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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회와 개혁의 과제들(II)
김승진 목사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침례교역사신학회 회장)

입력 Nov 29, 2017 09:07 AM KST

편집자 주] 필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한국 개신교회가 겪고 있는 병리현상들을 진단하고, 건강하고 신뢰받는 한국 개신교회의 회복을 위해 나름의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글은 필자가 최근 출간한 『종교개혁가들과 개혁의 현장들: 아직도 미완성인 종교개혁』(서울: 나침반출판사, 2015)에서 제9장의 내용 중 일부를 전재한 것이다. 필자의 허락을 얻어 3부로 나누어 연재한다.

4. 투명행정과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

김승진
(Photo : ⓒ 침례교신학대학교)
▲김승진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목회자는 교회의 재정과 행정을 교회회원들 모두에게 투명하게 공개하고,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을 실제목회에서 실천해야 한다. 무엇인가를 은폐하고 숨기려 하는 것은 구린 데가 있기 때문이다. 떳떳하고 당당하다면 숨길 이유가 없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특히 재정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앞과 전 교인들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각 교단마다 교회의 조직과 회의가 다양하고 다르기는 하지만, 지역교회의 궁극적인 주인은 (소유라는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동시에 예수 믿고 구원받은 전체 교회회원들 역시 (소속이라는 의미에서) 지역교회의 주인이다.

물론 담임목회자에 대한 최소한의 사례비도 지급하기 힘든 개척교회나 1년 예산을 세울 수도 없는 작은 교회에서는 정기적인 재정보고를 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최소한의 예산이라도 세울 수 있는 교회라면, 담임목회자는 정기적으로 목회보고 및 재정보고를 하여야 한다. 한국의 개신교회에서는 "제직회"라는 회의가 있는데, 교회의 항존직 직분자들과 각 기관의 책임자들과 담임목사에 의해 임명받은 서리집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제직회" 회원들에게만 일정기간에 한 번씩 회의를 통해서 목회보고와 재정보고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교인들 중 일부만이 아니라 전체 교회회원들 모두에게 정기적으로 (필자의 견해로는 1년에 분기별로 최소한 네 번 정도는) 보고가 이루어지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역교회를 구성하는 교회회원들 모두가 그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가족이고, 그들 모두가 헌금을 하고 있고 담임목회자를 도와 사역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Priesthood of All Believers)의 원리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운동의 핵심적인 신앙들 가운데 하나이다. 수직적인 성직계급제도와 관료주의적인 관행이 만연해 있던 16세기에, 그것은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이 신약성경에서 발견해낸 혁명적인 진리였다. 제사장이란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다리를 놓는 자"(bridge-builder)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시던 순간, 성경은 "성소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마 27:51)고 기록하고 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진 것이다. 구약의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를 이제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찢으셨음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 분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단번에 죄값을 모두 치르신 제사장적인 행위(priestly act)였다. 예수님은 "영원한 속죄"를 위하여 동물의 피가 아니라 죄없는 자기의 피를 흘리신 것이다(히 9:11-12). 그 분은 스스로 제물이 되어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셨으며,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셨다(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면 어느 누구나 그 분을 통하여 담대하게 성소(Holy Place)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다(히 10:19-21). 이제 후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모든 신자들이 공개적으로 그리고 평등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H. Leon McBeth, "제3장 하나님은 영혼의 유능성과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의 원리를 주셨다," Charles W. Deweese, 『21세기 속의 1세기 신앙』 [Defining Baptist Distinctives], 김승진 역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2009], 112).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사장 직분(priesthood)을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공유하신다.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으로 불리게 되었고(벧전 2:5, 9; 계 1:6; 5:10; 20:6), "왕 같은 제사장"(Royal Priest)으로서의 특권뿐 아니라 "섬기는 자 제사장"(Servant Priest)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지게 되었다(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Priesthood of All Believers) 개념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적이다. 이 개념은 "각 신자의 제사장 직분"(Priesthood of Each Believer)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다. 따라서 이 교리가 잘못 해석되거나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스스로 제사장이니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다. 나는 스스로 제사장이니 내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없다"(R. Stanton Norman, The Baptist Way: Distinctives of a Baptist Church [Nashville: Broadman & Holman, 2005], 97)는 식으로 이 교리가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이 자기중심적인 개인주의, 무책임한 (이단적인) 성서해석, 공동체적인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 신학적 무정부주의 등을 조장하는 것으로 오도되어서는 안 된다(Ibid., 97-8).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은 신자 개인의 신분적인 특권을 강조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신자들의 섬김과 봉사를 강조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교리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분별하기 위해서 제사장으로서의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필자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기 전에 어느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들은 말인데 지금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 감정적으로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부흥강사는 "평신도 여러분들은 제물이예요 제물! 목사님들은 제사장입니다. 여러분들이 향기나는 제물되어서 제사장에게 드리세요! 여러분들이 축복받는 비결입니다"라고 외쳤다. 평신도들이 제물이면 목사도 제물이고, 목사가 제사장이면 평신도들도 제사장인 것이다. 제사장을 구약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생긴 심각한 오해였던 것이다.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 교리의 현대적인 의미는 "모든 신자들이 목회자다"(All the believers are ministers)라는 의식이다. 지역교회의 모든 교회회원들이 담임목회자의 지도 아래 그리고 담임목회자와 더불어, 교회의 전체 목회사역을 함께 감당하는 것이다. "전 신자의 제자화"라고 부를 수도 있고, "전 신자의 사역자화"라고 부를 수도 있다. 교회는 어제나 오늘이나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지체들이,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섬기기를 요청하고 있다. 그래야만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다. 담임목회자는 자신만이 제사장이요 목회자라는 생각을 버리고, 모든 교우들이 목회의 동역자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그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 미국의 어느 침례교회 주보에서 봉사자들의 명단 맨 위에 그리고 담임목사 이름 위에 "목회자들: 모든 교회회원들"(Ministers: All the Church Members)이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담임목회자 자신부터 이러한 민주적인 의식을 가져야 한다.

