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세상나라는 주님의 것
2017년 11월 26일 청파감리교회 설교자 김기석 목사

입력 Dec 04, 2017 04:31 PM KST

성경본문

계11:15-19

(2017/11/26, 왕국주일)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 때에 하늘에서 큰 소리가 났습니다. "세상 나라는 우리 주님의 것이 되고,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는 스물네 장로도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말하였습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던 전능하신 분, 주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크신 권능을 잡으셔서 다스리기 시작하셨습니다. 뭇 민족이 이것에 분개하였으나 오히려 그들이 주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이제는 죽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을 때가 왔습니다. 주님의 종 예언자들과 성도들과 작은 사람이든 큰 사람이든 주님 이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실 때가 왔습니다.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킬 때가 왔습니다." 그러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였습니다. 그 때에 번개가 치고, 요란한 소리와 천둥소리가 나고, 지진이 일어나고, 큰 우박이 쏟아졌습니다.]

설교문

* 티라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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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순절기의 마지막 주일이자 대림절 직전 주일인 오늘은 왕국주일입니다. 주님의 왕 되심을 기억하며 우리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맡겨야 할 때입니다. 마음 졸이며 수능 시험을 대비하던 수험생들과 학부모들도 잠시 지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이탈리아 엄마들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시험을 못 보고 오면 "다이, 수Dai, su!"라고 말한답니다. 죽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힘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엄마는 풀죽은 아이를 데리고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나 과자와 조각 케이크를 파는 가게로 데리고 가서 단 것을 사 먹입니다. 그중에서도 우울할 때 먹기 좋은 것이 '티라미수'입니다. 부드럽고 달콤하여 마음의 쓰라림을 잊게 한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어로 티라미수는 '끌어당기다, 잡아끌다'는 의미의 타동사 '티라레tirare'의 2인칭 명령 형태인 '티라tira'에 직접 목적어 '미mi'가 결합하고, 여기에 방향을 가리키는 '위에, 위로'를 의미하는 전치사 '수su'가 합쳐져 '나를 위로 끌어올리다'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합니다(한동일, <라틴어 수업>, 흐름출판, 2017년 9월 9일, p.183-4).

복잡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것은 '나를 위로 끌어올리다'라는 뜻입니다. 실망, 낙심, 절망, 우울에 잠기지 말고 자꾸 우리 마음을 위로 들어 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우리가 되뇌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다가오다니 좀 쓰리고 힘에 겹군. 하지만 나는 이런 문제보다 큰 존재야. 결국 이겨낼 거야.'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하나님의 은총을 알고 또 믿기 때문입니다. 현실 속에서 겪는 이런저런 어려움들은 우리에게서 더 큰 세상을 향한 비전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그 문제에 몰두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 생명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신앙이란 '먼 빛의 시선'입니다.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장자莊子는 기원전 370년에서 280년 무렵 중국 송나라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시기를 가리켜 흔히 전국시대라고 합니다. 전쟁과 살육, 권모와 지략으로 뒤범벅되었던 혼란기입니다. 그는 약소국 송나라에 살면서 어떻게 하면 인간이 근본적인 자유를 누릴까 고민했습니다. 단순히 현실을 부정하거나 초월해버리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자유롭게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습니다(憨山 지음, <감산의 莊子 풀이>, 오진탁 옮김, 서광사, 1990년 9월 20일, p.3, 옮긴이의 말 참고). 장자는 총 33편으로 되어 있는데, 그 첫 편이 유명합니다.

"북명(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었다. 이름은 곤(鯤)이다. 곤의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물고기가 변해 새가 되었는데 새의 이름은 붕(鵬)이다. 붕의 등넓이도 몇 천리에 달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붕이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을 가득 뒤덮은 구름을 연상시킨다. 붕은 바다 기운을 타고 남명으로 옮아가려 한다. 남명은 바다이다."(위의 책, p.14)

이 이야기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할 시간은 없습니다. 다만 현실에 잔뜩 주눅이 든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장자는 넓고 광대한 세상을 가리켜 보이고 있다는 말만 하고 싶습니다. 로마 제국의 가혹한 억압에 시달리고 있던 식민지 백성 요한도 유배지에서 놀라운 비전을 봅니다. 지금은 군사력으로 세상을 압도하는 로마가 득세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는 확신했습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계1:8). 이 짤막한 구절 속에 담긴 혁명성이 놀랍습니다. 삶이 답답할 때마다 눈을 들어 이 장대한 세상에 접속해야 합니다.

