인 동기인 죽음으로부터의 요구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그래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삶은, '무엇'에 대하여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의 판정이 불가하고 '어떻게'에 대하여 '앎'과 '모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이 '참'일 수 있는 근거는 그러한 '참'에 마주하는 사람에게서 찾아져야 하며 그것은 바로 사람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러한 '참'은 사람의 삶과는 무관한 허공 속에서 맴도는 뜻 없는 이름일 뿐이겠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삶이야말로 '참'이 비로소 '참'으로서 착지할 수 있는 터전이요 지평이어서 '삶'으로부터 비로소 '참'의 뜻이 구현되는 실마리를 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삶이 죽음과 얽혀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더욱 확증됩니다. 왜냐하면 삶이 죽음과 그렇게도 얽혀 있는 것이라면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의 판정불가는 이미 불가피한 것이요 앎과 모름도 역시 뒤엉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삶과 죽음의 얽힘은 있음과 없음의 얽힘, 그리고 앎과 모름의 얽힘을 위한 근거가 되면서 동시에 그러한 얽힘들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참'에 대해서 '왜'를 물어야 할 당위성과 불가피성을 동시에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즉, 이것이 바로 '참'에 대한 물음이 '무엇-어떻게-왜'라는 방식으로 연속적으로 엮이어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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