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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세상'의 불안한 종교: 개신교 '총회의 계절'에 부쳐
유기쁨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입력 Oct 06, 2017 07:11 AM KST
leeinkyu
(Photo : ⓒ공동취재단)
▲2017년도 개신교계 주요 교파들의 총회는 전반적으로 ‘사회선교’에 대한 논의보다는 사회를 경계하는 가운데 세상의 위험한 영향에 맞서서 ‘공격적 방어’에 치중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사진은 예장합동 올해 총회 전경.

[편집자 주] 필자는 2017년도 개신교계 주요 교파들의 총회를 평가하면서 그 전반적인 양상이 '사회선교'에 대한 논의보다는 사회를 경계하는 가운데 세상의 위험한 영향에 맞서서 '공격적 방어'에 치중하는 경향을 드러낸 것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그는 종교가 배제와 혐오를 통해 스스로 게토화할 것이 아니라 '종교'라는 단어(religio)의 함의대로 '다시 연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주문하고 있다. 필자의 허락을 얻어 한국종교문화연구소 뉴스레터 490호(2017.10.3.)에 실린 글을 전재한다.

교회사를 읽어본 독자라면 모두 알다시피, 기성 신앙을 고수하는 자들에게는 이단 종파들이 비밀스런 종교 의식으로 흉측한 난장(亂場, orgies)을 벌인다고 고발하는 것이 논쟁을 유발하는 인기 있는 수단이 되곤 했다. 이교도들은 유대인들이 그러한 일을 벌인다고 이야기했고,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이 그렇게 한다고 이야기했다.

E.B. 타일러, 『원시 문화』 중에서.

2017년 9월에도 어김없이 개신교계 주요 교파들의 총회가 연이어 열렸다. 이번 총회들에서 는 이른바 '사회선교'에 대한 논의보다는 사회를 경계하는 가운데 세상의 위험한 영향에 맞서서 '공격적 방어'에 치중하는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배제와 혐오는 고래(古來)로부터 종교계 내부의 정체성의 정치에서 비일비재하게 사용되는 전략이었는데, 오늘날에도 대상과 구체적 전술은 바뀌었지만 기본적인 방향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위험한 세상에 물들지 않기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개신교 주요 교단들이 내부의 정체성 및 진정성 확인 작업에 몰두했다는 점이다. 이는 곧 '우리'에게서 누구를 '배제'할 것인가가 논의의 중점이 되었음을 뜻한다. 보통 개신교 내부에서 정체성 및 진정성 논쟁이 벌어질 경우, 성서 해석을 둘러싼 교리적 차이나 의례적 차이가 쟁점으로 부각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총회에서는 경계의 대상으로 지목된 과녁이 사뭇 다르다. 교단의 정체성을 오염시키고 타락시킬 수 있는 위험한 요인으로 우선적으로 호명된 대상은 동성애이며, 덧붙여 요가와 마술도 눈에 띈다. 세상 속의 동성애, 요가, 마술이 교회로 침투해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흐리고 오염시킬 수 있기에 이러한 것들을 배제하고 금지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주요 교단들의 정기총회에서 제기되었고, 별다른 이의 없이 결의되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피면, 개신교계의 거대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에서는 이번 총회를 통해 교단 소속 교회 및 7개 신학교에서 동성애자 및 '동성애 지지자, 옹호자'를 적극적으로 배제하기로 결의했다. 곧 동성애자 및 동성애 지지자, 옹호자는 예장(통합)측 7개 신학교에 입학할 수도, 교직원으로 재직할 수도 없으며, 교단의 교회 직원도 될 수 없다고 결의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동성애자와 본 교단의 교리에 위배되는 이단에 속한 자"가 세례나 주례를 요청할 경우 목사가 이를 거부하고 교회에서 추방할 수 있도록 한 헌법개정안이 통과되었다. 동성애가 이단과 나란히, 더욱이 이단보다 먼저 거론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비교적 진보적인 교파로 여겨져 온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에서도 '성소수자 교인 목회를 위한 연구위원회 구성과 활동 안건'이 기각되는 등,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장로교 교단들에서는 공통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게다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문화'로 여겨지는 것들에까지 경계와 배제의 범위는 확장된다. 예장통합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에서는 마술을 "인간이 눈속임을 위해 만든, 거짓의 영역"으로, 요가를 "기원과 목적 자체가 이방신을 섬기는 종교적 행위"로 규정한 연구보고서를 제출했고, 총회에서는 이를 이견 없이 받아들여서 교회 내에서 각각을 금지하기로 결의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문화적 실천들을 그리스도교를 오염시키고 변질시키며 나아가 파괴할 수 있는 위험한 대상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현상이 2017년 개신교계 주요 교단 총회에서 나타난 풍경이었다.

오염과 혐오: 불안감을 조성하고 증폭하는 종교

이처럼 특정한 대상을 위험시하고 배척하는 움직임은 교단 내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른바 교회의 문턱 너머로까지 동일한 배제의 논리를 확장하려는 공격적인 움직임이 도처에서 목격되고 있다. 나는 특히 전국 각지에서 인권조례의 통과를 막는 보수개신교계의 지역별 집단적 움직임에 주목하고 싶다.

