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장윤재 목사 (이화여대 대학교회)

입력 Jul 13, 2017 05:22 AM KST

시편 51:1-5, 로마서 7:19-25, 누가복음 11:2-4

"죄"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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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

<J.J.> 현대사회에서 '죄'라는 개념은 모호하게 느껴질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진보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나아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죄'는 기독교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죄라는 개념은 기독교가 처음 만들어 낸 것은 아닙니다. '죄의식'(guilty awareness)은 고대로부터 인간의 삶 안에 깊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터부'(taboo)라는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것을 금기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인간이 특정한 것에 대해 '죄의식'을 가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죄는 이러한 '죄의식'이 아닙니다. 그런 죄의식은 정신분석학자들이 더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서에는 3가지의 죄 개념이,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서에는 1가지의 죄 개념이 등장합니다.

구약성서의 죄 개념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첫 번째 죄의 개념은 '아온'(aon)입니다. 이것의 뜻은 '비뚤어짐'(crookedness)입니다. 사람의 얼굴이나 팔다리가 비뚤어진 것처럼, 마음이 비뚤어져(distorted) 부정직한(dishonest)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 어떤 사람입니까? A를 A로 받아들이지 않고, B를 B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A를 B라 하고, B를 A라 합니다. 게다가 자신이 틀렸음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습니다. 부정직하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아온'이라는 말에 자기학대(self-abuse)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마음이 비뚤어져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 '아온'입니다. 그렇다면 '아온'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자신과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가 파괴된 것, 그것이 죄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그것이 구약성서가 말하는 첫 번째의 죄입니다.

둘째로 '핫타아트'(chata'ah)라는 말이 있습니다. 반사회적 행동을 가리킵니다. 남의 것을 훔친다든지, 남을 죽인다든지 하는 반윤리적이고 반도덕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범죄(crime)와 가깝습니다. 이는 잘 알려진 부분이기에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요점은 이 '핫타아트'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의 문제에 주목한다는 점입니다. '아온'이 자신과 자신간의 관계의 문제에 주목한다면, '핫타아트'는 자신과 타인과의 올바른 관계가 파괴된 것을 죄의 문제로 인식한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페샤'(pesha)입니다. 가장 거룩하신 분, 즉 하나님에 대한 반란을 지칭할 때 쓰였습니다. 한마디로 '페샤'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수직적 관계를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파괴된 것, 그것이 구약성서가 말하는 죄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통상 이 세 번째의 것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구약성서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세 가지 모두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죄의 개념에서 핵심은 '관계의 파괴'입니다. 나와 나 사이의 올바른 관계, 나와 이웃 사이의 올바른 관계, 그리고 나/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파괴되어 비뚤어진 것, 그것이 바로 구약성서가 말하는 죄입니다. 달리 말하면, 구약성서가 말하는 죄는 자신에 대한 학대, 이웃에 대한 불의,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며, 또 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사실 기독교가 발전시킨 '원죄'(original sin)라는 교리 역시 올바로 이해하면 '관계성의 파괴'라는 문제입니다. 창세기 2-3장에는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아담에게 동산의 각종 나무 열매는 맘대로 먹게 하셨으나,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이 나타나 이렇게 유혹합니다. 유혹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들어보십시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창 3:5). 유혹의 요체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라'는 것입니다. 신이 되어보라는 것입니다. 이는 본래 인간이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로 지어졌으며 따라서 창조주와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그리고 다른 동료 피조물들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근원적으로 거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성을 부정하고 자연 위에 신처럼 군림하겠다는 것, 그것이 원죄입니다. 첫 번째의 죄이고 모든 죄들의 원형(archtype)입니다.

구약성서가 말하는 '아온,' '핫타아트,' 그리고 '페샤,' 이 세 가지의 죄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의 관계 파괴는 각각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학대하는 사람이 가족과 그리고 이웃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가질리 없습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질리 만무합니다. 그리고 신에게 반역하는 사람이 이웃과 또 자기 자신과 평화를 이룰 리가 절대 없습니다.

신약성서의 죄 개념

신약으로 넘어가보겠습니다. 그리스어로 쓰인 신약성서에서 죄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 hamartia)입니다. '표적에서 빗나감,' 혹은 '길에서 일탈함'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서가 관계성을 강조한다면 신약성서는 목표를 강조합니다. 무슨 목표, 어떤 표적에서 빗나가고 일탈했다는 말일까요? 신약성서의 대전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자아와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새로운 새 삶이라는 표적에서 빗나간 것, 그 생명의 새로운 길에서 일탈한 것, 바로 그것을 신약성서는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자아와 새로운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이 말하는 것처럼, "그런즉 누구든지 [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빗나간 것이 죄입니다.

이처럼 성서가 말하는 죄는 단순히 윤리적 · 도덕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이고 관계론적이며 존재론적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한 인간의 내면의 올바른 관계가 파괴되어 나타난 '결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서가 말하는 이러한 죄 개념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다고 잘못된 죄의식에 시달리기도 하며 때론 심지어 남을 함부로 정죄하는 오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잘못된 죄 개념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 세 가지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로 죄를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문제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둘째로 죄를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회개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죄를 소극적인 측면으로만 축소하는 것입니다.

