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안심하라"
장윤재 목사(이화대학교회)

입력 Aug 08, 2017 11:35 AM KST

- 이사야 41:8-10, 마태복음 9:19-22, 마태복음 14:25-27 -

<Jesu Juva> 단테는 "인간에게 최고의 두려움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했습니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실패라고 합니다. 나의 건강이, 결혼이, 사업이, 그리고 종국에는 나의 인생이 실패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깊은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눌려 사는 현대인의 모습을 알베르 까뮈는 이렇게 그렸습니다.

파리에 어느 변호사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세느강변을 지나다 우연히 한 여자가 투신해 익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날 이후 그 변호사는 그때 즉시 물에 뛰어 들어 그 여인을 구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괴로워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괴로움에 견디다 못한 그 변호사는 그 여자가 뛰어내린 세느강의 다리 위에 올라가 이렇게 절규합니다. "여보시오, 여기서 다시 한 번 뛰어내려 주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을 구하고 나도 구할 수 있겠소!"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은 공포(fear)와 불안(anxiety)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공포는 어떤 구체적 대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입니다. 가령 내 앞에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을 경우 우리는 공포를 느낍니다. 반면에 불안은 대상이 부재합니다.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 내 앞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솟구쳐 오르는 게 불안입니다.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느끼는 불안에 대해 철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가장 잘 설명한 이는 폴 틸리히라는 학자입니다. 키가 190센티미터가 넘는, 이 독일출신의 신학자는 제가 공부한 뉴욕의 유니온신학대학원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는 실존주의 철학과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죄'라 부르던 것을 '불안'이라는 용어로 훌륭히 설명해냈습니다. 틸리히는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세 개의 근원적인 불안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첫째 '(운명과)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둘째는 '(공허와) 무의미에 대한 불안'입니다. 셋째는 '(죄책과) 정죄에 대한 불안'입니다.

먼저 '죽음'은 존재가 존재를 상실하는 사건, 혹은 존재가 비존재가 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대상이 없는 비존재입니다. 하지만 이 죽음이라는 비존재는 우리에게 불안을 야기 시키고 우리는 이것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낍니다. 둘째로 '무의미'입니다. 삶에서 의미를 상실할 때 우리는 불안을 느낍니다. 아니 삶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까 불안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 무의미 역시 죽음과 마찬가지로 비존재입니다. 왜냐하면 무의미란 어떤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내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정죄'입니다. 정죄는 자아가 부정당하는 사건입니다. 자신의 가능성이 부인당하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으며 자기를 실현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부인당할까 우리는 불안하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가운데 인간으로 태어나 살면서 죽음에 대한 불안, 무의미에 대한 불안, 그리고 정죄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틸리히가 이야기하는 불안의 문제를 가장 잘 시각화한 이는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작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일 것입니다. 틸리히 자신도 뭉크의 작품들 안에 인간의 보편적인 두려움, 즉, 존재론적 불안이 잘 나타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몇 년 전 뭉크의 작품들이 한국에 왔을 때 한걸음에 달려가 몇 번씩 그 작품들을 감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뭉크의 예술은 유한한 인간 실존의 존재론적 불안을 잘 다루고 있었습니다. 뭉크의 <팔뼈가 있는 자화상>(1895)입니다.

그림1
(Photo : )

(그림 1) 정면을 응시하는 화가의 얼굴엔 표정이 없는데, 그의 내면의 세계가 맨 아래 팔뼈로 드러나 있습니다. 뭉크가 지금 응시하고 있는 것은 죽음입니다.

같은 해 그린 <병실에서의 죽음>입니다.

그림2
(Photo : )

(그림 2) 어린 시절 겪어야 했던 끊임없는 가족의 병과 죽음에 대한 불행한 기억을 작품 속에서 더듬고 있습니다. 다섯 살 밖에 안 되었던 어린 나이에 어머니 레우라가 폐결핵으로 사망합니다.

