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나사렛 예수의 대제사장 기도(I)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머리말

십자가
(Photo : Ⓒ 베리타스DB)
▲요한복음17장에서 예수께서 올리는 대제사장 기도는 고별사의 귀결로서 십자가의 고난을 아들이 영화롭게 되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로 묘사하는 신적 관점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기도의 삶을 사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법(주기도문)도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복음서 저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기도하신 예수의 기도 내용을 알려준다. 이러한 기도는 짤막하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와 기도의 본질을 알려준다. 이에 반하여 요한복음 17장에서 사도 요한이 전해주는 나사렛 예수의 '대제사장 기도'는 그분의 인격의 본질을 드러내며, 그가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가 지니신 신비스러운 삼위일체적인 신적 본질의 내면까지 드러내주는 점에서 그 기도는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는데 가장 깊은 부분을 드러내주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I. 요한복음 17장 예수 기도의 독특성

요한복음 13장-16장에는 예수의 고별강론이 나온다. 그리고 고별강론은 17장 위대한 대제사장의 기도로 끝난다. 이 고별강론의 종결로서 나오는 대제사장 기도는 세상에 남겨둔 제자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 아버지께 그들을 맡기시는 예수의 기도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의 대제사장 기도는 고별강론에 연계된 것으로 공관복음(마26:36-45; 막14:32-41; 눅22:39-46)의 수난 이야기(the Passion narrative)에 보도된 겟세마네 기도(the prayer in Gethsemane)와는 동일하지 않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다가오는 십자가 고난에 대해 기도로 준비하는 역사적 예수의 인성적 관점을 설명하는데 강조점이 있다면, 대제사장 기도는 고별사의 귀결로서 십자가의 고난을 아들이 영화롭게 되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로 묘사하는 신적 관점에 강조점이 있다. 이 최후의 기도는 그와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제자들이 그 자신과 아버지와 유지하기를 원하시는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역사적 예수의 원천이 그와 아버지와의 관계 설정에서 드러나며, 그가 창세 이전에 있었던 영화를 언급하면서 분명히 드러난다. 영화, 보냄, 믿음, 사랑, 거룩, 진리 등의 용어가 이 기도에 중요한 사상을 제공한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이란 고난의 차원을 넘어선 영광의 길이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여태까지 제자들에게 숨겨온 메시야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이 최후의 기도는 아마 최후만찬이 있었던 다락방의 모임 바로 전(前)이나 또는 시내에서 나와 기드론 골짜기(Kidron Valley)를 거쳐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종교개혁 당시 독일 로스톡(Rostock)대의 교수이자 루터교 신학자요 역사가이며 멜랑히톤의 제자요 후기 종교개혁의 지도자로서 '일치신조'(Formula of Concord)의 공동저자인 다비트 퀴트래우스(David Chytraeus, 본명 David Kochhafe, 1530-1600)는 이 기도를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명칭을 붙였다. 이 기도의 제사장적 성격에 대해서는 교부시대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l von Alexandria)이 언급했다. 프랑스의 신학자 앙드레 푀예(André Feuillet, 1909-1998)는 요한복음 17장에 관한 자신의 저술에서 루페르트 폰 도이츠(Rupert von Deutz)의 본문을 인용하면서 이 기도의 본질적 성격을 아름답게 요약했다: "당신 자신이 화해자이면서 속죄제물이고 제사장이면서 희생제물이신 대제사장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기도를 하셨다"(Hæc pontifex summus propitiator ipse et propititiatorium, sacerdos et sacrificium pro nobis oravit).

II. 유대교 속죄제: 대제사장의 기도의 구약적 배경

앙드레 푀예는 대제사장의 기도를 이해하는데 유대교 속죄일(Jom ha-Kippurim) 의식(Liturgie)을 배경으로 할 것을 제안한다. 그에 의하면 유대교 속죄의식에서 제의적 행위로 표현된 것이 예수의 기도에서 현실화되었다. 레위기 16장과 23장26-32절에 묘사된 속죄일 의식에는 대제사장이 이날 적합한 제물(숫염소 두 마리와 수송아지는 속죄제물, 숫양 한 마리는 번제물, 레16:5-6)로서 먼저 자신을 위해, 다음, 자신의 집안을 위해,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위해 속죄의식을 거행한다: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집안을 위하여 속죄하고 자기를 위한 그 속죄제 수송아지를 잡고..."(레16:11)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들이 범한 모든 죄로 말미암아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 그가 지성소에 속죄하러 들어가서 자기와 그의 집안과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고..."(레16:15-17)

대제사장이 성소를 위하여 속죄의식을 거행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의와 허물, 그리고 그들의 죄 때문이다. 그는 부정한 그들 가운데 있는 회막(만남의 천막)을 위해서도 같은 의식을 거행한다.

속죄일의 목적은 속죄제사를 드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에서 살면서 범했던 한 해 동안의 죄과를 씻고 거룩한 백성의 자격을 다시 부여받아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 속죄제사는 창조 전체의 본래 목적을 회복하는 것, 말하자면 하나님의 그의 백성에 대한 사랑과 그의 거룩한 뜻에 응답하는 여지를 만드는 것이다.

