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설교] 많은 일과 좋은 몫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여호수아 1장 1-9절, 누가복음 10장 38-42절

[장로 권사 임직 예배를 앞두고]

hanmoonduk_01
(Photo : ⓒ 김진한 기자)
▲생명사랑교회 한문덕 목사

2017년 새해를 엊그제 맞이한 것 같은데, 벌써 오월이 되었고, 그것도 벌써 셋째 주입니다. 시편 저자는 우리의 인생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마치 날아가는 것 같다고 말하고 있는데(90편 10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올해 초에 1년의 목회일정을 살펴보면서 한참 남아있다고 생각했던 장로 권사 임직 예배가 한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 유치부 어린이가 성인이 되어 먼 훗날 생명사랑교회 60년사와 같은 책을 쓸 때, 교회 창립, 담임목사 취임, 장로와 권사의 임직 등은 매우 중요하게 다뤄질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평신도 중심의 사역"이라는 표어를 대내외적으로 표방하고 있지만,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훌륭한 지도력을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생명교회를 떠나 첫 예배를 드린 2012년 8월 5일, 새롭게 생긴 공동체가 한국기독교장로회에 가입하여 생명사랑교회라는 이름으로 설립공인예배를 드린 2013년 12월 15일, 김학로 장로를 세워 당회를 구성하고, 조직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춘 2014년 12월 14일, 그동안 설교목사로 애써 주신 강영선 목사와 김번영 목사께 감사하며 생명사랑교회 첫 담임목사를 세운 2015년 11월 22일!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차근차근 한 걸음씩 매년 중요한 기초들을 놓아 왔습니다. 2016년 한 해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쳐 올해는 장로 두 분과 권사 다섯 분을 새로 세우게 되고, 언제나 자리를 지켜 주시며 존재만으로도 감사드릴 세 분 집사님을 명예권사로 추대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라면 취임과 임직 예식은 늘 있기 마련이지만, 이제 막 다섯 살이 되어 여리고 여전히 어린 생명사랑공동체가 두 번째로 장로와 권사 임직을 하게 되는 것은 생명사랑교회가 뿌리를 내리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동양의 스승이라 불리는 공자가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서른이 되어서야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스스로 설 수 있었다고 하는데, 새로 생겨난 교회공동체도 안팎의 풍파를 견디며 흔들리지 않으려면 한 30년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이곳으로 부르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명사랑교회에서 목회를 마치고 은퇴를 한다면 아마 그 기간이 생명사랑교회로서는 30년의 역사가 될 것이고, 그 정도 지나면, 우리 공동체가 어떤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 굳건한 반석에 서 있는 공동체로 우뚝 서 있게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5월 10일과 17일 권사로 임직 받으시는 다섯 분과 함께 신앙여정을 나누고, 직분자로서의 자세와 역할,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지향점 등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다섯 분들에게 권사가 되면 무엇을 하고 싶으시냐고 제가 여쭈었는데, 모든 분이 한편으로는 쑥스러워 하시면서도 권사임직이 자신의 신앙을 한층 더 성숙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 아니라 우리 신앙공동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시겠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임직자 교육을 하면서 저 또한 다시 한 번 목회자로서의 저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취임할 때 했던 말들도 다시 읽고, 지금 제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도 되돌아보고, 생명사랑교회가 천명한 "작으나 건강한 교회," "평신도 중심의 사역," "선교 사명에 충실한 교회"라는 세 가지 목표를 향해 제대로 가고 있는가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사도 전통을 계승한 목사가 제일 중요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해야 하는 것은 말씀의 선포와 기도입니다. 목회자는 이 두 가지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에 깊이 몰두하기만 해도 목회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매우 부족합니다. 그러나 우리교회의 형편상 제가 그렇게만 할 수는 없습니다. 예배와 교육, 교회와 세상에 대한 봉사와 교인들 간의 친교, 심방과 상담, 노회/총회와의 관계 속에서 지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들, 행정과 교회의 부흥을 위한 전도 등! 작은 교회는 작은 대로, 큰 교회는 큰 대로 목회자가 감당해야 할 일들이 곳곳에 산적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것은 목사는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에 전무하고, 나머지 모든 교회의 역할은 온 교우가 골고루 나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모두가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려면 그 사역에 대해 배우고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기에 훈련된 제자들이 충분히 있기 전까지는 여전히 목사가 담당해야 하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가 새로 직분자를 세우는 것은 온 교회가 함께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거나 불필요한 잡음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는 늘 활동적이고, 많은 일들을 해냅니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온 성도들이 합심하여 한 마음이 되고, 각자 자신이 맡은 책임을 다합니다.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기쁨으로 하고, 보람을 느낍니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은 하다보면 근심과 염려를 일으키고, 스트레스를 받고, 불평과 불만도 생깁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에서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에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함께 등장하는 것은 여기 누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에서 나사로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11장)와 베다니에서 잔치가 벌어졌을 때(12장)뿐입니다. 두 자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이야기가 극히 제한되어 있어서 실제로 이 둘의 삶이 어떠했는지 모릅니다만, 요한복음에 따르면 분명 예수님은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가족과 매우 친밀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를 잘 모르는 독자가 만약에 누가복음서의 오늘 본문을 읽었다면 여러 가지 점에서 놀라게 됩니다. 우선 젊은 여자가 자기의 집에 낯선 남자를 초대한다는 것이 당대의 풍습에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사실은 거리끼는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마리아처럼 한 여자가 한 선생의 발 가까이에 앉아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은 전형적인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인데, 당시에 여자를 학생으로 받아들이는 랍비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5절밖에 되지 않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해 볼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역시 핵심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보인 행동과 말에 대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한마디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또 이 이야기를 가지고 많은 분들이 교회의 일보다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하나님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 걸까요? 다음 주에 임직식이 있기에 교회는 예배를 준비하고, 음식도 마련하고, 교회와 식당으로 손님들을 안내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몇몇 집사님들과 권사님들이 바쁘고 분주하게 일을 하는 동안 누군가는 하나님 말씀이 중요하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예배에 참석한다면 어떨까요? 그것이 정말 잘하는 것일까요? 교회에는 많은 일이 있는데, 그 중에 좋은 몫은 정말 따로 있는 것일까요?