그림3
(Photo : )

(그림 3) 그리고 열네 살이 되었을 때는 자신의 '소울 메이트'이자 '제2의 어머니'였던 누이 소피마저 폐결핵으로 사망합니다. 정면을 응시하는 이는 얼굴에는 죽음에 대한 깊은 불안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병든 아이>(1885)라는 제목이 붙여진 그림입니다.

그림4
(Photo : )

(그림 4) 그리운 누이의 얼굴일까요.

<생명의 춤>(1900)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림5
(Photo : )

(그림 5) 여름밤 해변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의 제목과는 다르게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두 발을 공중에 띄워놓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등장인물들은 사람이라기보다 죽은 혼령에 가까운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저 푸르딩딩한 눈 두덩이와 다크 서클을 보십시오. '무의미'입니다. 공허입니다. 왼편의 흰 옷을 입은 여인은 인생의 가능성을 상징하고, 지금 춤을 추고 있는 붉은 옷의 여인은 사랑의 기쁨을 상징하며, 오른쪽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인생이 결국은 허무로 돌아갈 것이라는 불안을 짙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림6
(Photo : )

(그림 6) 이 작품은 노르웨이라는 유럽의 시골에서 파리로 그림을 공부하러 왔을 때 뭉크가 당대 최고의 화가들 앞에서 느낀 위축감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부리부리한 눈을 뜨고 노려보는 대화가 앞에서 왼쪽의 뭉크는 한없이 작아지기만 합니다. 존재를 부인당하는 느낌, 업신여김을 당하는 느낌, 그것은 기성의 질서로부터 정죄를 당하는 느낌이기도 했을 겁니다.

뭉크의 대표작인 <절규>(1893)입니다.

그림7
(Photo : )

(그림 7) 작가 스스로가 이 작품에 대한 밝힌 메모입니다. "친구들과 산책을 나갔다. 해가 지기 시작했고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피로를 느껴 멈춰 서서 난간에 기대었다. 핏빛과 불의 혓바닥이 검푸른 협만과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었지만 나는 두려움에 떨며 서 있었다. 그때 난 자연을 관통하는 끝없는 절규를 들었다."

그림8
(Photo : )

(그림 8) 뭉크가 들었다는 자연을 관통하는 절규는 사실 자신의 존재 전체를 뚫고 지나가는 절규였을 것입니다.

사실 뭉크는 <카를 요한의 저녁>(1892)과 <불안>(1894)이라는 작품에서 군중과 도시로 확장된 실존의 불안과 고독을 그립니다. 먼저 <카를 요한의 저녁>을 보시지요.

그림9
(Photo : )

(그림 9) 저녁 하늘이 검푸르게 짙어가는 데 가면과도 같은 사람들의 얼굴엔 근거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합니다. 어디론가 향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불안>은 방금 본 <카를 요한의 저녁>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앞서 본 <절규>의 다리 뒤로 보이는 풍경을 합성한 것입니다.

그림10
(Photo : )

