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성서적 아나뱁티스트운동의 태동과 그 역사적 의의(II)

김승진 (침례교역사신학회 회장)

편집자 주] 필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에 가려진 초창기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의 개혁적 활동에 주목하면서 이들이 태동하게 된 과정과 그들이 오늘날의 기독교계에서 갖는 역사적인 의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내용을 2부로 나누어 전재한다.

IV. 성서적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태동: "스위스 형제단"의 출현

1. 최초의 신자의 뱁티즘

김승진
(Photo : ⓒ 침례신학대학교)
▲김승진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제3차 공개토론회에서 그 동안 영적인 멘토로 모셔 왔던 쯔빙글리로부터 책망과 모욕을 받은 제자들은, 나흘 뒤인 1525년 1월 21일 밤에 그로스뮌스터 성당 뒤 노이쉬타트(Neustadt) 거리에 있는 펠릭스 만쯔의 집에 꾸역꾸역 모여 들었다. 그들은 스승의 태도변화에 대하여 성토하면서, 뱁티즘은 신자들에게만 베풀어야 하며, 신약성서가 가르치는 참 교회는 뱁티즘을 통해서 신앙고백을 한 신자들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확신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 날 밤 제이콥 가문의 게오르게(George of the House of Jacob) 즉 게오르게 블라우락이 그레벨을 향해, 자신에게 신앙고백에 근거한 "참된 크리스천 뱁티즘"(True Christian Baptism)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때 그레벨이 블라우락에게 베풀었던 뱁티즘의 방식은 물을 머리 위에 부어주는 "관수례"(Affusion)였다. 그레벨과 그로부터 뱁티즘을 받은 블라우락은 신앙고백이 확실한 다른 제자들에게 뱁티즘을 베풀어 주었다. 새로 뱁티즘을 받은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서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삶을 살며, 복음을 전파하며, 믿음을 지키겠노라고 헌신을 다짐하였다.

후터파 형제단의 대연대기(The Large Chronicle of the Hutterian Brethren)에는 최초의 신자의 뱁티즘이 행해졌던 그 날 밤의 사건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기도를 드린 후에 제이콥 가문의 게오르게가 일어서서, 콘라트 그레벨에게 자신의 믿음과 지식에 근거하여 참 크리스천 뱁티즘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가 그러한 요청과 바램을 가지고 무릎을 꿇었을 때, 콘라트는 그에게 뱁티즘을 베풀어 주었다"(A. J. F. Zieglschmied, ed., The Large Chronicle of the Hutterian Brethren [Die Aelteste Chronik der Hutterischen Brueder], [New York: Carl Schurz Memorial Foundation, 1943], 47; John C. Wenger, trans & ed., Glimpses of Mennonite History and Doctrine [Scottdale, PA.: Herald Press, 1947], 24-5. George H. Williams and A. M. Mergal, Spiritual and Anabaptist Writer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7], 41-6).

블라우락이 그레벨에게 뱁티즘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였다"(gebeten, besought)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유아는 스스로 요청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유아들의 사망률이 높았던 사회에서는 그들이 죽었을 때, 그들이 구원을 받았을 것인가가 중요한 신학적인 질문이었다. 그래서 일부 고대교회의 교부들은 유아뱁티즘이 원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여, 유아뱁티즘을 받고 죽은 갓난아이와 어린 아이는 천국으로 가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와 같이 목회적인 배려에서 유아뱁티즘이 시작되었다. 유아뱁티즘에 원죄를 사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보는 "뱁티즘 중생설"(Theory of Baptismal Regeneration), 혹은 "성례전주의"(Sacramentalism)였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유아뱁티즘에 관한 언급이 없을뿐더러 유아뱁티즘이 행해진 사례가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이 없다. 예수님이 어린이들을 사랑하셨고 어린이들과 같은 믿음(부모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어린이들에게 "안수"하셨고 축복하셨다는 말씀은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에게 뱁티즘을 베푸셨다는 말씀은 네 복음서들 중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유아뱁티즘은 인간의 발명품(human invention)이자 인간의 전통(human tradition)이지 하나님의 계시(God's revelation)가 아니다.

또한 구약의 할례가 신약에 와서는 유아세례가 되었다고 설명하는 신학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신약성서 어디에도 그런 언급이 없다. 할례(Physical Circumcision)는 혈연적인 이스라엘(Physical Israel) 민족공동체에 들어가는 관문이었고 할례는 하나님과 육체적인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구약적인 옛 언약의 증표였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즉, 하나님과 영적 이스라엘(Spiritual Israel, "교회" Church) 사이의 새로운 언약의 증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회개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다시 말하면 영적인 할례(Spiritual Circumcision, 마음의 할례)이지 뱁티즘이라고 하는 의식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갈 3:26), 뱁티즘을 받으므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뱁티즘은 단지 예수 믿은 신자가 그러한 영적인 체험을 고백하는 수단일 뿐인 것이다. 만약 할례가 신약에 와서 유아세례가 되었다고 한다면, 유아뱁티즘은 여자 아기나 여자 아이에게는 베풀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할례는 오직 사내 아기나 사내아이에게만 베풀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태어난 지 8일 만에 베풀어야 할 것이다. 유아뱁티즘 행습은 율법과 복음을 뒤섞는 것이요 유대교와 기독교를 혼합시키는 것이다.