인천, 대구, 대전, 울산, 전북, 순천 등 전국 각지에서 지자체의 인권조례 제정이 보수개신교계의 집단적 움직임으로 난항을 겪고 있고, 충남인권조례, 아산인권조례 등 이미 제정된 조례를 폐지하려는 개신교계 일각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이들이 인권조례를 반대하면서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인권조례가 -가령 '성적 지향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을 권리' 등을 명시하면서 결과적으로- 동성애를 조장하기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성애는 단지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될 뿐 아니라, 일부일처제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에이즈를 널리 퍼뜨림으로써 결국 사회를 붕괴시키는 데 이르게 된다고 주장한다. '성적 지향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곧 동성애를 조장하는 문구라거나, 동성애를 인정하면 에이즈가 창궐하게 되고 결국 우리 사회가 무너지게 된다는 논리에는 상당한 비약이 있다. 그렇지만 전국 각지의 보수개신교계 지역 단체들은 놀랍도록 일괄적으로 그러한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가까운 순천의 경우, 청소년이 근로기준법, 최저임금법 등에 규정된 대로 근로계약을 맺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청소년노동인권조례안이 마련되었고, 시의회의 입법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청소년 노동인권'이 특히 강조된 이유는, 전남지역의 많은 청소년들이 열악한 노동환경 하에서 알바나 현장실습 등으로 일하고 있는데, 이때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할 뿐 아니라 심지어 무방비상태로 산재를 겪고 다치거나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 조사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천기독교총연합회에서는 조례가 통과되면 청소년이 "고용주에 대한 적대감"을 갖게 된다면서 청소년의 노동권보다는 고용주의 경영권을 우선시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또한 조례안의 내용에는 '동성애'나 '성소수자'나 '차별금지법'이란 단어조차 등장하지 않지만, 순기총 측에서는 조례안이 동성애와 연관되어 있는 이유로 조례 제정을 집단적으로 반대해왔다. 곧 청소년노동인권조례는 인권위의 권고사항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인권위는 "노골적으로 동성애를 지지"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조례가 악용되어 동성애를 퍼뜨리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조례의 입법을 막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수개신교계에서는 이른바 건강한 사회를 오염시키는 대단히 위험한 영향력(동성애)이 확산되고 있다는 불안감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킬 뿐 아니라, 따라서 이를 반드시 막아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려 시도하고 있다. 당장 인권조례의 제정은 실력행사를 통해 연기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이러한 전략이 얼마나 통할지는 의문이다. 보수개신교계는 무너질 위기에 처한 위험한 세상을 '염려'하지만, 실은 오히려 '위험한 종교'로 인해 세상이 불안해하는 모양새다.

게토화하는 종교 vs. 다시 연결하는 종교

사실 사람들은 요즘 세상에서 위험은 일상화되어 있다고 느낀다. 살충제 달걀 등 일상적인 먹거리에서부터 경주 지진, 대규모 환경파괴 등 크고 작은 위험을 피부로 감지하며 사는 현대인들은 점점 더 큰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전방위적으로 위험이 감지될 때 사람들은 불안, 위기감, 무기력감을 느끼며, 이러한 불안이 심화될 때 더 크고 더 근원적인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은 갈망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삶의 의미와 마음의 안정을 찾아 종교를 찾는 사람들, 종교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아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쩌면 (적어도 일부) 종교는 그 어느 때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어떻게 도울까 하는 문제 보다는, 누구를/무엇을 배제해야 하는지, 누구를/무엇을 쫓아내야 하는지를 더욱 중요한 문제로 여기는 듯하다. 나아가 사회적으로도 불안과 혐오를 조장하고 증폭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일들은 과연 어떠한 결과로 이어지게 될까? 배제된 그들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그리스도교 저술가 락탄티우스(Lactantius, 기원후 250~325)는 고대 로마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를 인용해서, '종교(religio)'라는 단어에서 '다시 묶다, 다시 연결하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religare'의 의미를 부각시켰다. 이후 그러한 어원 설명을 그럴듯하게 받아들인 많은 이들은 종교의 핵심적 특징으로 신 혹은 초월적인 존재와 인간을 '다시 결합'하는 측면을 주로 강조해왔다.

나는 종교의 어원에서 '다시 연결'의 의미를 발견하는 해석이 흥미롭다고 여길 뿐 아니라, 오늘날 좀 더 적극적으로 전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017년 개신교계의 총회의 풍경 및 인권조례 반대 움직임에서 볼 수 있듯이, 오늘날 일부 종교들은 배제와 혐오에 집중함으로써 스스로 게토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의 경우) 단지 초월적 존재와의 다시 연결 뿐 아니라, 신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워진 자신과 세상을, 타자들을 '다시 연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상황은 계속 변화하고 있고, 시대의 물음도 새로워지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다시 연결'을 시도하려면 다각도에서 심층적인 물음과 답을 구하려는 노력, 다양한 시도가 필요할 것이고 이는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그렇지만 나는 세상과, 타자와 '다시 연결'하기 위해 애쓰는 종교의 모습을 좀 더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종교를 위해서도, 세상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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