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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39 "종교간 만남의 허구성"
정재현의 신앙성찰

입력 Jan 09, 2017 11:20 AM KST

2. 종교간 만남의 허구성과 그 극복을 위하여(5)

jungjaehyun
(Photo : ⓒ베리타스 DB)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동네가 온 세상인 줄 알고 그 안에서 한통속으로 살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그러다가 교통과 통신기술을 포함한 과학의 발달 덕택에 다른 동네의 다른 사람들이 엄연히 함께 살고 있었음을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를 같음으로 읽어낼 필요조차 없었다가 다름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이로써 자기를 같음으로 읽어내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다름과 이루게 되는 긴장이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다는 자각이 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당에 자기의 것만 홀로 '참'이라고 고집하는 독단적 착각은 시대착오적인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화공존이라는 미명 아래 젊잖게 양보만 하고 있다면 무정부적 상대주의라는 비난을 안팎에서 받을 수밖에 없으니 종교에서의 '참'에 관한 시비는 실로 탁상공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가 '참' 물음을 중심으로 다른 종교들과 엮어 온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그리스도교가 지녀 온 이천 년의 세월이 서양문화 안에서였음을 고려한다면 그 시작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서양의 제국주의에서 그리스도교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면 다른 종교와 문화들에 대한 배타주의는 이미 불가피한 귀결이었습니다. 배타주의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입각하여 '다른 것은 몰라도 종교에서야 나의 것과 다른 것들은 거짓이어서 같이 놀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목숨을 걸고 결코 양보할 수 없다'고 선포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다가 '다른 종교들을 생판 거짓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는 약간의 자성이 일어나면서 비교우위를 주장하는 방향의 수정제의가 나타났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으로 포장함으로써 타종교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사이좋게 지내자는 제안이 모색되었는데, 이것을 바로 포괄주의라 합니다. 이는 애당초 다른 것들과 같이 못 놀겠다는 배타주의와는 달리, '같이 놀아주기는 하겠는데 내가 반드시 제일 큰 형님노릇을 해야겠으며 데리고 놀면서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기왕 허물어진 절대성이라면 좀더 적극적인 자세로 피차간의 교류를 통해 자기이해를 더욱 고양시키자는 입장이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그리스도교/교회의 우월성을 신의 절대성이라는 더 큰 범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나타났습니다. 다원주의로 분류되는 이 입장은 결국 고백되는 바로서의 신이 우주의 창조자라면 어느 특정문화나 종교에 제한될 수 있겠는가라는 제법 그럴듯한 외침과 함께 급기야 '이판사판 그게 그거 아니냐?' 또는 '혹 서로 거리가 멀더라도 인사는 하고 지내자'는 제안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우선 배타주의란 누구를 막론하고 같음을 보장해주어야 할 것 같은 '무엇' 물음에 집중함으로써 '참된 하나와 같음'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으로 나타납니다. 이에 비해 포괄주의는 '무엇'의 같음에 대해 도전이 될 수밖에 없는 앎의 문제를 끌고 나옴으로써 같음의 틈바구니를 헤집어 볼 수도 있겠다는 '어떻게'라는 물음에 힘입어 '정도의 다름'에 주목하는 다소 온건한 입장으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여전히 같음을 기준으로 보아 다름은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기는 하되 적어도 같음에 비해 열등하므로 더욱 우월한 같음으로 흡수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한편 다원주의는 같음과 다름의 관계란 참과 거짓의 구분기준이 아닌 것은 물론이지만 우열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동가적인 것이어서 같음과 다름 사이의 구별은 잠정적이고 임의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점에서 '종류의 다름'에 초점을 맞추는 '왜'라는 물음을 공유하는 구도로 간주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간 만남에 대한 이러한 입장들은 이처럼 단순히 다양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서로 모순되거나 상반되기까지 하다는 점도 주목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는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는 서로 모순관계에 있으며, 현실적으로는 배타주의와 다원주의가 서로 상반된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서 살핀 '같음과 다름의 경계 불확정성'이라는 견지에서 본다면 실제 역사에서 구체적이고 가변적일 수밖에 없는 종교가 언제 어디서나 같은 '하나의 종교'로 분류될 수 없으며 따라서 다른 