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주님을 기다리며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입력 Dec 05, 2017 07:50 AM KST

마가복음서 16장 1-8절, 데살로니가전서 5장 1-11절

[대림절과 예배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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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김진한 기자)
▲생명사랑교회 한문덕 목사

오늘부터 대림절기가 시작됩니다. 대림절기는 교회력의 시작입니다. 우리나라는 1896년 서양의 양력을 공식적으로 채택해서 1월부터 한 해를 시작합니다. 원래 고대 로마 초기에는 춘분일, 즉 봄이 시작되는 3월을 1년의 시작으로 삼아 1년이 10개월밖에 없었는데, 기원전 710년 경 누마(Numa)왕이 2개월을 추가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6년경에 계절과 달력을 일치시키기 위해 지금의 1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자리 잡게 하였습니다. 영어로 1월을 뜻하는 재뉴어리(January)라는 말은 라틴어로 "문(門)"을 의미하는 "야누스"(Janus)에서 온 것입니다. 로마에서 야누스는 "문의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두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야누스가 새벽에는 천국의 문을 열어 아침을 오게 하고, 황혼에는 천국의 문을 닫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한 해를 여는 1월이 재뉴어리가 된 것입니다.

로마의 율리우스가 제정한 달력과 다르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성령 강림,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나라를 생각하며 성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억하는 교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배 인사를 드릴 때마다 성도님들에게 오늘은 교회력의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알려 드리고 주보에도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탄생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로부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대림절과 성탄절, 주현절과 사순절, 부활절기를 지나 성령강림절과 창조절의 순서로 우리는 믿음의 한해를 살고 그렇게 우리의 신앙은 한 해를 보낼 때마다 깊어지는 것입니다.

대림절 동안에 교인 전체 카톡을 통해 매일 아침 묵상을 드리겠습니다. 작년 대림절에는 산상설교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았는데, 올해는 요한복음서의 말씀을 새겨 보고자 합니다. 여러 번 광고 드렸지만 대림절을 맞아 예배 순서도 바뀌고, 주보도 한 장 더 늘어났습니다. 한 장 더 늘어난 주보에는 목회마당, 함께 중보 기도할 제목, 우리 교회가 선교후원하는 곳, 성경 읽기표(2018년 사역자 소개), 한 달 일정이 들어가 있습니다. 목회마당을 통해서는 신앙서적을 소개하거나,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신앙에 대해서 안내를 할 계획입니다. 평신도 중심의 사역을 위해서 우리가 조금 더 탄탄한 신앙을 지닐 필요가 있는데, 매주 주보를 통해서도 여러분은 다양한 방식으로 신앙훈련을 하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좋은 의견을 주시고, 목회마당에 수필이나 신앙 간증, 책 소개 등등을 통해서 참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가치들과 의미들, 즉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들을 강화해 갑니다. 가장 바람직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를 묻는 지난 설문조사에서 여러분들은 압도적으로 예배가 제일 중요하고, 설교가 좋아야 한다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 주에 말씀 드렸듯이, 우리들은 그동안 예배에 대해 진지하게 배우고 고민하는 시간들을 많이 가지지 못했고, 그래서 우리 교회 또한 예배의 갱신이 필요합니다.

제가 부임하고 지난 2년간 예배 인사와 파송사를 첨가한 것 외에는 예배 순서를 거의 고치지 않았는데, 이번에 대림절을 맞아 크게 바꾸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예배는 고대 근동의 다른 종교의 의례와 비교했을 때 근원부터 다릅니다. 고대 근동과 로마의 신들은 여러 명이었고, 인간들과 비슷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으며 신들의 감정의 좋고 나쁨에 따라 복(福)과 재앙(禍)을 내리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은 신의 마음에 들기 위해 다양한 의식을 행하고 화를 면하기 위해 제물을 바쳤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샤머니즘 전통이 지향했던 제재초복(除災招福), 재앙을 제거하고 복을 불러온다는 형식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예배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마저 내어준 그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독일말로 예배를 고테스딘스트(Gottesdienst)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하나님을 섬김," 혹은 "하나님의 섬김"으로도 번역 가능합니다. 이 말이 잘 보여 주듯이, 그리스도교 예배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섬김의 사랑에 감동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틀과 각 구성요소들의 정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의 전에 모입니다. 말씀과 성만찬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세상으로 보내어집니다. 이것이 예배의 가장 중요한 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 순서도 이제 모임 예전과 만남의 예전, 그리고 보냄의 예전으로 구성됩니다.