먼저 죄를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문제로만 보는 문제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51편의 4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Against you, you alone, have I sinned).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경건한 고백인 것처럼 들립니다. 하나님 앞에 철저히 죄를 자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오직 주님께만"(you alone)이라는 구절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다윗은 지금 자신이 하나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죄책고백이 우리아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은 다음에 행한 죄의 고백임을 상기해보십시오. 지금 다윗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만 강조함으로써 자신이 지은 죄의 수평적인 면, 사회적인 면, 이웃과의 관계를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다윗의 착각'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죄를 성서가 말하는 대로 통전적으로 보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로만 축소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경건한 것처럼 보이지만 고립된 이기적인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두 번째 잘못된 경향, 즉 죄를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만 축소시키는 경향을 낳습니다. 오늘 읽은 교독문(이사야 58장)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금식은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고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피해 스스로 숨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나 예배가 아닙니다. 이웃과의 비뚤어진 관계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수직적인 관계의 개선만을 추구하는 것은 성서가 말하는 참된 죄의 고백과 회개가 아닙니다. 2007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 우리에게 바로 이 문제를 심각히 고발하고 있습니다.

배우 전도연씨와 송강호씨가 열연한 작품이지요. 자신의 아이를 납치하여 살해한 유괴범을 아이의 엄마는 기독교인이 되어 사랑으로 용서하리라 다짐하고 어렵게 면회를 갑니다. 그런데 면회 나온 죄수는 교회 다니기 시작했다는 이 엄마의 말을 듣고 자신도 감옥 안에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이미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죄를 다 용서받았다고 말합니다. 희생자의 어머니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신의 죄가 하나님께 다 용서를 받았다고 너무도 평안하고 감사한 얼굴로 말합니다. 엄마는 절망합니다. 절규합니다. 그리고 그런 식의 용서를 베푼 신에게 저항합니다. 영화 '밀양'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는 무시하고 신과의 수직적 관계만 중시하는 비뚤어진 신앙을 고발한 영화입니다.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신 앞에 고발한 영화입니다.

사실 이런 신앙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백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노예제도를 합리화했습니다. 과거 미국에서 노예를 소유했던 백인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주일날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사후에 하늘에서만 있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흑인 여성 신학자 켈리 브라운 더글라스(Kelly Brown Douglas)는 이런 백인 노예주인들이 가진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이 거의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구원이 보장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은 아무런 종교적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마음대로 노예를 부리고, 학대하고, 사고팔고, 또 죽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은혜는, 히틀러의 폭정에 끝까지 저항했던 독일의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의 말처럼, '값싼 은혜'(cheap grace)에 불과합니다. 싸구려 은혜라는 말이지요.

이러한 잘못된 역사에 대한 반성으로 오늘날 흑인신학자들, 여성신학자들, 생태신학자들, 그리고 제3세계의 신학자들은 개인적 차원의 죄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죄'(structural sin)를 교회가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흑인신학자들은 '인종차별주의'(racism)가 죄라고 말합니다. 여성신학자들은 '성차별주의'(sexism)가 죄라고 말합니다. 생태신학자들은 인간이라는 한 생물 종(種)의 이익을 위해 다른 종의 생명과 권리를 박탈하는 '종차별주의'(species-ism)가 죄라고 말합니다. 죄는 이렇게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집합적이고 사회적인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오늘 읽은 복음서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누가복음 11:4).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한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그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포하셨을 때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고발하기도 했습니다(마가복음 2:1-12).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보통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 것 같이,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에는 인간 사이의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죄 용서의 순서가 도치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이 어순의 도치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예수님의 강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먼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거라는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선행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용서의 기적'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죄를 용서하는 종교입니다. 용서함으로 화해의 기적을 일으키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신의 특권'이던 용서를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로 바꾸어주시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신의 특권'으로의 초대, 이보다 더 놀랍고 감동적인 초대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정호승 시인의 한 글을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정 시인은 저의 고교 은사이십니다. 나중에 이렇게 큰 시인이 되실 줄은 그때 몰랐습니다. 제목은 '슬픔이 기쁨에게'입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위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하지 말아야 하는 죄," "하지 않은 죄"

마지막 셋째로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 그릇된 이해를 하는 것은 죄를 소극적인 측면으로만 축소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유교적 전통과 혼합되어 무엇을 하지 말라고 금지한 것을 어긴 것만을 죄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등, 하지 말라고 한 어떤 계명을 어긴 것만 죄라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는 금지의 종교, 터부의 종교, 부정의 종교로 비춰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는 자칫 예수께서 그렇게 우려하셨던 바리새인들의 율법적인 종교와 자기 의인화를 낳기 쉬운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았느냐'에 의해서보다 '무엇을 하였느냐'에 의해 우리를 심판하신다고 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 기사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그리고 옥에 갇혔을 때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보듯이, 강도 만난 사람 곁을 그냥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실 나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둑질을 한 적도, 남을 때려눕힌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강도 만난 사람 곁을 그냥 지나간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무엇을 안 한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그의 저서 『희망의 신학』의 한 구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가 행하는 악이 아니라 그가 행하지 않는 선이며, 그의 악행이 아니라 그의 태만이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매주 사도신경을 외우며 고백하는 것처럼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까? 먼저 성서가 말하는 죄에 대해 깊고 온전한 이해를 갖추시길 기도합니다. 나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학대하는 것이 죄입니다. 이웃을 외면하고 돌보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에게서 떠나는 것이 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에게 약속하신 새 창조와 생명의 길에서 일탈해 벗어나는 것이 죄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 자신과, 이웃과 그리고 하나님과의 깊고 바르고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가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로운 자아와 새로운 공동체를 향해 똑바로 힘차게 걸어가십시오. 그것이 죄를 이기는 길입니다. 그것이 무거운 죄짐 속에서 사망으로 향하는 이 세상 속에서 생명의 복음을 살고 전하는 빛의 자녀로서의 삶입니다. 우리를 한없이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죄로부터의 자유함을 갈급하는 여러분 위에, 그리고 이 세계 위에 언제나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S.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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