유아뱁티즘은 고해성사와 더불어 대표적인 "대리종교"(proxy religion)의 한 모습이다. 신약의 가르침은 대리종교를 배격한다. 예수님을 만나 거듭난 신자 개개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중보로 하여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것(direct access to God the Father)이다.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지, 성직자나 부모가 중보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Father God)이지 "할아버지 하나님"(Grandfather God)이 아니다.

최초의 신자의 뱁티즘(Believer's Baptism)이 행해짐으로써 스위스 형제단과 성서적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비로소 태동하게 되었다. 비록 이 사건은 어느 성도(Felix Manz의 어머니)의 집에서 벌어졌던 사소한 에피소드이긴 했지만, 종교개혁운동의 과정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물줄기가 용솟음쳐 형성된 매우 의미 깊은 사건이었다. 그것은 바로 세속정치와 교회가 하나로 묶여져 있던 로마가톨릭교회 체제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함과 동시에, 이러한 체제를 여전히 견지하고 있던 루터, 쯔빙글리, 칼빈 등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Magisterial Reformers)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2. 최초의 아나뱁티스트 신앙공동체

1525년 1월 21일 밤에 모여서 신앙고백에 근거한 뱁티즘을 받았던 신자들은 12명 남짓한 적은 수였다(Estep, Renaissance and Reformation, 184). 이들은 취리히 근교의 마을들로 흩어져서 복음을 증거하며, 자신들이 새롭게 깨달은 초대교회적인 믿음을 전파하였다. 그들이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즉, 교회를 형성했던 최초의 지역은 바로 졸리콘(Zollikon)이었다. 브뢰틀리(Broetli), 만쯔, 블라우락, 클라우스 호팅거(Klaus Hottinger) 등은 취리히 호수(Lake of Zuerich) 동북쪽에 위치한 졸리콘 마을에서 최초의 아나뱁티스트 공동체를 형성하였다(Ibid.).

취리히와 졸리콘의 1월달 기온은 몹시 추웠고 호수는 얼어 있었다. 최초의 아나뱁티스트들도 침수례(Immersion)가 성경적인 뱁티즘의 방식인 줄은 알았지만, 그것을 고집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당시 얼어 있던 강이나 호수에서 물속으로 들어가 침례를 베푸는 일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핍박을 피해 가정집이나 동굴 같은 곳에서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은밀하게 뱁티즘을 베풀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초창기 기록에 의하면 침수례가 이루어진 사례도 없지는 않다. 최초의 뱁티즘이 있은 지 약 1달 후, 그레벨은 스위스 북부지방인 샤프하우젠(Schaffhausen)으로 가던 중에, 볼프강 울리만(Wolfgang Ulimann)을 전도해서 그에게 뱁티즘을 베풀었는데 최초로 침수례를 베풀었다. 세인트 갈(St. Gall)의 연대기 저술가 요한네스 케슬러(Johannes Kessler)에 의하면 "(그레벨은) 그를 라인강의 강물 속으로 밀어 넣었고(undergetruckt) 그를 물속에 잠기게 하였다(und gedeckt werden)"(Estep, The Anabaptist Story, 39에서 재인용)고 기록하고 있다. 졸리콘과 세인트 갈 등지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던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박해 속에서도 마치 "들판의 불길처럼"(like wildfire) 여러 도시들로 확산되었다(Estep, Renaissance and Reformation, 185).

그러자 1525년 2월 1일 취리히 시당국에서는 시의회의 명령에 불복하여, 이미 유아세례를 받았던 자들에게 다시 뱁티즘을 행하는 자들(Rebaptizers)을 체포하고 투옥하라는 명령을 관리들에게 시달하였다(R. J. Smithson, The Anabaptists: Their Contribution to Our Protestant Heritage [London: James Clarke & Co., Limited, 1935], 47). 같은 해 3월 5일에는 또 다른 법이 발표되었다. 이미 뱁티즘을 받은 자들을 또다시 뱁티즘 받게 한 사람은, 교회법뿐 아니라 취리히 시의 공권력에 반항한 것이기 때문에,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물속에 빠뜨려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Ibid., 48). 결국 초창기 스위스 아나뱁티스트 지도자들은 현상수배된 범죄자들이 되었고, 당국의 추적을 피해 뿔뿔이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는 도망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유아뱁티즘 행습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로마가톨릭 당국으로부터는 물론이고,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의 진영으로부터도 혹독한 핍박받았고, 셀 수 없이 많은 아나뱁티스트들이 순교를 당하였다.