소식을 알리는 광고의 형식은 예배 뒤로 뺐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장 23-24절에 따라 믿음의 형제자매와 불화한 일이 있는 상태에서 예배할 수는 없기 때문에 평화의 인사는 그대로 예배 순서 안에 있습니다. 신앙고백은 설교 뒤, 성찬식 앞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신앙고백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양심을 걸고 그리스도교 진리에 헌신하겠다는 다짐이자 결단입니다. 그런데 그 결단을 예배의 앞부분에 두면 아직 신앙이 무르익지 않은 구도자들이나, 태신자, 초보 신자들은 신앙고백 앞에서 주저하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 없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 신앙고백은 하나님 말씀을 들은 후에야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신앙고백을 한 사람만이 주의 만찬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은 설교 뒤, 성찬식 앞에 와야 합니다.

성찬식이 없는 예배에서는 봉헌의 순서가 성찬식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봉헌의 순서도 말씀 뒤로 가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은 또 아들 예수의 삶을 통해 자신을 피조물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우리 또한 우리의 삶과 물질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번의 변화 중에 또 큰 것은 예배 순서의 언어들을 우리말들로 바꿔 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개회찬송'은 '모임찬송'으로, '결단찬송'은 '보냄찬송'으로, '성경봉독'은 '하늘말씀읽기'로, '설교'는 '말씀나누기'로, '파송사'는 '보냄의 말'로, '친교와 소식'은 '사귐과 알림'으로 바꾸었습니다. 교독문은 원래 시편의 찬송이 주를 이루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교독문은 성서의 여러 구절들이 있으므로 '성구교독'으로 바꾸고, '기도'는 '목회기도'로 바꾸었습니다. 예배 중에 하는 기도는 교회 전체의 목회를 생각하며 교인 한 명 한 명의 마음들을 모아 드리는 기도입니다.