[마르다의 실수]

오늘 본문과 요한복음서를 통해서 볼 때 마르다는 매우 자발적이며 솔선수범해서 일을 주도하는 스타일의 사람으로 보입니다. 마르다의 부모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맏딸로서 집안일들을 도맡아 해 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분명 나사로라는 오빠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대하고 손수 음식을 마련하고 접대하는 것을 보면 더욱더 그럴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도 보면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그 때도 마르다는 옆에서 음식을 만들고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매우 높이 평가합니다. 번드르르한 말만 하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 몸소 행하는 사람이 훨씬 낫습니다. 교회에서도 일을 해 보면 말로는 뭐든지 하는데, 실제로는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덕이 되지 않고, 도리어 말 때문에 상처만 주고받는 경우가 생깁니다. 먼저 행하고 그 행위 뒤에 말이 따라오도록 해야 하는 법인데, 말이 앞서면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자신을 초대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마르다에게 지적한 것이 대접하는 일 자체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라고 하셨을 때 "많은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의 일을 하면서 동시에 마리아가 하는 일까지도 신경을 쓰면서 참견한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마리아와 예수님을 판단하고 비난한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모시기로 마음먹고 최선을 다해서 자기가 준비한 것으로 온전히 예수님께 드렸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르다의 말투와 행동을 보면 첫째 동생 마리아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녹아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은 부엌에서 일을 하는데 동생은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을 독차지하고 앉아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화가 납니다. 자신은 일하는 종으로 느껴지고 마리아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생각됩니다. 만약 마르다가 겸손한 사람이고, 질투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리고 정말로 마리아의 도움이 필요했다면 예수님께 좀 더 공손하게 말을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제가 음식 준비를 하는데 손길이 필요합니다. 죄송하지만 잠시 마리아가 저를 도울 수 있도록 해주실 수 있을까요?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다 같이 식사를 한 뒤 저도 주님의 말씀을 마리아와 함께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르다는 공손한 부탁 대신 비난이 섞인 말투로 예수님께 지시와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 마르다는 예수님께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명령을 내리고 지시를 하는 것은 바로 마르다입니다.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주인이 되고 예수님이 종이 됩니다. 분명 마르다는 맨 처음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셨을 때, 매우 기쁘고 설레고 행복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잘하는 음식으로 예수님께 대접하면, 예수님께서 맛있게 드셨을 것이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무척이나 행복할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요?

교회의 목사나 장로, 권사나 집사, 제직회장이나 목회운영위원장, 구역장이나 부서장, 또는 신도회 임원 등 책임 있는 자리에 가면 그에 따른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때론 그 일이 힘에 부칠 때도 있습니다. 처음 그 일을 감당하기로 했을 때는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다보면 어느새 자기가 모든 것을 혼자 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자신은 이렇게 헌신을 하는데, 왜 다른 이들은 저렇게 교회에 대한 애정도 없고, 주님의 일에 열심도 내지 않고 뺀질대는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바로 이 지점부터 많은 일이 발생합니다.