5. 기복신앙과 신약성서적인 신령한 복

한국교회는 신약성서적인 복(福, Blessing)의 개념과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회를 염려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가장 심각한 문제로 여기는 것들 중 하나는 바로 기복신앙이다. "기복신앙"(祈福信仰)이란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만을 간절히 기원하는 신앙인데, 이것은 한국의 전통적인 샤머니즘(Shamanism) 영성과 결합하여 한국인들의 심성을 지배하고 있다. 대체로 한국 사람들은 복(福)을 너무나 좋아 한다. 그래서 밥사발이나 장롱이나 이불이나 돗자리나 여인의 한복 옷고름에도 福 자를 새겨넣는다. 개신교 신앙인들도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는 말을 쉽게 한다. 그래서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삼하 7:29)와 같은 글귀가 들어간 액자를 응접실에 걸어 놓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소유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다. 그래서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복을 간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복이 어떤 복이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성경이 말하는 복과 신약성경이 말하는 복의 개념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구약에서도 물론 영적이고 비가시적인 복에 관해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구약이 말하는 복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것이다. 집에서 키우던 양 100마리가 500마리가 되었다면, 그리고 소유하고 있던 땅 100평이 1,000평으로 늘어나게 되었다면, 더 나아가서 더 많은 자식들을 얻게 되었다면,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고 여겼다. 소유의 증식, 소유지의 확장, 자녀의 생산, 민족의 번영 등 물질적이고 가시적이고 현세적인 복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여겼다(창 12:1-3; 26:12-14; 28:3-4 등).

욥기의 결론이 구약이 말하는 복을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욥 42:10, 12-13). 구약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현세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비해 신약의 종교는 인간의 영적인 삶에 우선적인 강조점이 놓여 있다(송인규, "복, 제대로 알고 믿자," 미주뉴스앤조이,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27). 거듭 강조해서 말하지만 교회는 신약의 산물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분의 부활을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요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마음속에 모신 사람들의 성령공동체다. 기독교는 엄밀히 말하면 신약의 종교이지 구약의 종교가 아니며 은혜의 종교이지 율법의 종교가 아니다. 구약의 사건들과 교훈들은 신약적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중요한 낱말은 "먼저"와 "그리하면"이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마태복음 5장 31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모든 것"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즉 인간의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필요를 의미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이러한 필요도 공급받아야 한다는 것을 아시지만(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일차적으로 추구해야 할 복은 영원하고 영적이고 비가시적인 복(eternal, spiritual and invisible blessing)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복(temporary, material and visible blessing)은 당연히 뒤따라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그리하면" 현세적인 필요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약속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상수훈(마 5-7장)에서 여덟 가지 복(八福)을 말씀하셨는데, 어느 하나도 현세적이거나 물질적이거나 가시적인 복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마 5:3-10)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어느 하나도 기복주의 신앙이 추구하는 현세적인 복이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간의 내면상태, 조건과 환경을 초월하는 믿음의 상태,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령충만함 속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상태를 복을 받아 누리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every spiritual blessing)을 이미 받은 자들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이어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것, 예정하심을 받은 것, 그래서 속량 곧 죄사함을 받은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엡 1:4-7).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을 갈구해야 하는 자들이 아니라, 이미 엄청난 복을 받아 누리고 있음을 깊이 깨닫고 이런 복을 주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해야 하는 자들인 것이다.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며(살전 5:18) 살면 하나님께서는 현세적인 복까지 덤으로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불신자들)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로부터 조롱을 당하는 이유는, 불신자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자신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귀하게 여기고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자신들과 다르지 않을 때,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존경과 부러움은커녕 멸시와 조롱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가치있게 여기며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필자는 소년시절에 그 부모가 과수원을 경영하던 한 친구 집에 놀러갔던 적이 있었다. 점심을 먹고 그 친구와 함께 과수원 원두막에 올라가서 과일을 먹으며 놀았는데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거기서는 사과밭 내에서 돼지들을 방목하여 키우고 있었다. 돼지들은 땅에 떨어져 있는 상하고 썩은 사과들을 열심히 주워 먹고 있었다. 그런데 사과나무에는 탐스러운 사과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어서 가지들이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돼지들이 고개만 약간 들면 얼마든지 싱싱한 과일들을 마음껏 따먹을 수 있었지만, 그들은 머리를 땅에 처박고 땅바닥만을 내려다보며 썩은 과일들만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돼지들은 위를 쳐다볼 줄을 몰랐다.