(그림 10) 퀭한 두 눈의 가면과 같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디에서부터 오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깊은 존재의 불안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1900년 작품 <골고다>입니다. (그림 11) 우울한 청색을 배경으로 노란 그리스도가 못 박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흘린 피는 구름이 되어 잿빛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이 못 박힌 골고다 언덕에 올라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예수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모두 자신의 고통에 몰입되어 있을 뿐입니다. 아무도 타인에게의 위로가 되어줄 여유가 없습니다. 또한 아무도 타인이 자신을 위로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지도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렇게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 속에서 오늘도 각자 고통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폴 틸리히가 대단한 철학자요 신학자였던 이유는 뭉크가 형상화한 이러한 현대인의 불안을 단순한 병리적인 증상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병리적인 불안은 정신분석학적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겠지만, 틸리히는 병리적인 불안의 근본원인인 '존재론적 불안'은 그렇게 해결될 수 있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불안은 인간의 존재 기본구조에서 야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틸리히는 "인간의 실존적인 구조는 가장 세련된 기술에 의해서도 치유될 수 없[는]... 구원의 대상"이라고 보았습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틸리히의 존재론을 조금 들여다보겠습니다. 그의 존재론의 기본구조는 '존재가 비존재를 품으며 그것을 영원히 극복해 나가는 구조'입니다. 우리는 보통 존재와 비존재를 이분법적으로 분리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탁월한 신학자는 존재 안에 비존재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존재의 기본구조라 보았습니다. 가령 죽음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두 다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산다는 것은 사실 죽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고, 생명 안에는 죽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삶이라는 존재는 죽음이라는 비존재를 그 안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우리는 불행을 예감하지 않던가요. 우리가 행하는 선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최고의 도덕과 선 안에 가장 나쁜 자기합리화와 악이 숨어 있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보았습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존재의 구조입니다. 존재는 이렇게 비존재에 의해 늘 위협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틸리히는 존재 안에 포함되어 있는 이러한 비존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지탱하는 '존재 자체'는 비존재에 의해 완전히 무화(無化)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개별 존재는 비존재에 의해 사라지지만, '존재 자체'는 자신 안에 비존재를 포함하면서 그것을 영원히 극복하며 계속해서 존재를 이어갑니다. 바로 이 '존재 자체'(Being Itself)를 틸리히는 신(God)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여러 존재하는 것들 중 하나가 아닙니다. 틸리히에게 하나님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존재케 하는 '존재 자체'이며 '존재의 힘'(power of being)입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에게 존재를 주는 존재의 힘이다.")

이러한 통찰로부터 틸리히는 '존재에의 용기'를 이야기합니다. 학창시절에 틸리히의 책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를 무턱대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교양필독서라 해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읽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교양필독서'라 불리는 책들 중 일부는 나이가 들어서 다시 읽어야 이해가 되는 책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며 다시 읽으니 이 책의 제목부터 번역이 잘못 되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영어로 Courage To Be 인 이 책의 제목은 '존재의 용기'가 아니라 '존재에의 용기'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이 책에서 틸리히는 사르트르, 카프카, 엘리엇, 까뮈와 같은 문학의 거장들의 작품 속에 그려진 현대인의 불안에 주목했습니다. 특히 20세기 초에 등장한 실존주의 사조에 주목했습니다. 틸리히는 실존주의를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라 보았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유럽이 제 1, 2차 대전을 치르면서 집단주의로 흘러갈 때 이 전체주의의 폭압에 저항하며 인간을 도구화하는 것에 반대하는 용기가 바로 실존주의의 용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틸리히는 이 책에서 이러한 '실존주의의 용기'를 넘어 '존재에의 용기'로 나아가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그 '존재에의 용기'가 바로 '신앙의 용기'라고 말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틸리히는 인간에게 불안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존재의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는 비존재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용기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비존재를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나 무의미나 정죄와 같은 비존재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부인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용기란 오히려 그러한 불안을 자기 안으로 품는 것입니다. 그러한 불안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는 힘이 용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에의 용기'입니다.

틸리히는 이 용기가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졌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받아들여졌음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비존재의 위협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존재를 존재케 하시는 '존재 자체'에 의해서 우리가 받아들여졌음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바로 신앙입니다. 한 찬송가의 가사처럼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라고 고백하는 용기가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은 특정한 교리를 믿는 행위가 아닙니다. 신앙은 '존재 자체'의 힘에 사로잡힌 상태입니다. 우리를 값없이 받아들이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사로잡힌 존재의 상태가 바로 신앙입니다. 틸리히는 그것을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에 사로잡힌 존재의 상태라 불렀습니다. 종교가 무엇입니까? 사실 종교란 궁극적인 문제에 관심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왜 우리가 세상의 많은 즐거움을 뒤로 하고 이렇게 예배를 드립니까? 인생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에 관심하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인 관심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입니다.

