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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설교] 겸손

2017년 4월 9일 경동교회 종려주일예배 설교자 채수일 목사

성경본문

이사야서 50:4-9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나는 주님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나와 다투겠는가! 함께 법정에 나서 보자. 나를 고소할 자가 누구냐? 나를 고발할 자가 있으면 하게 하여라.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니, 그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 하겠느냐? 그들이 모두 옷처럼 해어지고, 좀에게 먹힐 것이다.

빌립보서 2:6-11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서 27:11-14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서시니, 총독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고발하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빌라도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들이 저렇게 여러 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예수께서 한 마디도, 단 한 가지 고발에도 대답하지 않으시니, 총독은 매우 이상히 여겼다.

설교문

chaesuil
(Photo : ⓒ베리타스 DB)
▲경동교회 채수일 목사

겸손(謙遜),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 호주 출신의 역사학자이자 목사인 존 딕슨(John Dickson)은 겸손(humilitas)을 가장 위대한 리더십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리더십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인들로서 우리는 전문적 지식, 출중한 재능, 조직 안에서의 권위, 탁월한 판단력과 확고한 결단력, 설득력과 용인술 등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겸손이 없으면, 이런 리더십을 구성하는 덕목들이 진정으로 위대해질 수도 없고, 상대를 설득하고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겸손이 창조적이고 효율적인 조직경영을 위한 오늘 우리 시대의 리더십으로만 주목받는 것은 아닙니다. 2500년 전 공자(BCE 551-479)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총명하고 생각이 뛰어나도 어리석은 듯 함으로 지켜야 하고, 공덕이 천하를 덮더라도 겸양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한다. 용맹이 세상을 진동하더라고 겁내는 듯 함으로 지켜나가며, 부유함이 사해(四海)를 차지했다 하더라도 겸손함으로 지켜야 한다.'

군웅할거 시대의 혼탁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이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위한 경륜도 아닙니다. 겸손은 도(道)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자(BCE 604-531)는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에 처한다. 그러기에 도(道)에 가깝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 고대 세계에서 겸손은 존중받을만한 덕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는 '명예'(philotimia: time 명예, philia 사랑)를 중시했기 때문에 겸손을 폄하했습니다.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BCE 50-AD 14)가 죽기 직전인 주후 14년에 직접 집필하여 로마 전역에 배포한 '신성한 아우구스투스 업적'(Res Gestae Divi Augusti)에는 자신의 정치경력, 군사행동, 로마 시민들에게 기부한 돈과 토지와 곡물, 도시를 건설하고 건물을 보수하는 등 공공사업에 그의 재산 6억 데나리우스를 쏟아 부었다는 등 자신의 치적을 내세워 명예를 세우는 일이 당시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겸손(tapeinos)은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노예에게 속하는 굴종의 근성, 종이 가지는 속성이었습니다. 겸손은 '저급한, 무능한, 경박한, 나쁜'과 같은 뜻을 함축했고, 더 나아가서 겸손은 비천한 형편과 억눌린 상황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 로마 문화권에서 '겸손'은 치욕적인 단어이지 결코 자유인이 추구할 가치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겸손이 높이 평가된 곳은 오직 성서뿐입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 모세를 성서는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다'(민 12,3)고 합니다.

솔로몬 왕이 성전 공사를 마쳤을 때, 주님이 밤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메뚜기를 시켜 땅을 황폐하게 하거나, 나의 백성 가운데 염병이 돌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이 스스로 겸손해져서, 기도하며 나를 찾고, 악한 길에서 떠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며, 그 땅을 다시 번영시켜 주겠다(역대지하 7,12-14). 한 나라 백성의 겸손은 죄의 용서와 땅의 번영을 가져옵니다.

유다 왕국의 종교개혁을 한 요시야 왕의 겸손한 회개는 나라에 내린 재앙조차 거두게 하였고(왕하 22,19-20), 시편의 시인은 '주님은 겸손한 사람을 공의로 인도하시며, 겸비한 사람에게는 당신의 뜻을 가르쳐 주시고'(시편 25,9), '겸손한 사람들이 오히려 땅을 차지할 것이며, 그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평화를 누릴 것이다'(시편 37,11)고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은 '교만한 사람에게는 수치가 따르지만, 겸손한 사람에게는 지혜가 따른다'(잠언 11,2), '사람이 오만하면 낮아질 것이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을 것이다'(잠언 29,23),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 22,4)고 증언합니다.

