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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밭 칼럼] 종교개혁500년, 개신교가 잃어버린 것 3가지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입력 Jun 06, 2017 11:26 AM KST

종교개혁 500년,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동시에 성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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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숨밭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금년(2017)은 종교개혁 500주년의 뜻깊은 해가 되어서 한국 기독교계에서 여러가지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행사의 하나로서 율겐 몰트만 교수의 한국방문 특강과 도올 김용옥 박사의 논찬은 뜻깊은 학술강연회였다. 몰트만 교수의 강연제목은 <미완의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의 초기 개혁정신 속에 있었으나 아직 온전히 성취되지 못한 채 있는 미진한 것, 역사적 상황 때문에 오늘에 보면 부족한 점, 그리고 오해된 점을 찬찬히 성찰하여 보다 올바른 종교개혁정신을 살려나가자는 의도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내는 우리들의 발상법엔 3가지 태도가 가능하다. 첫째, 개신교 안에서도 루터파의 루터교회, 칼빈파의 장로교회, 재세례파 교회 등등 그리고 조금 훗날 발전해간 감리교나 침례교나 성결교 입장에서 교파의 본래 뿌리정신을 밝히고 오늘을 성찰하는 입장이다. 둘째, 그리스도교의 다른 큰 나뭇가지들 즉 로마가톨릭교회나 동방정교회와 개신교를 비교하여 개신교의 자기정체성을 돌아보는 입장이다. 셋째, 개신교 울타리 밖으로 나와서 지구촌의 다양한 문화와 종교들을 염두에 두고 개신교를 거시적으로 성찰하는 총체점검의 입장이 있다. 필자는 3번째 입장이 필요한 때라고 본다.

20세기 개신교 신학자 거성중 한분이었던 폴 틸리히는 "우리는 종교개혁을 통해서 얻은 점도 많지만 잃은 점도 많았다"고 술회하였다. 위르겐 몰트만도 강연에서 지적하기를 "종교개혁운동은 서구의 라틴 교회에서만 일어났고, 신성로마제국의 환경과 조건아래서 진행되었고, 기존의 기독교의 믿음개혁운동이었지 지구촌 미래의 선교개혁운동은 아니었다"라고 새삼스럽게 종교개혁운동의 역사적-문화적-정치사회사적 한계성과 상대성을 지적하였다. 필자는 우리가 종교개혁운동을 통해서 얻은 위대한 점들, 예들면 성서권위의 재발견, 은총의 복음의 재강조, 십자가신학의 회복, 평신도의 만인사제직, 노동의 신성성, 크리스천의 진정한 자유 등을 굳게 붙잡아야 하겠다. 그러나, 잃어버린 3가지를 다시 되찾는 일이 보다 더 시급하게 되었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고 본다.

한 거룩한 보편적 공교회(公敎會)를 잃어버리고 교파교회나 개별교회만 남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도리어 당시 교황청 중심의 병든 교회를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로서 회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과로서 500년이 지난 지금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공교회는 신학 교리상으로만 존재한다. 성서해석과 성만찬 견해차이, 지역과 전통의 영향차이, 민족성과 은혜체험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교파가 형성되었다. 교파 형성은 복음의 다양성 강조라는 점에서 관용할 수 있다. 그러나, 500년 동안 근대 서구사회가 자본주의적 개인주의 사회로 변모해가면서 '거룩한 보편적 공교회'는 자본주의적 생리에 함몰되었다. 개교회주의(個敎會主義)가 득세하게 되었다.

노골적으로 약육강식의 시장원리가 거룩한 하늘기관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교회는 재벌급 대기업체와 중소기업체의 독자경영방식을 닮아갔다.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단점을 메꿔보려 하지만 한계가 있고, 헌금 중 일부를 선교비와 복지사업비로 사용한다 해도 '거룩한 주님의 몸'을 상해하고 찢어놓은 대죄를 용서받기 어렵다. '거룩한 보편적 교회의 회복'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개신교의 일차적 과제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심성에 믿음을 잃고 원죄론에 물든 신학적 인간학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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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지유석 기자)
▲지난 1일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있었던 위르겐 몰트만 박사 특강엔 도올 김용옥 박사가 논찬자로 참여했다. 그는 "이 세계는 하나님 나라의 대기실이 아니라, 이 땅에 임재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건축작업장이다"라고 발언했다.

