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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38 "역설이 요구하는 경계 허물기"
정재현의 신앙성찰

입력 Dec 26, 2016 02:46 PM KST

2. 종교간 만남의 허구성과 그 극복을 위하여(4)

jungjaehyun
(Photo : ⓒ베리타스 DB)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앞서 우리는 '참'을 향한 물음이 '무엇'에서 시작하여 '어떻게'를 거쳐 '왜'까지 가야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들은 '무엇'이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이미 '왜'를 안고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얽힘이 이미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보건대, 어떠한 것에 대해서라도 아무런 생각 없이, 그야말로 사심 없이, '무엇'을 물을 까닭은 별로 없습니다. 게다가 그것이 '참,' 즉, 신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말하자면, 무엇인가 앞선 관심이나 의도에 의해 이 말이 비로소 어떠한 뜻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관심이나 의도가 바로 '왜'에 해당합니다. '무엇' 물음이 이미 '왜' 물음을 깔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나아가 '무엇'이라는 물음에 대해 등장한 수많은 대답들은 그렇게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누가-언제/어디서'가 묻게 한 '왜'라는 물음을 '무엇'이 이미 안고 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말하자면 같아야 하고, 아니 같다 못해서 하나이어야 하고, 그래서 예측 가능한 동일성의 토대가 됨으로써 인간의 불안을 해소시켜 주어야 할 것이라고 요구되었던 '무엇'이라는 물음은 그러한 요구와는 달리 이미 엄청나게 서로 다른,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대답들을 만나왔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라는 물음에,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일에 '언제/어디서'를 살아가는 '누가'가 그 나름대로 절실한 '왜'를 가지고 이미 그렇게 종사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누가-언제/어디서'가 그렇게 서로 다른 '왜'라는 물음으로 '무엇'을 풀어내고자 함으로써 그토록 다양한 갈래들을 연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마음만으로 하나의 진리를 밝혀낼 수 있으리라고 했지만 이미 몸이 그렇게 물었기 때문에 부득이 수많은 대답들이 난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로 가야 할 뿐 아니라 사실상 이미 '왜'를 깔고 있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의 동료들에게 '누가-언제/어디서'를 묻고 이리저리 대답하거나 대답을 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단지 그 '무엇'의 동일성이라는 허상적 신화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었던 사실을 미처 의식하지 못했고, 이게 습관으로 굳어지면서 기왕 굳어진 편리함이 '무엇'의 같음을 더욱 공고히 해 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이미 '왜'를 묻고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까지 했었던 것입니다. 몸이 가리어지고 나아가 억눌려졌던 것이 바로 이러한 맥락이었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무엇'은 '누가-언제/어디서'가 나름대로의 '왜'를 싸안고 던진 물음이었고, 인간은 이미 그렇게 고유하고도 구체적으로, 그리고 유한하고도 우연하게, 말하자면 그토록 서로 다르게 '언제/어디서'를 살아가는 '누가'로, 즉 온 몸으로 신 앞에 섰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언제/어디서'는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다를 뿐 아니라 '언제/어디서'가 바로 '누가'를 이루는 결정적인 구성요소라고 할 만큼 '우리가 곧 몸'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곧 몸이니 말입니다. 사실상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은 그렇게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몸이어서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긴 세월동안 우리는 같음만을 붙들고 늘어지며 마음만으로 이를 붙들 수 있다고 착각함으로써 우리가 그렇게 '서로 다른 몸'이라는 것을 잊어버려 왔거나 억눌러 왔을 따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 다른 몸'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들추어낸다는 것은 실로 해방을 향한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세월 '같음'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경과 이를 보장할 정신의 지배 아래 억눌려 왔던 것이 바로 다름 아닌 '다름'과 '몸'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어떻게'가 엮어낸 '있음과 앎의 같음'이야말로 '삶의 다름'을 말살하는 결정적인 계기였고, 그렇게 축출 당했던 '다름'으로 이루어진 삶이란 결국 몸의 짓이라면 '몸'이 억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예정된 수순일 따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서로 다른 몸이라는 것'을 절감하는 일은 같음의 굴레로부터 다름이 벗어나는 것이며, 더욱이 다름들 사이의 만남을 통해서 같음과 다름이 그렇게 확연하게 경계지어질 수 없다는 통찰로까지 나아가는 것을 뜻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같음과 다름의 경계가 불확정적일 수밖에 없을까요? 그것은 사실상 같음이나 다름은 비교와 대조를 위한 개념으로서 공히 최소한 '둘' 이상의 개체를 전제하고 있고, 이 최소구성수로서의 '둘'이란 결국 최소단위로서의 '하나'를 전제하는데, 실제로 개체적이고 동시에 관계적인 인간에 대해서 '한 인간'이라는 표현이 가능하고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실제로 어느 구체적인 사람을 '한 인간'으로 규정하는 최소단위가 실제로 끊임없이 가변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 대해 적용될 수 없는 성질이라고 할 때,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역시 그 다름이 놓이는 자리도 확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분석은 개체 인간들 사이의 다름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시공간을 달리 하는 사람들 사이의 다름은 물론이거니와 한 사람에서의 끊임없는 다름을 간과할 수 없다면 한 인간을 최소단위로 규정하는 같음의 명백한 설정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여러 사람들 사이의 다름도 간단하게 설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말하자면 같음과 다름의 경계는 흔히 통속적으로 상정되는 것처럼 그렇게 명확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할 뿐인 것이지요. 결국 '삶의 다름'이란 '있음과 앎의 같음'을 송두리째 폐기하는 발광이 아니며 '누가-언제/어디서'란 '무엇-어떻게'를 팽개친 저마다의 아우성이 아닙니다. '왜'가 이를 허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같음과 다름 사이에 놓여진 왜곡되고 곡해된 경계들을 허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같음의 굴레로부터 다름의 해방이란 같음과 다름의 경계 불확정성을 전제함으로써만 대책 없는 무정부적 상대주의를 넘어서 '무엇-어떻게'와 마주할 '누가-언제/어디서'가 가리키는 '통사람'(全人)을 꿈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몸의 역설은 우리에게 바로 이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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