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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노아의 창문

장윤재 목사(이화대학교회)

- 창세기 6:13-16, 로마서 8:22-25, 마가복음 4: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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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서울은 비가 안 왔지만 다른 지역에는 어제도 비가 내렸습니다. 매년 찾아오는 단순한 장마인지, 지구온난화로 새로 시작된 우기인지 모르겠지만, 맑고 화창한 하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어제도 비가 내렸습니다. 청주의 수해 현장에도 또 다시 비가 내렸습니다. 하루 종일 비 내리는 창문 앞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리는 비를 보면서 성경에 나오는 노아가 생각났습니다. 성경을 보니, 온 세상이 홍수로 뒤덮이고 "사십 일이 지나서, 노아는 자기가 만든 방주의 창문을 열고서 까마귀 한 마리를 바깥으로 내보냈다"(창세기 8:6-7)고 했습니다. 노아도 방주의 창문 앞에서 땅에 물이 마르길 기다렸습니다. 노아에게 방주의 창문은 '기다림'의 창문이었고 하나님이 새로 시작하시는 세상을 기다리는 '소망'의 창문이었습니다.

현대인의 창문

사실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이 '창문' 앞에 앉아 있습니다. 빌 게이츠(Bill Gates)가 만든 "Windows"라는 컴퓨터의 창문 앞에 앉아 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자신이 만든 컴퓨터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의 이름을 "Windows"라고 이름 붙이고, 그 배경 그림으로 창문 너머 구름 몇 점 떠있는 파란색 하늘을 그렸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이 실제로 세상으로 통하는 '창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오늘날 상당수의 현대인들이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사가 만든 "Widows"라는 창문 앞에 앉아 세상과 통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그 앞에 앉아 무언가를 두드리고, 무언가를 클릭하며 세상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 창을 통해 정보를 주고받고 서신을 주고받으며 세상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문이 열어주는 하늘은 '가상의 하늘'(virtual sky)입니다. 컴퓨터의 "Windows" 프로그램이 보여주는 하늘은 인위적인 하늘입니다. 그런데 그 가상의 하늘에 잘못 들어가면 어떻게 폭탄을 만들 수 있는지, 어디서 총기를 구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심지어 어떻게 자살할 수 있는지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 인위적 하늘 밑에 들어가면 내 나이와 이름과 직업을 속이고 달콤한 가상연대도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늘 아래에서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일 수도 있고, 수 천대의 우주선을 순식간에 때려 부술 수도 있습니다. 내 손에는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가상의 하늘 아래에선 수십 억, 수백 억 달러의 돈도 손가락 하나로 지구의 반대편에 날려 보낼 수 있습니다. 빛의 속도로 말입니다. 심지어 그 가상의 창문이 열어주는 세계로 들어가면, 우리는 이렇게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서둘러 교회로 올 필요도 없습니다. 마음에 맞는 대형교회 목사의 설교를 골라 들으며 속옷 차림으로도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온라인으로 헌금도 보낼 수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문이 열어준 하늘 아래서 우리는 참으로 편리한 세상을 살게 되었습니다.

최근의 통계를 보니 지구상 인터넷 사용자는 75억 인류의 51%인 38억 명이고, 이 중 약 30억 명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이런 방식으로 '골뱅이'라 불리는 @와 '점'이라 불리는 .(dot)로 이루어진 기호로 서로 연결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굴과 얼굴로는 연결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인격과 인격으로는 접속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음과 마음으로는 이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니, 연결은커녕,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5~6시간 동안, 우리는 그에 비례해서 우리의 부모와 형제자매와 그리고 옆집의 이웃들과는 격리되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 덕분에 우리는 멀리 아마존 밀림 속에 사는 희한한 원숭이와는 연결되었으나, 옆방의 식구와는 격리되었습니다. 게다가 빌 게이츠가 열어준 이 하늘과 창문 아래 있는 사람들은 종종 어디가 진짜 세상이고 어디가 가상의 세상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재판이 진행 중인 이른바 '인천 여아 살인 사건'은 저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17세 소녀가 8세 소녀를 유인해 살해하고 사체를 유기했습니다. 단독범행인 줄 알았더니 19세 소녀 공범이 있었습니다. 둘은 인터넷의 '캐릭터 커뮤니티'라는 공간에서 만났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주제를 잡아 가상의 세계를 만들면 여기에 참여하고 싶은 이들이 여기 들어와 각자의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공간입니다. 이 과정에 정해진 이야기는 없습니다. 정해진 결론도 없습니다. 단지 각자 만든 캐릭터들이 가상의 세계에서 결말을 알 수 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갑니다. 흥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두 소녀는 살인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역할놀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놀이를 현실에서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가상공간이 현실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현실세계가 가상공간의 재현이 된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모든 캐릭터 커뮤니티가 범죄의 온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가족과 이웃과의 상호작용이 끊어지고, 아무와도 소통하지 못하던 두 소녀에게 컴퓨터의 "Windows"가 열어준 이 가상의 공간은 살인도 한낱 게임이 되는 도착(倒錯)의 세계가 되었던 것입니다.