* 종말을 앞둔 것 같은 세상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이지만 옛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기 직전의 시간은 혼란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의롭고 바르게 살려는 이들이 큰 어려움을 겪곤 합니다. 견디기 어려운 박해가 닥쳐오기도 합니다. 묵시문학은 바로 그 상황에서 탄생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사는 사람은 그 시련의 시간이 잉태하고 있는 새로운 역사를 내다봅니다. 저는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문명의 기운이 태동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도처에서 종말의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종말의 징조를 상세하게 열거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먼저 잘못된 사랑에 빠져듭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불경하고, 무정하고, 무절제하며 난폭합니다. 그리고 신의를 배신합니다(딤후3:1-5). 날마다 뉴스 보는 게 겁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만 눈길을 주면 우리 영혼에 퍼런 멍이 들게 마련입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줄어듭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세상이 어떤 어려움을 겪을지 소상히 밝히면서도, 그 세상을 살아갈 성도들에게 희망의 단초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혼란스러운 이 세상과 대비되는 하늘의 조화로운 세계입니다.

요한은 비전 가운데 보좌에 앉으신 분과 그 옆에 있는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을 봅니다. 일찍이 인도의 선교사였던 스탠리 존스는 기독교를 가리켜 상처 입은 어린 양을 우주의 중심에 놓는 종교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주님, 그로 인해 상처입고 또 죽임 당한 주님이 보좌 옆에 있다는 사실이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세상의 중심은 연약한 자, 상처 입은 이여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보좌 주변에는 앞뒤에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이 있고, 또 흰 옷을 입고 금 면류관을 쓴 장로 스물네 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천상의 세계를 가득 채우는 것은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미하는 노랫소리입니다. 그 세계를 본 사람은 땅의 현실로 인해 낙담하지 않습니다. 고난의 쓰라림조차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쓰리고 아프지만 궁극적 승리를 확신하기에 있기에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를 믿는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의 인내가 필요하다"(계14:12)고 말합니다.

* 왕 되신 주님

요한은 일곱 봉인에 담긴 심판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어 천사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땅에 대한 심판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여기서 그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습니다. 간략히 요약하자면 생명을 위축시키고, 파괴하는 일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일곱째 천사의 나팔소리가 들려옵니다. 나팔소리와 더불어 하늘에서 큰 소리가 들려옵니다.

"세상 나라는 우리 주님의 것이 되고,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11:15b)

하나님의 지배는 하늘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요한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날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인간의 뜻, 강자들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 그리스도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바야흐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스림은 영원할 것입니다. 일찍이 주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에 사탄은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마4:8-9). 달콤한 유혹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배의 욕구가 있습니다. 권력에의 의지(will tp power)처럼 매혹적인 유혹이 또 있을까요? 자기의 뜻을 누군가에게 강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즐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탄은 바로 그런 힘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하게 그 제안을 거절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마4:10)

주님은 광야에서 사탄이 제안했던 것을 결국은 성취하셨습니다. 그것은 지배의 욕망을 성취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세상을 섬겼고, 하나님은 그를 부활시킴으로 사랑이 궁극적인 가치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신신당부한 것이 무엇입니까? 힘을 숭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던가요?