초대교회는 '본래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찬미했습니다(빌립보서 2,6-11). 빌립보서 2장 6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 '그리스도 찬가'로 알려진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쓴 내용이 아니라, 이전부터 초대 교회 안에서 성만찬, 혹은 세례예식, 예배 시간 중에 불린 찬양이었습니다. 빌립보서의 집필 시기를 주후 55년/56년경으로 생각한다면, 이 '그리스도 찬가'는 주후 55년 이전부터 초대 교회 안에서 공인된 그리스도론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 찬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를 낮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윤리적 명령이나 도덕적 모범으로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찬가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의 겸손의 찬가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도리 이전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낮춤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겸손은 구체적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벧전 5,5)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은 굴종과 비겁함, 눈치 보기와 외교적 전술에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은, 비천한 사람이건 부자이건, 교양 있는 사람이건 무식한 사람이건, 진보적이건 보수적이건,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이건 다른 사람이건, 모두 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도록 예정되었다는 인식에서 비롯됩니다(엡 1,4-6).

그러므로 겸손은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속으로는 비웃거나 경멸하면서도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은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은 겸손해야 할까요? 처세술이나 리더십의 방식으로서 겸손이 출세에 도움이 되거나, 조직이 잘 관리되고, 인간관계를 원활히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누가 6,27-28, 35)고 말씀하신 것은 그렇게 살면 하나님으로부터 큰 상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겸손은 어쩔 수 없이 하는, 눈치 보여서 하는, 안하면 손해볼까봐 하는 피동적이고 외교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겸손은 능동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행동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는(consider others better than yourselves/ achte einer den andern hoeher als sich selbst) 까닭은, 남을 존중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받기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높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이나 대가와 보상에 대한 기대에서 행하는 겸손은 그 칭찬과 대가와 보상이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상 때문에 겸손한 그리스도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고 믿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태도와 행동에 따라 이리 저리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들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 역사학 교수인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2011년 히브리어로 출간된 이래 30여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에서 7만년 동안 진화해온 호모 사피엔스, 주위 환경을 굴복시키고, 식량생산을 늘리고, 도시를 세우고, 제국을 건설하고, 널리 퍼진 교역망을 구축하여 명실상부 지구 행성의 주인이 된 호모 사피엔스가 과연 세상의 고통의 총량을 줄였는지 회의합니다. 기술과학의 빠른 발전으로 거의 신이 된 존재, 그러나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모르는 무책임한 신들, 이들이 호모 사피엔스라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안락함과 즐거움 이외에는 추구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윤리는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호모 사피엔스를 지배해 온 남성중심적이고, 유럽중심적인 휴머니즘, 아니 인간중심주의의 종말을 선언하고 '포스트 휴먼'시대의 가치를 모색하는 네델란드 유트레히트 대학의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 교수는 '윤리적 가치와 확대된 공동체 의식이 결합된, 공동협동적 도덕성(a collaborative morality), 생명(조에)에 중심을 둔 과정 존재론, 생명의 생기론적 평등주의'를 제시합니다. 난해하고 융합적인 이런 개념들을 간단히 한 마디로 말한다면, 저는 '겸손'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무한경쟁심과 신처럼 되려는 허영심이 결합하여 호모 사피엔스가 만든 이 세상은 7만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기근과 질병과 전쟁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심각한 기후변화와 생태계 파괴는 호모 사피엔스가 이룩해온 모든 낙관적 지표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멸종 가능성 앞에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남을, 자기보다 자연을 낫게 여기고 존중(consider, achten)하지 않으면, 호모 사피엔스는 새로운 인류에게, 그것이 호모 데우스(Homo Deus)가 될지 무엇이 될지 아직 모르지만, 지구를 맡기고 멸종할지 모릅니다.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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