종교개혁 500년 동안 개신교가 잃어버린 것의 둘째로 심각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중세기의 공로신앙을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용서와 사랑으로 구원받는다는 신앙원리가 지나쳐서 인간 무능론으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많은 치유능력을 베푸신 후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격려했고 제자들과 청중들에게 "너희도 나와 같은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격려하셨다. 교만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마음이 돌덩이처럼 차갑게 굳어져버린 직업종교인들에겐 가차 없는 비판을 가했지만, 갈릴리 민초들에게 격려와 본연지성의 발휘를 독려하셨다. "하늘 천부께서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성서 전체를 큰 눈으로 살펴보면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끝까지 믿으시고 당신의 창조세계 구원사업에 동참시키려 하신다. 아브라함 요슈아 헤셸(1907-1972) 말을 빌리면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는 책이다. 찾을 뿐 아니라, 거대한 물신숭배와 거대조직과 권력구조에 주눅 들어 왜소해지고 영혼의 숭고함과 거룩함을 잃어버린 인간을 독려하신다. 두려워말고 함께 일하자. 내가 너를 붙들어주겠다. 결코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겠다. 그러나, 어거스틴 이후로 종교개혁신학과 현대신학 마저도 인간성을 폄훼하고 죄로 물든 몹쓸 피조물로 비하시켜 버렸다. 인간은 연약하고 죄짓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사람 마음 속에 심어놓으신 신성의 씨앗과 불꽃, 진선미를 찾아 추구하려는 그 착한 마음은 말살되지 않는다. 그 점을 긍정하고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창조세계에 넘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잃고 원자재 채굴지와 종말대기실로 변모시켰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나면서 총체점검의 마지막 사항은 세계와 세상을 보는 눈에 관한 것이다. 이번에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한 몰트만의 특강에 논찬자로서 봉사한 도올 김용옥은 몰트만의 종말론적 희망의 신학을 압축하여 다음 같은 말로서 갈파했다: "이 세계는 하나님 나라의 대기실이 아니라, 이 땅에 임재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건축작업장이다." 피부에 와닿는 너무나 적절한 은유화법이다. 그리고 몰트만 견해에 동감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세계와 삶과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정치에 있다고 본다"고 명료하게 말했다.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 이후 500년 동안 세계사 특히 유럽역사는 근대산업사회로 변모하였고 공업화, 산업화, 정보화를 거치면서 지구를 자원개발의 원천지로 삼았다. 금광, 우라늄광산, 원유 저장지를 찾아 대지를 파헤쳤고 밀림을 커피와 목화생산 농장으로 변모시켜 갔다. 그 결과, 오늘의 기후붕괴, 자연파괴, 생태계파괴를 응보의 법칙에 따라 인류가 받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안다. 개신교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생태학적 신학, 여성신학 등을 발전시키고 있지만, 대체로 보아서 개신교는 지구라고 부르는 고정된 '무대장치'위에 펼쳐 진행되는 구원사에 관심을 집중시켰고 '자연신학'은 인정되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영광'이 스며들어 빛을 내면서 '진화적 창조'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솜씨를 눈여겨봐야 한다. 하나님은 농부이시며 건축장의 대목수이시다. 역사로서의 세상은 카인과 아벨의 맞씨름 장이요, 예수를 골고다에 못 박은 세상이다. 그러나, 인간의 악한 반역에도 불구하고 선함과 아름다움과 새로움과 정의로움을 증진시켜 가시는 하나님의 자연신학을 회복해야 한다. 개신교라는 역사적 울타리와 동굴을 벗어나 500살 종교개혁을 개혁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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