틸리히에 의하면 인간에게 최고의 용기는 '죄인이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는 역설을 받아들이는 용기입니다. 사실 이 역설은, 잘 아시다시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0년 전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선언한 것입니다. 이른바 '칭의'(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라는 가르침입니다. 루터는 인간이 의롭게 변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고 '칭해진다' 말했습니다. 틸리히는 바로 이와 같은 역설적인 선언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러한 신앙의 용기를 가진다고 해서 불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과 운명에 대한, 무의미와 공허에 대한, 그리고 정죄와 죄책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앞으로도 여전히 언제나 우리 안에 존재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존재를 자신 안에 품으시며 영원히 그것을 극복하면서 계속해서 존재를 이어가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그 사랑의 은총 안에서 우리가 받아들여졌음을 받아들이는 용기, 그 '존재에의 용기'를 가지고 우리는 불안을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말하는 용기는 실존주의 철학이 말하는 용기를 넘어갑니다. 신앙의 용기는 단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를 넘어 죽음과 무의미와 죄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다시 긍정하는 용기입니다. 그것은 비존재를 품고 존재하려는 용기입니다. 이러한 용기는 사실 '존재 자체'에 대한 신뢰이고 참여입니다. 틸리히는 이러한 신뢰와 참여를 '신앙의 모험'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 모험에 초대하였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죽음에 대한, 무의미에 대한, 그리고 죄에 대한 우리의 근원적인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시는 분입니다. 마태복음서를 읽다가 감동을 받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불안에 떨며 두려워할 때 예수께서 먼저 다가와 "안심하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그 두려움에서 해방시키시는 구절들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모두 세 번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다 마태복음서입니다.

첫째는 9장 2절에,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을 때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의 두려움을 아시는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9장 22절에,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생각하고 예수님의 뒤로 다가와 그의 겉옷 가를 만졌을 때의 일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고 그 여자는 즉시 구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14장 27절에,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사나운 풍랑을 만나 죽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의 일입니다. 갑자기 어둠을 뚫고 바다 위로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놀라 무서워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절망으로 눈이 어두워져 그 분이 예수님인지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와 같이 마태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병들고 고통 받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오셔서 먼저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들이 저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지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한국 탁구의 유승민 선수가 중국의 왕하오 선수를 통쾌하게 이기고 금메달을 딴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탁구의 만리장성을 넘었다고 국민 모두가 너무 좋아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끝난 후 유승민 선수가 매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납니다. 선수 대기실에서 왕 선수를 보니 다리를 떨고 있더라는 겁니다. 결승전을 앞두고 긴장하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였습니다. 하지만 유승민 선수의 마음은 편했습니다. 결승까지 진출했으니 이미 선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금메달을 지켜야하는 중국의 왕하오 선수는 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져도 좋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하는 선수와 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떠는 선수가 맞붙으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이렇듯 무슨 일에서든지 먼저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주님께서는 질병과 소외와 절망 속에서 떨고 있는 우리들을 구원하시면서 먼저 "안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세브란스 병원 수술실 입구 천장에 쓰인 성경구절입니다. 누워서 수술실로 들어가는 환자들이 보도록 천장에 쓰여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 우리 주님께서도 이렇게 확증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복음 16:33).

과학자들이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장독 안에 물을 넣고 쥐를 빠뜨려 보는, 조금은 야만적인 실험입니다. 항아리 입구를 막아 캄캄하게 했더니 3분 후 다 죽었습니다. 사인은 수영을 못해서가 아닙니다. 쥐는 수영순서들입니다. 체력이 떨어져서도 아닙니다. 3분은 물에 떠있기에 긴 시간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이번에는 장독에 한 가닥 빛이 비추게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쥐들은 36시간이나 생존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3분 만에 죽은 쥐들의 사인을 바로 두려움이었습니다. 공포감이었습니다. 한 줄기의 빛도 없을 때의 절망감, 결국 이렇게 죽는가 하는 두려움과 공포가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빛을 보면 안심하게 됩니다. 한줄기라도 빛이 비추면 희망을 버리지 않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빛입니다. 생명의 빛입니다. 구원의 빛입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오늘도 존재의 근원적인 불안에 떨고 있는 우리들을 찾아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죽음을 이미 이겼다.' (2017.8.6.)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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