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하나님의 나라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에스겔 17:2-23, 고린도전서 11:17-26, 마가복음 4:3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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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Jesu Juva. 오늘은 '세계성찬주일'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교회가 주님이 베푸신 식탁을 함께 나누며 하나임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성찬예식을 거행하기 전 먼저 주님의 식탁의 의미를 잠시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남자 분이 밥을 해서 식구들에게 차려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늘 가족에게 밥상을 차려주어야 하는 주부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이 무어냐'고 물으면 '남이 차려준 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밥상을 차려주시는 분'입니다. 그것도 일반 밥상이 아니라 잔칫상을 차려주는 분입니다. 시편 23편을 다시 읽어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시편 23:1-2, 5).

인간은 음식을 먹습니다.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밥을 먹는 행위는 단지 허기를 채우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성서를 보면 함께 음식을 먹는 행위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만들어줍니다. 특히 성서에 나타나는 '공동식사'는 계약이 성립되었음을 증명해주는 표시입니다(창 24:54, 26:30, 31:46, 출 2:20, 삼상 9:19, 24 등). '계약'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베리트'(berit)의 어원은 '식사'를 의미하는 어근("brh")에 여성형 어미가 붙여진 단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성서에서 가장 나쁜 종류의 배반은 식탁에서 이루어지는 배반입니다(시 41:9, 욥 1:7). 가룟 유다의 배신이 최악의 배신인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성서에는 뚜렷한 공동식사의 전통이 나타납니다. 성서의 공동식사 전통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의 공동체를 만드시는 강력한 방법입니다. 출애굽기에는 모두 세 가지 종류의 공동식사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출애굽 이전의 '유목민식사,' 둘째는 출애굽 당시의 '유월절식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출애굽 이후의 '시내산 계약식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제바흐'(zebhah), 즉, 화목제와 연관돼 있습니다. 화목제란 희생제물 전체를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와 달리, 동물의 지방부분만 불에 태워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가족 혹은 공동체의 공동식사를 위해 내어줍니다. 이 제바흐의 기본 목적은 친교입니다. 이 친교는 이중으로 경험되는 친교인데, 하나는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친교이고, 다른 하나는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친교입니다. 그래서 제바흐를 드리면서 공동식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깊은 계약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라'고 요구했을 때에도, 그가 요구한 것은 정확히 이스라엘이 광야로 가서 하나님 앞에서 이 제바흐를 드리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출 5:3, 8:25-27). 압제자의 밥상 아래서 먹는 모멸적인 식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비록 허름한 식사여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먹고 마시며 살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이 공동식사의 전통이 신약성서로 이어집니다. 신약성서에서도 공동의 식사는 하나님 나라라는 새로운 생명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위대한 수단입니다. 예수께서 선포한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하나님 나라입니까?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중세교회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나라'를 영토나 제도와 같은 어떤 지정학적 실재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학자들은 '나라'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바실레이아'(basileia)의 히브리어에 해당하는 '말쿠스'(malkuth)가 야훼라는 단어와 조합돼서 언제나 '하나님의 왕권적 통치'(God's kingly rule)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한마디로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나라는 만일 로마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왕좌에 앉았을 때 이 세상이 어떻게 다스려질 것인가"(John D. Crossan)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알기 쉬운 비유로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설명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수많은 비유들 가운데, 오늘 읽은 마가복음 4장에 나오는 '겨자풀의 비유'(마가 4:30-32, 마태복음 13:31-32, 누가복음 13:18-19)가 아마 그 나라를 가장 잘 말해줄 듯합니다.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마가복음 4:30-32)

이 본문은, 그동안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이, 시작은 미약해도 그 끝은 큰 나무가 되어 매우 창대한 어떤 것이 되는 것이라고 해석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2천 년 전 예수님 앞에 모여 이 말씀을 듣던 '첫 번째의 청중'들은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처음 시작한 얘기는 아닙니다. 당대의 유대인들은 어릴 적부터 그 나라에 대해 듣고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전통적으로 오늘 읽은 구약성서의 에스겔 17장에 나오는 거대한 백향목(柏香木, cedar)의 이미지로 표상되고 있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에스겔 17:22-23, 그리고 다니엘 4:7~9, 19)

어른 서너 명이 손을 잡고 둘러싸야 겨우 둘레를 가늠할 수 있는 이 거대한 나무는 키가 30미터까지 자랍니다. 글자 그대로 '향기 나는 나무'인 이 백향목은 성전이나 궁전을 짓는 데에만 사용하던 최고급 나무였습니다. 그것은 호화로움과 권세를 상징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이 갈망하던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나라였습니다. 과거 다윗 왕조와 같이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나 상업적으로 강성한 제국을 이루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백향목과 같이 고귀한 사람들에게 어울릴 법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이렇게 고귀한 백향목으로 상징되던 하나님의 나라를 한낱 '잡초'에 불과한 겨자풀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겨자는 나무가 아닙니다. 일년생 풀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강인한 생명력으로 땅 위에 급속히 번지면서 토양을 망가뜨려 이스라엘 농민들이 기피하던 식물입니다. 지금 예수께서는 바로 이 겨자풀의 이미지로 그동안 백향목에 비유되던 하나님 나라의 상징을 전복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고와 고정관념에 일대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겨자풀에 비유된 하나님의 나라는 군사적인 힘과 경제적 번영에 의해 지탱되는 백향목과 같은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잡초와 같이 이름도 없고 권세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주인인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누가복음 6:20)라고 선포하셨습니다.