군사지도자들도 "window"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군사용어 가운데는 "window of vulnerability"라는 말이 있습니다. '취약한 창문'이라는 뜻입니다. 대륙간 탄도탄이 뚫고 들어올 수 있는 하늘의 구멍을 말합니다. 며칠 전 북한이 탄도 미사일을 쏘아서 다시 한 번 뉴스에 크게 보도가 됐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저 하늘은 다 푸른 하늘인데, 군사지도자들의 눈에 그 하늘의 어디는 막힌 구멍이고 어디는 뚫린 구멍입니다. 그들에게 하늘은 언제 스텔스 전폭기나 핵미사일이 날아올지 모르는, 그래서 어마어마한 돈과 노력을 들여 조그만 창문도 있게 해서는 안 되는 죽음의 공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창문을 통해 보는 하늘 아래 살고 있습니까?

성서의 창문

성서에도 창문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칠 때 라합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집 창문 때문이었습니다. 거기로 밧줄을 늘어뜨려 여호수아의 정탐꾼들이 달아나게 해주었고(여호수아 2:15), 이후 여호수아의 군대가 여리고 성을 함락할 때 그 창문에 홍색 줄을 매달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여호수아 2:18, 21). 사울 왕에게 박해를 당하던 다윗은 아내 미갈의 도움으로 자기 집 창문으로 빠져나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습니다(사무엘상 19:12). 사도 바울도 다마스쿠스의 아레다 왕에게 잡혀 죽을 뻔 했을 때 성벽의 창문을 통해 무사히 빠져 나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고린도후서 11:33). 말라기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복을 쏟아부어주시는 통로가 하늘의 창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말라기 3:10). 이렇듯 성서에서 창문은 구원과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창문들 이야기 가운데 오늘 이 장마철에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노아의 창문'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서를 보니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또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모두 악한 것임을 보시고 나서 땅 위에 사람 지으신 것을 깊이 한탄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어 큰 홍수에 대비하라 명하십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방주를 만들라고 명하십니다.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중하 삼층으로 할지니라"(창세기 6:15-16). 규빗(cubit)은 고대근동 지방에서 쓰이던 길이의 단위로,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에 해당합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길이는 조금씩 달랐으나, 대개 50센티미터가 한 규빗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를 기초로 노아의 방주를 오늘의 미터법으로 계산하면 그 배의 길이는 약 135미터, 폭은 약 23미터, 높이는 약 14미터의, 그것도 삼층의 구조로 된 거대한 구조물이 됩니다. 축구장 세 개를 삼층으로 붙인 크기의 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이 거대한 배의 맨 꼭대기 위에서부터 한 규빗, 즉 약 50센티미터 밑에 창문 하나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단 하나의 창문입니다. 높은 꼭대기 바로 밑의 작은 창문이었습니다. 그 창문은 이 커다란 배에 빛이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이제 사십 주야로 비가 땅에 쏟아지고 150일 동안이나 물이 땅에 넘쳐 지면의 모든 생물이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동물들을 기억하시고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여 물을 줄이기 시작하십니다. 물이 땅에 가득 찬 지 40일이 지나 노아는 방주에 낸 작은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날려 보냅니다.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으면 마른 땅을 찾은 것이지만 그 까마귀는 이내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노아는 그 창문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물이 빠지길 기다렸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칠일이 지나 날려 보낸 비둘기는 새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어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칠일이 지나 날려 보낸 비둘기는 다시는 노아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마른 땅이 드러난 것입니다. 창문 앞에서 오랜 기다린 끝에 노아는 방주의 문을 열고 나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 작고 높은 창문 아래서 노아는 오랫동안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노아의 창문은 기다림의 창문이었습니다. 노아의 창문은 하나님이 새로 여시는 새 하늘가 새 땅의 약속을 기다리는 소망의 창문이었습니다.

소망의 창문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어느 하늘 아래 살고 계십니까? 어느 창문 아래 무엇을 기다리며 살고 계십니까? 사실 우리의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태아는 세상을 보기 위해 9달 동안 엄마의 뱃속에서 기다립니다. 부모 역시 같은 기간 이 아이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군에 간 아들들은 제대날짜를 기다리고, 운동선수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 또다시 4년을 기다립니다. 어린 시절 소풍 가는 날짜가 정해지면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추억을 누구나 가지고 계시겠지요. 우리는 살면서 방학을 기다리고, 생일을 기다리고, 전화를 기다리고, 연인을 기다리고, 또 떠났던 사람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삽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도 여우는 기다림이 관계를 맺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어린 왕자도 해지는 노을을 기다립니다. 농부들의 말은 한결 같습니다. 농사란 '기다림'이라고. 처음 새싹이 돋아나면 이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생명이 어떻게 자랄까 걱정이 되지만 '믿고 기다리면' 튼튼하게 곡식들이 자라납니다. 그래서일까요. 아프리카 속담에 이런 좋은 말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풀은 잡아당겨도 자라지 않는다." 그럼에도 조급하기만 한 우리 현대인들은 어린 자녀들도 잡아당겨 키우려하고 또 모든 것을 잡아당겨 앞당기려만 합니다.