V. 나가면서: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의 역사적 의의

1525년 1월 21일은 종교개혁운동이 전개된 과정에서 매우 의미 깊은 날이다. 1,000여 년 이상 지속되어 오던 유아뱁티즘 행습을 부정하고, 신자, 즉, 신앙고백을 분명하게 하는 자들에게 최초로 뱁티즘(신자의 뱁티즘, Believer's Baptism)을 베풀었던 날이다. 이 날은 16세기 로마가톨릭교회뿐만 아니라 주류종교개혁가들(Mainstream Reformers)의 개혁운동으로부터도 단절을 한 날이었고, 근대적인 의미의 자유교회운동(Modern Free Church Movement)의 출발점으로 기록될 수 있는 획기적인 날이었다.

루터, 쯔빙글리 그리고 20여년 후에 등장한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 등 주류종교개혁가들은 크리스천 세속정치인들의 후원을 입어서 종교개혁을 이루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교회와 국가가 결탁된 교회, 즉, 시교회(City Church) 혹은 국가교회(State Church)의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터는 삭소니 주의 현자 프레드릭과 헷세 주의 필립으로부터, 쯔빙글리는 취리히 시의 시의회 의원들로부터, 칼빈은 제네바 시의 시의회 의원들로부터 정치적인 후원을 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Magisterial Reformers, 정부주도형 종교개혁가들, 시 종교개혁가들)이라고도 불리는 것이다.

그리고 루터교회(Lutheran Church)는 북부 독일과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의 국교회가 되었고, 개혁교회(Reformed Church, 장로교회)는 취리히 시와 제네바 시의 시교회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국교회가 되었다. 영국교회(Anglican Church, 성공회)는 잉글랜드의 국교회가 되었다. 교회와 국가의 결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유아세례였다. 그 지역에서 혹은 그 지역의 백성으로 태어났다(육체적 출생, physical birth)는 사실 자체로 인해, 영적인 출생(spiritual birth)을 경험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아세례를 받아 교회로 영입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중세 1,000년의 로마가톨릭교회의 전통이었음과 동시에 그 잔재였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이 지상에 출현시킨 교회는 초대교회 혹은 신약성서적 교회의 모습을 충분히 회복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개혁은 "아직도 미완성인 종교개혁"이었다고도 진단할 수 있다(김승진, 「종교개혁가들과 개혁의 현장들: 아직도 미완성인 종교개혁」 [서울: 나침반출판사, 2015], 19-28, 319-34).

요한복음 1장 12-13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blood)으로나 육정(will of flesh)으로나 사람의 뜻(will of man)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but of God) 난 자들이니라."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즉, 영적인 출생을 경험한 자들, 다른 말로 하면, 회개하고 예수 믿어 거듭난 신자들에게만 뱁티즘을 베풀고, 이렇게 뱁티즘을 받은 신자들이 교회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교회는 국가나 세속권력가들과는 무관한 순수한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Spiritual Body of Christ)으로서의 교회를 지상에 세우고자 하였다. 그들은 자유교회(Free Church), 즉,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한 교회, 국교체제의 기독교가 아닌 교회가 바로 초대교회(Early Church) 혹은 신약성서적 교회(New Testament Church)라고 믿었다.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의 "직접적 역사적 후예"로는 메노나이트들(Mennonites)과 후터라이트들(Hutterites) 그리고 아미쉬(Amish) 등이 있고, "간접적 신앙적 후예"로는 침례인들(Baptists), 퀘이커교인들(Quakers), 그리스도의 교회(Churches of Christ) 혹은 크리스천교회(Christian Churches) 교인들,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들교회(Brethren in Christ Church) 교인들 등이 있다. 이들을 통틀어서 "자유교회 전통 속에 있는 크리스천들"(Christians in the Free Church Tradition)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들은 유아뱁티즘을 행하지 않고 신자의 뱁티즘을 베풀며, 중생한 자들로 교회회원을 삼으며(Regenerate Church Membership), 국가교회(국교)를 배격하며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으며(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모든 자들을 위한 신앙의 자유를 강조하며(Religious Freedom for All),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에 자발적으로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Voluntary and Affirmative Response to God's Grace and Love)이라고 믿는다. 16세기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은 근대적 의미의 자유교회운동을 출범시킨 사람들이었다. (끝)

이인기 ihnklee@veritas.kr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7] 중세교회 대중들의 신앙생활

중세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스콜라주의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콜라주의 문헌들은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것을 읽거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6] 중세 신학의 대략적 지도: 서방의 '스콜라 신학'과 동방의 '비잔틴 신학'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5]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의 터전을 마련한, 아우구스티누스!

"서방신학은 동방신학보다는 출발이 좀 늦었으나 곧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교부들이 주축이 되어 착실하게 발전해갔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4] 카르타고 학파의 거침없는 변증과 교회론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의 신학을 오늘날 살피는 것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이들의 신학은 현실적이고 참여적이고 실존적이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