불신자들은 한번 출생한 자들이다. 어머니로부터 육체적인 출생을 한다. 그런데 어머니의 육체는 흙이다. 모든 사람들은 흙에서 그리고 땅(아래)에서 태어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두 번 출생한 자들이다. 두 개의 생일(육체적 생일과 영적인 생일)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물론 영적인 생일이 몇월 몇일인지를 기억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현재 하늘로부터 위에서 영적으로 거듭 태어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들(고후 5:17)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위의 것을 찾으며 땅의 것을 찾지 말아야 한다(골 3:1-4). 땅의 것만 생각하고 땅의 것만 찾는 사람은 상하고 썩은 사과만을 찾아다니는 과수원의 돼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그리스도인은 돼지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된다. 땅의 것은 결코 영원하지 않고 결국은 썩어지고 없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의 시민권자로서 천국의 가치관, 현세적이고 세상적인 복이 아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사모하는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우리나라 개신교 기독교는 미국의 프로테스탄트교회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선교 초기에는 주로 미국 선교사들이 대거 한반도에 들어와서 포교활동을 하였고, 최근에도 우리나라 교회는 신학적으로나 목회적으로 미국 교회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고 있다. 그런데 미국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와 실용주의 철학에 물들어 있다. 1960년대부터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던 "교회성장운동"(Church Growth Movement)도 그것이 교회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력을 부인할 수 없지만, 다른 한편 그것이 끼친 병폐도 없지 않았다. 수적인 교회성장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대형교회나 초대형교회를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이 이상적인 모본(idealistic example)으로 삼도록 부추긴 것도 사실이다. 자본주의적인 물량주의, 실용주의적인 선교, 파종의 신학(Sowing Theology)보다는 효율과 결과만을 중시하는 추수의 신학(Harvesting Theology)에 대한 지나친 강조, 건강한 교회보다는 성장하는 교회를 더 중시하는 태도 등은 미국 기독교가 우리나라 개신교회에 남겨준 유행성 전염병과 같다.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번영의 신학(Theology of Prosperity)이나 성공주의를 부추기는 신앙(Faith Promoting Success)은 반쪽짜리 복음, 아니 가짜 짝퉁 복음에 불과하다. 경제적인 번영, 세상적인 성공, 부와 건강, 안락한 삶 등은 신약성경이 말하는 복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선물인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약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러나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누리게 된 신령한 복과 앞으로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복(하늘나라의 상급)과 비교하면, 그것들은 너무나 하찮은 것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 받고, 구원받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고, 성령님이 내주하시고, 매일 주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천국을 기다리는 삶을 사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엄청난 복인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평안"(Peace)을 약속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누리는 마음의 평안만큼 큰 복이 있는가? 세상이 주는 것(부, 지식, 명예, 성공, 건강 등)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복을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받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신령한 복"을 받아 누리고 있음을 깨닫고 진정으로 감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다. 거저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복을 위해 목숨을 걸어서야 되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이 꼭 가난하게 살아야 신령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정직하게 진실하게 산다면, 핍박을 받을 수도 있고 희생을 당할 수도 있고 가난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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