랍비 사상에 의하면, 하나님과의 일치 안에서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언약 사상은 세상 창조보다 앞서고 세상 창조의 내적 동기를 제공한다. 세상은 창조물의 존재를 위해서가 아니라 언약,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을 위한 장을 마련하기 위해서 창조된 것이다. 속죄제는 죄를 인하여 방해받는 이 창조 질서를 다시 세우는 것이며 한 해 종교의식의 절정을 이룬다. 이러한 언약 사상은 오늘날에도 칼빈의 전통을 따르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개혁신학으로 계승되고 있다.

III. 예수의 대제사장 기도의 구조

1. 레위기 의식(儀式)구조의 수용

레위기 16장에 기술된 의식(Ritual) 구조는 예수의 대제사장 기도에 그대로 수용되었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자신과 제사장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하여 속죄하듯이 예수도 당신 자신, 제자들, 그리고 앞으로 믿을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17:9)

예수는 '그 자신'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 자신의 사람들의 거룩함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9). 예수는 앞으로 그를 믿을 신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20). 라칭거는 여기서 보편 구원 사상을 피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는 '세상'을 상대로 구분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결국 모든 이의 구원, 곧 전체로 '세상의 생명'이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Joseph Ratzinger, Jesus von Nazareth. 『나자렛 예수 2』, 107)

그는 그 근거를 요한복음 6장51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에서 찾는다. 비록 예수의 생명이 세상의 생명을 위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의 의도와 실제적인 구원(믿음을 통한 구원)은 구별되어야 한다. 보편구원 사상은 하나님의 일반 구속의지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에 의한 구원, 말하자면, 예정된 자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 예정 구원 사상은 성경에서 우리가 보는 역설인데 이는 인간의 유한한 논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구속의 신비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구약 속죄제사를 단 한 번에 결정적으로 실행하셨다. 그리하여 예수의 십자가 대속은 우주와 역사의 의미를 본래의 목적으로 되돌리는 것이요, 타락되고 도착된 우주와 역사의 과정을 바르게 되돌려 놓은 것이다.

히브리서는 구약 레위기의 속죄제사를 그리스도 대속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예수는 대제사장으로서 허물이 있는 구약의 대제사장과는 달리 단번에 속죄를 이루셨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7:24-27)

예수는 대제사장으로서 구약의 제사처럼 염소와 송아지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1-12). 이러한 히브리서의 레위기 해석은 예수의 대제사장 기도에 부합된다.

2. 그림자인 율법적 의식에서 실재인 영적 의식으로 성취

예수의 대제사장 기도는 속죄일의 수행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근접시키는 화해의 축제다. 성만찬 제정의 시도라고 설명하지만 근거가 없다. 그러나 대세자장 기도와 성만찬 사이에는 깊은 연관성이 있다. 구약의 속죄일 의식은 예수의 대제사장 기도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형식의 중보기도로 바뀌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속죄제사가 하나님 아들의 중보 제사로 바뀌었음을 말한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히7:28)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9:13-14). 새로운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희생으로 드려지는 영적 제사다: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8-10)

바울은 로마의 기독교 공동체를 향하여 권면한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logike latreia, reasonable service)니라"(롬12:1). 예수께서 드리신 제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희생과 순종의 제사다. 예수의 제사는 구약처럼 짐승의 피와 제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순종과 자기희생의 제사다: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10:5-7)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 시편40:4-6을 인용하는 구절에 나오는 "두루마리 책이 가리키는 나"란 인자이신 예수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3.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 노래의 구체적인 성취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의 종의 노래에서는 여호와의 종이 모두의 죄를 자신이 짊어지고, 자신의 생명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며(사53:6), 많은 이의 죄를 짊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사53:10-11)

역사적 예수는 자신의 사명을 당시 유대 국가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는 정치적 메시야로서의 사명으로 보지 않고 이사야의 예언 전통으로 전승된 고난의 종으로 이해하였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의 대제사장 기도에는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의 노래는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대제사장 기도의 배경이 되고 있다. 요한의 증언에 의하면 선한 목자에 대한 가르침에서 예수는 다섯 번에 걸쳐 자신이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요10:17),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8). 이러한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놓은 목자의 말씀은 이사야서 53장10절을 분명하게 수용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53:10)

4. 요한 계시록에서 증언된 "어린 양의 피"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서 그리스도께서 피 뿌린 옷을 입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 눈은 불꽃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19:12-13)

"피 뿌린 옷"이란 그가 죄인을 구속하기 위해서 스스로 택하신 십자가 대속의 희생제물이 되심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어린 양의 구속을 받은 자, 성도들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계14:4). 사도 요한은 천상에 이루어지는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 양"(계5:6)에 대한 천상 보좌의 장로들의 찬양을 증언하고 한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고"(계5:9). 사도 요한은 어린 양의 피로써 대속함을 받은 자만이 생명나무에 나아갈 수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22:14),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21:27). 어린 양의 피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만이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있다.

레위기에서 속죄제사에서 희생제물로 드려진 속죄 양, 이사야에서 예언된 고난의 종의 희생은 역사적 예수의 십자가 대속에서 성취되었고, 골고다에서 흘리신 어린 양 예수의 십자가 대속의 피는 종말론적 심판의 날에 대속을 받은 성도들의 칭의의 근거로서 영원한 구속의 근거가 된다. (계속)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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