종교들과의 경계나 분리도 그렇게 분명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종교들이 같거나 비슷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고, 서로 다른 종교들을 통폐합하자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다만 시간과 공간에 따라 그리스도교는 달라질 수밖에 없거니와 같은 시대 같은 동네에서 임의의 두 교회가 표방하는 그리스도교들도 엄연히 서로 다를 수밖에 없을 때, 한 종교의 깔끔한 같음을 단서 없이 설정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더욱이 한 이름을 사용하는 종교 안에서의 만남이 여러 종교들 간의 만남보다도 오히려 더욱 어렵고 심각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하나의 종교'라는 이념은 현실과는 거의 무관한 비역사적 환상일 뿐입니다. 더 나아가 종교들 간의 만남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무엇들' 사이의 만남이라기보다는 '왜'를 품고 있는 '누가-언제/어디서'가 가리키는 '서로 다른 몸들'간의 만남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리고 차라리 임의의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의 다름이 임의의 그리스도교도와 임의의 불교도 사이의 다름보다도 훨씬 더 클 수 있다면, 종교들 사이의 서로 다름이란 결국 개별종교를 이루는 몇 이름들 묶음 사이의 서로 다름일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니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네 상황을 보면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 동네는 여러 종교들이 소위 '황금분할'(이 표현은 다음의 출처에서 인용한 것이다: 정양모, "오늘과 내일의 그리스도교," 『믿고 알고 알고 믿고』, 정양모 교수 은퇴기념논총 간행위원회 편 [왜관: 분도출판사, 2001], 129)이라고 할 만큼 혼재되어 있는 다종교상황입니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유구한 전통으로 중첩되어 있으니 문화적으로도 혼합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혼합적인 것은 또한 사회적이나 집단적인 단위에서의 문화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에게서도 여러 종교들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종교들이 한 개인 안에서도 '겹치기 출연'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의 그리스도교인의 경우 그/그녀의 종교적 품성 안에 그리스도교적인 것은 물론이지만 불교적이나 유교적인 성향 뿐 아니라 이보다 결코 덜하지 않게 무속적인 성향 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봅니다. '서로 다른 몸'인 각 사람들마다 그 비율은 서로 다를지언정 여러 종교적 성향들의 혼재만큼은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공통적입니다. 이른 바 종교적 중층성인 것입니다. 앞서 논한 종교 자체의 격의성이 가리키듯이 이미 그리스도교조차도 여럿일 수밖에 없는데다가 종교적 중층성이 의미하는바 한 사람에게서도 여러 종교들이 뒤섞일 수밖에 없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러한 사람들이 그렇게 '서로 다른 몸'일 수밖에 없다면 '하나의 종교'라는 것은 논의의 편의를 위한 개념적인 가정일 뿐 그 어디에서도 찾아낼 수 없는 허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자신이 속해 있는 종교만큼은 적어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한에 있어 '하나의 종교'일 것이라는 비역사적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앞서 누차 지적했듯이 영원한 같음을 제공해 줄 것 같은 '무엇'만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무엇' 안에 깔려 있는 '왜'를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꿈틀거리는 '왜'를 숨겨가면서까지 불안을 떨치려는 종교적 욕망추구에 급급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종교'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허상일 뿐이라면 이제는 같음과 다름의 경계가 흔히 통속적으로 상정되는 것처럼 그렇게 명확할 수 없다는 점을 시인하는 일이 요청됩니다. 게다가 '같음과 다름의 경계 불확정성'이란 단지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소극적인 의미에만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종교가 생명을 지니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경계를 철폐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종교가 정체성[같음]을 구현한다는 미명 아래 변화[다름]를 거부한다면 결국 바로 그 정체성(正體性)이라는 것에 의해 정체(停滯)될 뿐이고, 불변적 정체는 사멸을 뜻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처럼 같음과 다름의 경계가 불확정적이고 더욱이 그 경계가 철폐되어야 한다면 앞서 분석되었던 종교들의 관계 방식들이 새로이 정리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소위 배타주의와 포괄주의, 그리고 다원주의가 언뜻 보기에 서로 모순되고 상반되더라도 이러한 입장들이 모두 '하나의 종교'라는 허상을 공유하는 한 이들 사이의 차이가 실제로 주장되는 것만큼 그렇게 확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복음주의라는 이름의 배타주의의 경우 배제되어야 할 타자가 과연 누구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종교적 격의성과 중층성으로 뒤범벅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들인데 배제되어야 할 타자와 배제하려는 자기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다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책 없이 서로 같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엄연히 서로 다른 몸인데 그럴 수도 없겠지요. 