아동문학가 유경환님의 글입니다. "꽃씨 안이 궁금해 쪼개 보기엔 너무 작고 딱딱해 / 꽃씨 안이 궁금해 귀에 대고 들어보지만 숨소리도 없어 / 꽃씨 안이 궁금해 코에 대고 맡아보지만 냄새도 없어 / 궁금해도 기다려야지 꽃씨만 아니야 기다려야 할 건 참고 기다려야지." 제목은 '기다려야지'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에게 기다림이란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시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성품과 본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침묵기도를 드리다보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내면의 가장 작은 소리도 가장 깊이 들으시는 분이시며 또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때'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가복음 1:15). 그가 말씀하신 때는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고치시고 변혁하시는 은혜의 시간, 즉,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기다림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기대'이고 다른 하나는 '소망'입니다. 기대는 '막연한 기다림'입니다. 소망은 '약속된 기다림'입니다. 신앙인들에게 기다림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입니다. 우리들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에 대한 소망입니다. 우리는 막연히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근거 없이 기다리지 않습니다. 약속을 믿기에 기다립니다. 부활에 대한, 새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에 그것을 인내로써 기다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로마서 8:25). 또 말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 5:3-4).

사람들은 종종 기다림을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다림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입니다.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약속된 기다림은 가장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의 행위입니다.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입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아리는 일 있을까. /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 너였다가 너였다가 /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 사랑하는 이여, /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 아주 먼 곳에서 나는 너에게 가고 /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해 너는 지금 오고 있다. / 아주 먼 곳에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을 너를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시인은 어느 면에서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기다림이 절실해지면 그 기다림은 일방적이거나 수동적이 아니라 '너'에게로 다가가는 능동적인 행위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너'는 사랑하는 연인일 수도 있지만 작가 스스로가 밝히듯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약속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림은,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림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실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반드시 그의 약속을 이루고야 마신다는 우리의 가장 확고한 신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교독문 시편 62편도 이와 같은 내용입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이 시편은 성가곡으로도 작곡되어 교회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1절). 이 구절을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내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을 기다림은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지금 조용히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구원이 그에게서만 나옴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요새"(2절)이심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시편 기자는 다시 한 번 자신을 향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기다려라. 내 희망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5절). 노아가 방주의 창문 아래서 기다린 것은 까마귀나 비둘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노아의 기다림은 그 약속의 성취를 향한 가장 적극적인 믿음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영등포에서 노숙인들을 상대로 임시보호센터를 운영하시는 한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여기에서 많은 복지 서비스와 봉사 활동을 하고 계신데, 한번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노숙인 한 분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와 함께 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6개월 동안 노숙인 단 한 사람만을 초청해 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무 조언이나 충고도 하지 않고, 오직 질문하고 침묵하며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밥도 함께 먹고, 소풍도 가고, 마지막에는 그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바다여행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함께 한 한 교회청년의 도움으로 그 분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 그분에게 선물했다고 합니다. 노숙인이란 자신의 역사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역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노숙인 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보호센터에 있던 사람들은 그 사람의 삶의 무게와 아픔에 공감하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피상적인 삶을 돌아보기 시작했으며 그의 영혼과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들음'과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사람들은 그 한 사람의 인생의 이야기를 다시 불러낼 수 있었고, 그 시간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깊은 울림과 치유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어떤 봉사 활동보다도 들음과 기다림이 가장 훌륭한 봉사 활동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경애하는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그리고 하나님을 이렇게 만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요즈음 무엇을 기다리며 사십니까? 누구를 기다리며 사십니까? 무엇을 기다리기는 하십니까? 누구를 그리워하기는 하십니까? 누군가를 그리고 무엇인가를 아직도 기다린다는 것은 내게 아직도 소망과 사랑이 살아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절망이 무엇일까요? 절망이란 우리 삶에서 더 이상 '기다림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다리는 것이 없는 것, 더 이상 아무도 기다릴 사람이 없는 것, 바로 그것이 절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애하는 여러분, 오늘 하루 그리고 이번 한주도 누군가를 위해 마음 한구석에 빈 의자를 내어놓고 '기다리는 사람'으로 살아보시지 않겠습니까. 노아처럼 방주의 창문 아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살아보시지 않겠습니까.

노아의 창문은 기다림의 창문이었습니다. 새 하늘이 열리는 것을 기다리는 소망의 창문이었습니다. 경애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어느 창문 앞에 서 계십니까? 어느 하늘 아래 살고 계십니까? 오늘은, 그리고 이번 주는 "Windows"가 열어주는 가상의 하늘 아래서가 아니라 참 생명과 구원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진짜 하늘 아래서 잠잠히 그 분의 약속을 기다리는, 노아처럼 의로운 신앙인으로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2017.7.30.)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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