"뭇 민족들의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한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눅22:25-26)

우리가 정말 예수를 우리 구주로 믿는다면, 주님의 통치를 소망한다면, 군림하려는 욕망, 은인으로 행세하려는 욕망과 작별해야 합니다. 최근에 저의 영적 벗인 천정근 목사가 쓴 '한국교회의 세 가지 근심'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읽었습니다. 그는 한국교회에 세 가지 근심거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목사된 것, 둘째 그 사람이 목회에 성공한 것 셋째 세속적으로 성공하면 의례히 교계의 원로(元老)로 행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그가 제시하는 것은 "자기를 성찰할 줄 모르는 처신의 부박함"입니다. 명성교회의 세습을 비판하기 위한 글이었지만, 탐심과 허위의식을 단호히 부정하지 못할 때 목사들은 예수의 길에서 멀어진다는 그의 말이 크게 들려왔습니다(국민일보, 2017년 11월 24일자). 가슴이 서늘해지는 진단입니다. 주님의 지배는 섬김과 자기 희생을 통한 지배입니다.

* 스물네 장로의 경배

보좌 앞에 앉아 있던 스물네 장로가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던 전능하신 분, 주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크신 권능을 잡으셔서 다스리기 시작하셨습니다."(11:17)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 미묘한 변화가 있음을 눈치채셨나요? 4장에 나오는 네 생물의 노래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고백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분, 주 하나님! 전에도 계셨으며, 지금도 계시며, 또 장차 오실 분이십니다."(4:8b) 11장의 고백에서 빠진 것은 "장차 오실 분"이라는 표현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세상 경륜이 지금 이 땅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스물 네 장로의 노래에서 우리는 주님의 통치가 세 가지 차원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주님은 크신 권능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둘째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셋째,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상을 주십니다.

스물네 장로의 노래는 4장과 5장 그리고 11장에 나오는데, 각각 초점이 다릅니다. 4장 11절에서 그들은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5장 9절에서는 당신의 피로 모든 민족을 구속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11장 17절에서는 크신 권능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왕권을 찬양합니다. 놀라운 발전입니다. 요한이 이런 비전을 본 것은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로마의 가혹하고 압도적인 통치가 온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 때였습니다. 지상의 나라가 아무리 강력해도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요한은 그런 비전을 1세기 성도들은 물론 현실의 어둠에 사로잡히곤 하는 이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주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을 모두가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힘으로 세상을 억압하던 이들은 주님의 길을 한사코 거역합니다. 적개심을 드러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힘을 숭상하는 이들은 '지붕의 풀처럼 자라기도 전에 마를 것'(시129:6)입니다.

스물네 장로의 노래가 끝나면서 요한은 놀라운 비전을 봅니다. "그러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였습니다"(11:19).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이 낯설게 다가옵니다. 계시록 21장에서 요한은 하나님 나라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21:22)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은 해와 달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도성을 비추고, 어린 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곳에는 밤도 없습니다. 그런데 11장에서 요한은 하늘에 있는 성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순처럼 보입니다. 이 대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기 유대교의 전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전의 가장 내밀한 지성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언약궤입니다. 그 안에는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의 파괴와 더불어 사라진 언약궤가 언젠가 이 세상에 나타날 때가 올 것이고,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라고 믿었습니다. 외경인 마카베오기 하권 2장에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나라가 멸망할 거라는 신탁을 받은 후에 사람들에게 성막과 언약궤를 메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모세가 올라가 하나님을 만난 그 산으로 간 그는 동굴 하나를 발견하고는, 거기에 성막과 언약궤, 그리고 분향단을 안치하고 입구를 막았습니다. 함께 갔던 사람들이 나중에 길을 표시하려고 그 동굴을 찾아봤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을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그 장소는 하나님께서 백성을 다시 모으시어 자비를 보이실 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때에 가서야 주님께서는 저 물건들을 드러내실 것이다."(2마카2:7b-8a)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나타났다는 말은 바로 이런 유대인들의 전설을 염두에 둘 때 비로소 이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바야흐로 하나님의 자비의 시간, 직접적인 통치의 때가 시작되었음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9절에 나오는 번개, 요란한 소리와 천둥 소리, 지진과 우박은 바로 하나님의 극적인 임재를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소란해도, 현실이 아무리 암담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주님을 우리 왕으로 모신다면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를 혹은 무엇을 우리 왕으로 모시고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바야흐로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우리 삶을 가지런히 할 때입니다. 주님 안에서 겸허하면서도 당당하게 주어진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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