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19세기 영국 기독교 민중 여성작가들"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 철학적 신학, 민중신학)

입력 Apr 17, 2017 06:58 AM KST

오정화, 『19세기 영국 여성작가와 기독교』(이화여대출판문화원, 2017) (2) 

오정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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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본지 논설주간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15,16세기의 종교개혁 운동이 서구 사회에 "근대화," 즉, 민주주의 시대정신, 학문의 자유와 종교사상의 자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신념을 가지게 했고, 성경을 모국어로 읽게 되면서 문학적 상상력이 활성화되었으며, 산업혁명시대에 들어서면서 노동의 중요성과 함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의 소외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 정치 경제적인 문제를 문학 작품에서 예리하게 다루게 되었다는 것을 명쾌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성 작가들을 통해서 19세기 영국 사회의 여성들의 자의식,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주체성, 그리고 독립성을 분명하게, 그리고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독교 신앙과 실천에서 기인했다는 교수님의 분석과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야 할 것은, 두 자매의 작품, 샬롯 브론테(Charlotte Brontë)의 『제인 에어』(Jane Eyre)나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ë)의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 등 두 작품 모두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가끔 제 아내가 이대 영문과 출신이어서 지나가는 이야기로 듣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이 작품들의 명성을 들으면서 "대단한 연애소설인가 보다. 한번 기회가 되면 읽어 봐야지"할 정도의 관심만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의 책을 통해서 이들 작품의 줄거리도 알게 되고, 당시 기독교와의 종교적, 정신적 관계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고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들 자매가 영국 성공회 목회자의 자녀로 성장하고 의미 있는 종교교육을 받았다는데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습니다. (저도 개신교 목사의 집안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일종의 동질감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놀란 것은 제인 에어의 성장하는 모습과 여정을 작가 샬롯 브론테의 동시대인 키르케고르(1813-1855)의 실존주의적 인간실존의 "3단계"로 설명한 것입니다. 제인이 기독교 선교사로 인도를 향해 떠나는 목사에 대한 윤리적인 "의무감"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사랑의 도약"(a leap of love)으로 보다 헌신적이고 어려운 삶을 선택하는 결단을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바치려고 하는 "믿음의 도약"(a leap of faith)과 연결시킨 것에 감탄하면서 설득력을 느꼈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실존주의자들의 일관된 깨달음은 인간 개인의 "단독자"로서의 실존이었습니다. 이 점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 사르트르가 가장 분명하게, 아니 극단적으로 말했습니다. "Man makes for himself." 인간은 스스로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신도 마귀도 어느 누구도 인간의 주체적, 독단적인 결정을 대신해줄 수 없을 뿐더러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했습니다. 인간 본질이 태어나기 전에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결정해 가면서 만들어 나간다고 갈파했던 것입니다. 이 실존주의적 "선택"의 개념으로 제인 에어의 실존적 선택과 함께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여성도 하나의 주체적인 독립된,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존재라는 것을 선언하고 선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실존적 차원을 키르케고르가 말한 인간 실존의 최고의 단계인 종교적 실존의 단계라고 교수님은 판단했습니다. 교수님의 분석을 따라가 보니, 언니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는 실존주의 소설이고 철학적 혹은 신학적 작품으로 평가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깊이가 있고 남녀의 사랑(eros)에서 우정(philos)으로 심화되고, 신적인 사랑(agape)으로 승화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 영국 감독이 한 말, "하나님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사랑, 우리 사이의 사랑의 관계 안에 살아 있다"고 한 말이 새삼스럽게 기억납니다.