즉, 원래 자신이 감당한 사역이 많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는 일 외에 남들에게 참견하고, 지시하고, 나와 남을 비교하고, 그것 때문에 불평불만이 생기게 되는 등 많은 일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마르다에게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라고 조언해 주신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고 봐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내게 주어지고 맡겨진 일, 그 하나를 하나님 앞에서 잘 감당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다가 다른 사람의 일이나 모습이 내 눈에 보이면서 갑자기 내 마음이 요동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이런데 저 사람은 왜 저런가? 우리가 주의해야 할 마음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넘어서 남에게 간섭하고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예수님이 마리아를 언급하면서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하였고 그것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마르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좋은 몫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처음 마르다가 택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당시에 풍습에 어긋나더라도, 이웃들이 뭐라고 궁시렁대고 흉을 보더라도, 외간남자를 불러들인다는 소문을 감수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집으로 모신 것입니다. 그 마음을 올곧게 지켰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와 자기를 비교하는 순간, 그 마음이 흔들렸고 많은 생각이 마음속에서 솟아났습니다. 그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자 이제 예수님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는 일보다는 마리아가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 더 신경이 쓰입니다. 마리아가 얄미워집니다. 게다가 그런 상황을 보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께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종처럼 대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각하고 차분히 살펴보시면 장면이 매우 폭넓게 잡혀 있다가 한 곳으로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시골길을 가시는 예수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다가 한 마을로 들어서고, 이제 마르다의 집 안으로 들어갑니다. 카메라는 최종적으로 주님의 발치에 머뭅니다. 거기에는 말씀을 듣는 마리아가 있습니다. 한편, 마르다의 마음은 분산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초청하는 것에만 온전히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 시중드는 일을 합니다. 그러다가 마리아가 택한 몫에 눈이 돌아갑니다. 질투가 생기고 동생과 예수님의 하고 있는 일에 참견합니다. 비난하고 지시합니다. 마음이 분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마리아처럼 와서 내 말을 들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또 마리아에게도 마르다를 도우라고 말하시지도 않습니다. 각자가 택한 것을 존중해 주십니다. 마르다가 택한 것도 좋은 몫이었다는 것입니다. 섬기고 시중드는 일이야말로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궁극적 근원에서 이탈하지 말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마르다나 마리아가 둘 다 공통적으로 택한 좋은 몫은 무엇이었나요? 바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접할 것을 택했고,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을 택했습니다. 둘 다 예수 그리스도를 택했다는 것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왜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합니까?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일들을 하다보면 이 일을 왜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일 중독자처럼 일을 하거나, 일을 하면서 불평과 불만, 염려와 근심에 휘둘리게 되기도 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궁극적 근원에서 이탈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공동체를 위해 많은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일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깊이 뿌리 내린 일들이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행동은 모두 말씀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자기 욕심이나 과시,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나와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깊이 뿌리 내리지 않으면 교회에 헌신할 마음도 없어지고, 이웃을 사랑할 마음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기회도 없어집니다. 동시에 주님께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행동과 헌신이 근심과 염려, 불평과 스트레스가 되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또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쉼과 기도]

오늘 누가복음서의 본문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사이에 위치합니다. 앞부분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고난당하는 사람을 찾아 그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즉,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뒷부분은 기도하신 예수님을 따라 때로 일을 멈추고 조용히 기도할 것을 요청합니다. 즉, 우리가 좋은 몫을 택하는 것은 행동과 기도가 균형을 잡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여호수아가 주님이 허락하신 땅 가나안에 안착하고 거기에서 성공하려면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치우치면 안 된다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믿는 대로 행하고, 행하면서 믿음을 돌아보는 일 모두가 중요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됩니다. 어디를 가든지 성공하려면 모든 율법을 잘 알아서 지켜야 합니다. 즉,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여야 합니다.

제가 2016년 1월 31일 설교에서 정용철 님의 "지금은 쉴 때입니다"라는 글을 읽어 드렸는데, 오늘 한 번 더 읽어 드리려고 합니다.

방글방글 웃고 있는 아기를 보고도

마음이 밝아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을 비추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하루가 궁금하지 않고

전화도 기다려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고

'바쁘다'는 말만 하고 끊었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도 소리만 들릴 뿐

마음에 감동이 흐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이 나오지 않고

슬픈 연속극을 보면서

각본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다가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고도

궁금해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친구가 보낸 편지를 받고 그것을 끝까지 읽지 않거나

답장을 하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한 번 더 뒤돌아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침과 저녁이 같고, 맑은 날과 비 오는 날도 같고,

산이나 바다에서 똑같은 느낌을 받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당신은 그동안 참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 한 가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쉬는 일입니다.

정용철 님은 쉬라고 말하고 있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많은 일들이 즐거움이 아니라 무거운 짐으로 느껴진다면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때입니다. 말씀으로 되돌아 갈 때입니다.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마십시오. 크게 용기를 내십시오. 많은 일들로 늘 분주하더라도 언제나 좋은 몫을 놓지 않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우리가 땅만을 바라보며 살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눈을 들어 저 높은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에만 골몰하지 않게 하소서. 도리어 깊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침묵 가운데서 오히려 똑똑히 말씀하시는 당신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자신이 선택한 좋은 몫에 충실한 일꾼 되게 하소서. 각자가 받은 소명에 최선을 다할 때, 우리 공동체가 우뚝 선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여 주소서. 언제나 우리에게 사랑과 은총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10

이인기 ihnklee@veritas.kr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7] 중세교회 대중들의 신앙생활

중세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스콜라주의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콜라주의 문헌들은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것을 읽거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6] 중세 신학의 대략적 지도: 서방의 '스콜라 신학'과 동방의 '비잔틴 신학'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