2천 년 전 유대 사회는 정결법(貞潔法, purity code)에 기초한 사회였습니다. '깨끗한 자 대 더러운 자,' '거룩한 자 대 속된 자,' '의인 대 악인' 등의 철저한 이분법적 구분에 기반한 사회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정결법은 이스라엘이 바빌론의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귀향한 후 나라를 유지하기도 힘든 안팎의 위기 앞에서, 민족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서 비롯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이 법은 수많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낙인찍는 방편으로 활용됐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죄인'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죄인과는 다릅니다. 당시의 죄인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생계유지를 위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다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Sabbath)에 관한 법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많이 걷는 것도, 음식을 만드는 것도, 심지어는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는 것'(누가복음 6:1)도 '일'로 간주되어 금지됐습니다. 물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일하지 않고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었습니다. 쉽게 '의인'이라 불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굶주려 우는 자녀들을 먹이기 위해서 안식일에 구걸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됐습니다. 그것은 곧 유대 정결법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그렇게 '죄인'이라 몰린 사람들이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가난한 자,' '눈먼 자,' '절름발이,' '앉은뱅이,' '문둥이,' '창녀,' '세리,' 그리고 '귀신들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말하자면 백향목과 같은 고결한 신분의 사람들이 아니라 잡초인 겨자풀과 같은 백성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른바 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당시 지도자들의 온갖 비난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보란 듯이 '평등한 식탁'의 친교를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당시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금기시되던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자들은 한 사회 질서의 축소판으로 '식탁의 법칙'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흑인들의 민권운동이 시작되던 1960년대 미국에서 흑인 청년 몇 명이 겁도 없이 백인 전용 식당에 들어가 샌드위치와 콜라를 주문했다가 봉변을 당했습니다. 가장 현대화되고 계몽됐다는 20세기 미국 사회에서도 '식탁의 규칙'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당시 그렇게 '인종적으로 분리된 식탁'은 다름 아닌 당대 미국사회 전체의 축소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정반대의 '열린 식탁'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는 차별과 배제로 업신여김을 당하던 사람들이 사랑의 하나님 앞에서 모두 평등하게 먹고 마시며 상처가 치유되고,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은총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인간이 세운 질서와 관습에 의해 '죄인'으로 몰린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부여하신 동등한 생명의 권리와 존엄성이 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역시 예수님의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식사를 그들의 삶 속에서 실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소망으로 연결시켰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그 본질이 퇴색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1장에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잘못된 성찬을 책망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당시 교회에서는 각자가 준비한 음식을 가지고 애찬을 가졌습니다. 성도들이 가져온 음식들은 일단 한 곳에 모아진 다음 모두에게 골고루 분배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고린도교회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각 가족이나 그룹이 자기네들이 가져온 음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자기네끼리 먹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연히 부유한 교인과 가난한 교인 사이에 차이가 생기고 이것이 교회를 분열시켰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식탁의 본 의미를 왜곡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무너뜨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들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어서 하나님의 집에 와서 형제자매를 업신여기느냐고 강하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주님이 성찬식을 제정하실 때의 근본의미를 설명합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시는 자가 모두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체험하는 신비인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회는 '성만찬이 없는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만찬이 자주 행해지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는 성만찬의 참 의미가 교인들의 예배와 삶 속에서 제대로 이해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의 살과 피를 받을 때에 그것이 단지 교회의 의례적 예식행위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고 온전히 회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하겠습니다. 구약성서의 화목제로부터 신약성서의 하나님 나라로 이어지는 공동식사의 전통으로 이해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성만찬도 유월절 공동식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들의 화목과 구원을 위한 음식과 음료로 내어주셨습니다. 아직도 전 세계의 교회는 사제가 기도할 때에 빵과 포도주가 실제 주님의 살과 피로 바뀌느냐, 영적으로 주님이 임재하느냐, 단지 주님의 희생을 가리키는 상징이냐를 놓고 갈려있지만 우리는 그 성찬의 뿌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베푸신 하나님 나라의 공동식사임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차별 없는 사랑, 갈등과 분열 속에 서로 찢기고 다투는 우리 모두를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세계성찬주일'입니다. 그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 1982년이었습니다. 세계기독교의 UN이라 불리는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가 1982년 페루의 수도 리마에 모여 세계의 모든 교회가 함께 드릴 수 있는 예식서인 『BEM 문서』(세례, 성만찬, 사역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를 채택하면서 매년 10월 첫째 주일을 세계성찬주일로 지키자고 선언하였습니다. WCC 안에는 이미 개신교회와 정교회가 가입하고 있지만 이 세계성찬주일의 선언에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지난 500년 동안이나 서로 갈라져 지내던 로마의 가톨릭교회까지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신구교와 정교회 등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가 한 분이신 주님 안에서 하나 되는 날인 것입니다. 오늘은 참 기쁘고 감사한 날입니다. 오늘은 이 세상의 모든 교회가 교파를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확인하는 날임과 동시에, 단지 교회만이 아니라 민족과 인종과 성별과 빈부와 종교로 나뉘어 서로 다투는 전 인류도 하나님 안에서 차별 없이 모두 하나임을 확인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세계성찬주일의 의미와 기원과 뜻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Soli Deo Gloria. (2017.10.1.)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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