샬롯의 동생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Wuthering Hights의 제목을 왜 우리말로 "폭풍의 언덕"이라고 했는지 흥미진진합니다. "폭풍"과 같은 신앙의 열정, 19세기 영국에서 부흥한 감리교인들의 신앙적 열정과 주인공 헤어튼의 폭풍 같은 사랑을 시사하려고 그렇게 번역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신앙 부흥운동에서 뿜어 나오는 영적 열정과 passion이라고 하는 종교적 정서를 잘 나타냈다고 생각됩니다. 이 소설이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갈등, 율법과 죄, 그리고 용서와 사랑에 대한 고민들에 직면하면서 인간적인 사랑으로 귀결하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결국 기독교 교리로서의 죄의식과 율법주의적이며 바리새적인 신앙과 윤리에서 벗어나 용서와 사랑으로 살아 나가야 한다는 "회심"을 보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제가 놀란 것은 여성작가의 당시 사회에 대한 관심입니다. 영국의 제국주의와 식민지 확장에서 발생한 식민지 인도인의 존재, 아니 주인공으로서, 이 소설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는데 놀랐습니다. 이민자 문제가 이미 19세기 대영제국의 사회적 문제로, 개인의 삶과 특히 여성들의 삶 속에 "문제"로 존재하는 과정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책에서 엘리자베스 개스켈(Elizabeth Gaskell)의 소설 『메리 버튼』(Mary Barton)을 소개하고 분석하면서 그가 유니테리언 교파 목사의 딸이었고 유니테리언 교회 교인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정통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3위일체론을 포기한 그야말로 급진적 자유주의 진보적 신학을 가진 교회라는 것을 잘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감리교나 다른 개혁교회가 열광주의적이고 감성에 호소하는데 반하여 냉철한 이성적 신앙을 강조하였기에 당시의 계몽주의적이며 이성주의적 지적 분위기에 적합한 교회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개스켈은 당시의 영국 산업혁명의 와중에서 노동자들의 문제, 특히 영국 북부 맨체스터 공업지대에서 중노동하는 노동자들의 문제에 직면하고 이를 외면하지도 피하지도 않고 정면으로 소설이라는 글씨기로 대응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시대정신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1848년의 "공산당 선언"이었습니다. 제가 놀란 것은 선생님이 개스켈의 생애를 소개하면서 "엘리자베스 개스켈은 엥겔스보다도 더 많이 맨체스터 노동자들의 고통을 목격했고... 자세히 보여 주었다"고 하셨습니다(203쪽). 그리하여 개스켈은 찰스 디킨스의 관심을 끌게 됐을 정도로 "프로 작가"였고 사회소설가 혹은 산업소설가로 유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르크스나 엥겔스를 따라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그 정도의 열정이었으면 공산주의 혁명의 대열에서 뛰든가, 이론가로서 두각을 나타낼 만한데 말입니다. 선생님의 책, 172쪽 각주에서 스타일러의 말을 빌려, 당시 중산층 작가들에게는 예수가 "사회주의자"로 그려졌다고 할 정도였다고 지적한 것은 이해가 갈만합니다. 이 장을 읽으면서 저는 우리 19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의 고도 경제발전과 산업화 드라이브 시대의 우리 공장노동자들, 특히 10대 여직공들의 노동현장을 기억하였습니다. 제가 기독교학과 학과장을 할 때 현영학 선생님이 기독교 사회윤리 강의시간에 한국의 노동현장의 문제를 논의하다가 학생들로 하여금 인천공업지대에 "위장취업"하여 한국의 산업화와 여성노동자의 문제를 실습하고 연구하도록 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선생님도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작가들 가운데 조세희 씨가 1978년 출간한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청소년 공장 노동자들의 문제는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봉제공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실자살을 목도하게 됩니다. 이로부터 서남동, 안병무, 현영학, 김용복, 서광선 등의 민중신학 운동이 전개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개스켈이 여성 작가로서 글쓰기와 말하기를 하나님이 맡기신 천직으로 여기고 사명감을 가지고 수행했다는 점입니다. "말하고 사랑하기를 통해 변화시키기를 희망하는 것"(199쪽), 이것이 개스켈의 작가로서의 소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녀가 받은 재능을 통해 약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강한 기독교 신앙"(199쪽)이야말로 여성 작가로서의 책임이며 천직으로 인식했다는데 감명을 받게 됩니다. 우리나라 여성작가들 가운데 천주교인인 박완서 씨나 공지영 씨, 그리고 최근에 한강 씨의 작품을 통해서 여성작가의 사회의식이나 정치적 관심을 기독교 신앙의 틀 안에서 표현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싶어졌습니다.

