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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험악한 시절, 종교는 어떤 구실을 해야 하는가?

영화 <1987>을 통해 재조명해보는 종교의 역할

1987
(Photo : ⓒ CJ엔터테인먼트)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을 다룬 영화 <1987>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영화는 고 박종철 열사가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됐는지, 그리고 전두환 정권은 이를 어떻게 은폐하려 했는지를 생생하게 그린다. '마이마이', 'TV가이드, '선데이서울' 등 198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소품들을 보는 건 또 다른 재미다.

그런데 엉뚱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과연 종교가 제 구실을 하고 있는건가 하는 의문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1987>엔 종교 코드가 곳곳에 등장한다. 잠깐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박처원(김윤석) 치안본부 5차장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지휘하며 민주화운동가 김정남(설경구) 검거에 수사력을 집중한다. 김정남은 민주화운동의 핵심 브레인으로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 김영삼의 연설문을 써주기도 했다. 박 처장은 김정남이 김일성의 지령을 받는 간첩으로 지목하고, 그를 검거하면서 김대중·김영삼까지 함께 엮으려 한다.

이러자 김정남은 대공분실의 수사망을 피해 사찰에 은신한다. 대공분실은 김정남이 사찰에 은신해 있음을 확인하고 검거를 시도하나 결국 실패하고 만다.

김정남은 대공분실의 추적을 피해 향림교회로 거처를 옮긴다. 아마 이 대목은 한국기독교장로회 산하 명동 향린교회에서 모티브를 얻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다. 향림교회 옆에 새겨진 로고가 보수 예장합동 교단의 로고여서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예장합동은 민주화 운동과는 무관하다. 고증에 보다 심혈을 기울였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대공분실 수사관들은 집요한 추적 끝에 김정남이 향림교회에 은신해 있음을 알아내고 교회로 들이닥친다. 이러자 담임목사는 수사관을 막아서다 고초를 당한다. 한편 명동성당에서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전말을 폭로한다.

6월 민주항쟁에서 도피성 했던 종교, 지금은?

실제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종교는 '도피성' 역할을 했다.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학생들은 백골단(시위진압경찰)을 피해 서울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관이나 명동성당으로 피신했다. 이때 기독교회관에 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와 명동성당 사제들은 공권력의 진입을 막는 한편, 학생 시위대의 집회와 안전한 귀가를 책임졌다. 한편 6·10항쟁은 서울 정동 대한성공회 주교좌교회에서 처음 불붙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30년의 시간이 흘렀다. 정확하게 한 세대의 시간이 흐른 셈이다. 특히 지난 9년 동안의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에서는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징후가 역력했다.

이 와중에 종교는 도피성의 역할을 했었던가? 답은 '아니오'다. 적어도 종교는 지난 보수정권에서 도피성 역할을 스스로 걷어 찼다.

<1987>에서 김정남이 사찰에 은신한 장면에서 2015년 도심 대규모 시위를 주동했다는 혐의로 당국의 수배를 받은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로 은신한 일이 겹쳐 보인다.

경찰은 한 전 위원장 검거를 위해 대규모 병력을 조계사 주변에 배치해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놀라운 건 조계사 측의 태도였다. 당시 주지인 지현 스님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번처럼 충분한 검토 없이 누군가 사찰에 들어오고, 눌러앉고, 정치투쟁을 벌이면 대책이 없다. 엄격한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실상 출입 자격을 제한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현장에서 접한 신도들의 반응은 더욱 놀라웠다. 경찰은 공공연히 공권력 투입을 압박했고, 취재진들이 조계사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때 몇몇 조계사 신도들은 취재진들을 향해 거친 어조로 "빨리 나가지, 왜 안나가"나며 소리를 질렀다.

명동성당은 또 어떤가? 명동성당은 2000년 한국통신 노조원들의 농성 이후 도피행위를 불허했다. 이어 2010년 5월31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시국미사를 끝으로 더 이상 명동성당에서 시국미사는 열리지 않았다. 더구나 주변 지역의 대대적인 재개발이 이뤄져 명동성당 들머리는 옛 모습을 크게 잃었다. NCCK 역시 1980년대 민주화 이후 외부지원이 줄면서 영향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지난 해 우리는 민주화운동 3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지난 9년 동안 민주주의의 후퇴를 피부로 느꼈고, 지금 다시 민주주의를 고민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서 종교는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불교든 종단을 막론하고 삿된 권력의 전횡에서 국민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고, 슬펐다.

부디 많은 종교인들이 이 영화를 보기를,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종교가 어떤 구실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지유석 luke.wycliff@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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