'봉헌기도'는 '감사기도'로 말을 바꾸었습니다. 그동안은 봉헌기도 전에 감사헌금을 드린 성도들의 이름을 불러서 알렸지만, 이제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하는데, 예물 드린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다만 감사기도는 중보기도의 성격이 있으므로, 모두가 알고 함께 기도해야 하는 내용들은 제가 알리고 기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전에 축복기도를 마치고 '후주'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말씀담기'라고 고쳤습니다. 예배를 마치면 오늘 함께 나눈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일주일의 삶도 주님의 사도로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이 되도록 묵상하시면 좋겠습니다. 교회의 공동관심사는 사귐과 알림 시간을 통하여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바로 일어서지 마시고, 교회의 전체 활동과 알림시간에도 함께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재현]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새롭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의 삶을 본받기 위함입니다. 예배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모임 예전은 만남을 위한 마음의 준비이며, 보냄의 예전은 하나님을 만난 후 새사람이 되어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 것입니다. 예배 할 때 이런 것들을 마음속으로 의식해야 합니다. 그냥 습관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데살로니가 전서의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깨어 있으며, 정신을 차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가슴막이 갑옷을 만들어 입고, 소망으로 구원의 투구를 쓰라고 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빛의 자녀와 낮의 자녀이며, 그래서 주님의 날이 도둑처럼 올 때에도 멸망에 이르지 않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 오늘날 많은 이들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면서 세상에 취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마저도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모습들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는데,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 손을 잡고, 다른 것에 한눈을 팔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을 세 차례에 걸쳐 제자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런 경종을 울리는 말씀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잡히셨을 때에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세상 물결에 휩쓸리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무덤까지 찾아온 여성들은 모두 도망간 남성 제자들보다는 훨씬 믿음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해가 돋을 때에 무덤에 왔으니, 어쩌면 밤새 걸어왔는지도 모릅니다. 로마의 십자가 처형을 당한 사람을 찾아오는 것은 자신도 그런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으나, 이 여인들은 갈릴리부터 계속 섬기던 여인이었고,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결론은 이 여인들의 믿음도 아직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젊은 남자의 말에 넋을 잃고 벌벌 떨면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들은 무덤을 막아 놓은 돌을 걱정했지만, 어쩌면 이들이 열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자신들의 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처녀의 몸에서 새로운 잉태를 가능하게 하시고, 죽음의 무덤에서 새로운 삶의 부활을 만들어 내시는데도 여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가복음서는 원래 16장 8절에서 끝납니다. 그러니까 오늘 읽은 부분이 마가복음서의 마지막입니다. 9절부터 20절의 말씀은 후대에 다른 사람이 마태와 누가복음서를 보고 덧붙여 놓은 것입니다. 마가복음서가 16장 8절에서 끝났다면 마가복음서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들은 사람은 이 여인들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젊은 남자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들의 리더였던 베드로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먼저 갈릴리에 가셨다는 이야기를 하라고 했지만, 이 여성들은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했다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서를 읽은 독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게 됩니다. 마가복음서를 읽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다시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마가복음서 저자가 의도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몰라도 최소한 마가복음서를 읽은 이들은 예수가 부활하셨고, 갈릴리에 가셨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과 갈릴리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오순절 성령 사건을 통하여 바로 거기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하지만 마가복음서는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의 첫 사역지였던 갈릴리로 가서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이 하셨던 그 기적과 말씀들과 평등의 식사를 나누는 것이라고 마가복음서는 말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서를 펴면 1장 1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그런데 원문을 보면 "~은 이러하다"가 없습니다. 마치 책의 제목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즉 마가복음서는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펼치신 복음의 시작일 뿐 진짜 본론의 이야기는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론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갈릴리에서 벌였던 온갖 기적과 이적,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표적과 귀신과 온갖 못된 것들의 추방, 함께 나누는 식사와 예수님의 입을 통해 들리는 귀한 하나님의 말씀이 펼쳐지는 그 곳이 복음의 본론이라고 마가는 말하고 싶었고, 바로 마가교회가 그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설교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보며, 그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지니게 됩니다. 그렇게 예배를 통해 거듭난 우리는 저 세상에서 예수의 복음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론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사랑교회는 평신도 중심의 사역을 통해 선교 사명에 충실하려는 교회입니다. 저를 담임목사로 여러분이 청빙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저 세상에 나아가서 소금과 빛이 되고, 하나님의 선교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저 멀리 아시아나 인도, 외딴 섬으로 찾아가는 것만이 선교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사실 복음의 소식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 한 가운데서 늘 모범이 되고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통해 삶의 바른 길이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깨닫기를 바랍니다.

저는 가끔 생각해 봅니다. 만약 제가 어린 시절 고향에 있는 교하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를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저는 세상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진리를 깨달았고, 하나님의 큰 섭리와 계획 속에서 나 자신의 관점을 보다 넓힐 수 있었습니다. 좀 더 깊이 있고 고귀한 삶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고, 그런 삶으로 나아갈 때 늘 동행해 주시는 주님 예수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삶의 매순간을 진지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갈릴리로 가셔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복음의 기쁜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오늘 여인들처럼 그저 벌벌 떨면서 이 세상에서 허우적거리겠습니까?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갈릴리는 어디인가요? 다시 한 번 바울 사도의 조언을 되새겨 봅시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생생하게 살아 넘치는 곳, 서로 격려하고 서로 덕을 세워 가는 곳,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지 않고 더욱 더 정신을 차려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 바로 그곳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갈릴리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우리가 모인 이곳이 갈릴리여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무덤의 돌문보다도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고, 낮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다른 한편으로 이미 오신 주님을 기억하며 사는 길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찬양을 올립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늘 함께 하시고,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날까지 우리가 늘 깨어 있고, 빛의 자녀, 낮의 자녀로 살게 하옵소서. 믿음을 굳세게 하고, 애써 사랑하며, 희망으로 인내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갈릴리가 되게 하시고,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소식이 들리게 하옵소서. 생명을 살리고 사랑이 넘치는 곳 만들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음을 압니다. 주신 소명을 우리가 최선을 다해 감당하게 하옵소서. 대림절 기간 동안 설레는 마음으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절제된 삶으로 우리의 지난날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7.12.3.)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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