다만 밀쳐내어야 할 만큼 다르기보다는 그렇게 다른 것처럼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것들이 나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좀 더 정직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를 묻고 싶을 따름입니다. 포괄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층과 켜가 그토록 뒤엉켜 있다면 무엇이 무엇을 싸안을 수 있을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원주의라는 것도 침 튀겨 가면서 외칠 일이 아닙니다. 다원주의를 주장할 필요도 없이 이미 사회로부터 개인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층적이고 상당히 혼재적이어서 너무도 충분히 다중적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몸'이라는 것은 이것을 온 몸으로 웅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이름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름의 차이가 그 모든 것들 사이의 차이의 전부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우리 인간들은 그러한 이름의 차이 이상으로 넘어가기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붙들고 목숨을 걸려고 할 따름이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신학적 논의가 증명하듯이, 별로 다르지 않은 입장들 중에서 무슨 대단히 별다른 선택이 취해질 수 있는 것처럼 거품 물고 싸울 일이 결코 아니여야 합니다!

조금은 더 진솔하게 우리 자신을 봅시다. '참'을 향해 던져진 '무엇' 안에 깔려 있는 '왜'를 묻게 한 '누가-언제/어디서'는 '하나의 종교'라는 이념의 허상을 드러내는 데 더없이 소중한 물음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누가-언제/어디서'는 우리가 서로 다른 몸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데 비해 '하나의 종교'라는 이념은 역사를 너머서는 초월영역에 스스로를 자리 매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착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해석 이전의 원계시라는 환상을 붙들려는 인간의 욕망이 음모를 꾸미는 한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계시라는 환상은 인간이 스스로 인간임, 즉 서로 다른 몸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때에나 튀어나오는 헛소리일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이라는 것을 순간이라도 망각하면, 즉 '누가'가 '언제/어디서'로 이루어진 몸이라는 것을 잠시라도 잊어버리면, 이런 유혹과 착각에 빠지는 것은 시간도 안 걸리듯이 말이죠. 말하자면 '하나의 종교'라는 것은 이처럼 '왜'를 억누름으로써 '누가-언제/어디서'를 덮어버리고 '무엇'이라는 물음만 붙들고 늘어지면서 나오는 왜곡과 축소의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언제/어디서'가 가리키는 '서로 다른 몸'은 우리에게 무엇을 지시하는 걸까요? 그것은 믿음에 있어서도 인간이란 '서로 다른 신앙인들'일 뿐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가 그렇게 많이 서로 다르다기보다는 '누가-언제/어디서'인 우리들 각자가 이미 그 이상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의 종교'라는 환상은 폐기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믿음이 '반석 위에 집을 짓듯이' 공고하게 엮일 수 있으리라는 유혹이 우리를 지배하는 한, 우리는 사실상 그렇게 '하나의 종교'에 속해 있다고 착각하는 우리 자신을 믿고 있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진리'를 소리치면서도 불안 극복을 구실로 진리와 자유를 떼어놓으려 했던 종교의 역사가 거꾸로 이것을 증명하고도 남는 것은 물론입니다. 더욱이 투키디데스의 통찰과 같이 역사가 정말로 반복되는지 이념전쟁 시대가 물러가고 오히려 종교전쟁 시대가 다시 오지 않는가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는 요즘 상황에서는 '하나의 종교'라는 허상은 오히려 위험하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철저히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개별적인 신앙인들로서 서로 다른 다름을 그 다름과 다른 자기의 같음으로 환원시키려는 패권주의적 획책을 포기하고, 개별적인 다름들과 공존하는 겸허함을 배우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안을 없애 준다는 미명 아래 같음의 도가니로 마구 쓸어 넣었던 '무엇'의 횡포로부터 벗어나 불안하지만 자유를 향해 다름을 살려 주는 '왜'의 해방선언인 것입니다. 그리고 몸은 이것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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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 연구 시리즈> 섬기는 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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