오정화 선생님의 책에서 다룬 19세기 영국의 여성작가 4명 중 마지막으로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이라는 남성 필명을 가진 메리 앤 에반스(Mary Ann Evans) 이야기에 깊은 관심과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의 철학적, 신학적 연구 및 번역 작업에 놀랐습니다. 특히 번역가로서 당대의 신학자 데이빗 스트라우스(David Strauss)의 저명한 역사적 예수 연구인 『예수의 생애』(The Life of Jesus, Critically Examined)를 번역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20세기의 신약성서신학자로 유명한 불트만(Rudolf Bultmann)이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의 문제를 신학적 문제로 제기하게 된 계기를 만든 획기적인 스트라우스의 저서는 서구 기독교 신학계에 "자유주의 신학"에의 "대문"(大門)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더 나아가 포이어바흐 (Ludwig Andreas von Feuerbach)의 『기독교의 본질』(Essence of Christianity)을 번역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게 됩니다. 19세기 계몽주의와 이성주의와 과학적 합리주의가 기독교 신학을 근본부터 흔들어 놓은, 그야말로 기독교의 신을 거꾸로 세우는 인본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의 최첨단 저서에 엘리엇이 관심을 가지고 영어 세계에 소개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는 선포야 말로 19세기 기독교 신학에 대한 "직격탄"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배우면서 제일 충격적인 책들을 에반스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번역 출판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부족했던 것처럼, 그는 스피노자의 저 유명한 책 『윤리학』(Ethics)을 번역하면서 "자연과 함께하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범재신론(凡在神論, panentheism)을 소개하고 심취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당대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신학자들과 철학사상에 심취했던 작가의 작품은 그 내용에 있어서나 필치에 있어서 급진적이고 자유롭고 창의적이었을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저는 특히 선생님이 언급한 대로, "... 그녀의 소설은 그녀의 철학과 윤리학의 핵심인 '공감'(sympathy)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소설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210쪽)고 그의 작품세계를 평가한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결국 엘리엇의 작품은 "철학적 소설," "철학이 있는 문학," 아니면 "신학이 있는 문학"이었다고 평가해도 될 것 같습니다. "윤리의 출발점은 바로 이웃, 혹은 타자(他者)의 "마음 상태를 상상하는 능력으로부터"(210쪽)라고 깨달았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야말로 윤리와 도덕의 출발점이며 필수조건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이야기를 떠 올리게 됩니다. 이웃과 타인의 고통에 측은함을 느끼고 함께 아파할 때,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도덕적 행동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은 가슴에서부터 온다는 말,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감정, 측은지심, 공감, 동감, 영어로 sympathy, empathy, 아니면 compassion 등의 표현 모두를 동원한 "느낌"으로부터 윤리적 실천과 행동이 나온다는 것에 동감하게 됩니다.

선생님의 엘리엇에 대한 평론을 읽으면서 호지슨(Peter C. Hodgson) 교수를 인용한 데 반가웠습니다. 왜냐면, 호지슨 교수는 제가 박사학위를 위해서 미국 남부 내쉬빌에 소재한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저의 지도교수 중 한 분이었습니다. 벌써 50년 전 이야기입니다만, 당시만 해도 호지슨 교수는 아주 딱딱한 칼 바르트(Karl Barth) 신학에 심취해 있던 분인데, 이제 70이 넘으면서 문학작품에 대한 신학적 고찰을 했다는데 놀란 것입니다. 특히 그가 한 말 "엘리엇의 첫 소설과 마지막 소설에서 종교는 핵심 주제이고, 다른 모든 작품들에서도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212쪽)에 선생님도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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