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향린교회와 명동성당이 나오는 장면에서 서글펐다
[리뷰]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이 우리에게 던지는 진정한 화두

입력 Jan 09, 2018 07:43 AM KST

1987
(Photo : ⓒ CJ엔터테인먼트)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을 다룬 영화 <1987>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4·13 호헌조치, 6·10항쟁, 그리고 고 이한열 열사 최루탄 피격.

유난히 요동쳤던 1987년을 요약하는 열쇠말들이다.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는 이 키워드들을 충실하게 재현해 낸다.

먼저 이 영화는 1987년 풍속도를 생생히 드러낸다. 배우들의 의상, 소품, 미장센 등등에서 1987년 당시를 재현하기 위해 세심하게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명동에 있던 미도파 백화점과 코리아 극장, 그리고 <선데이서울>, < TV가이드 >, 타이거 운동화 등 '핫'했던 아이템들은 1980년대의 추억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이중 대학입학을 앞둔 연희(김태리)가 삼촌인 한병용(유해진)으로부터 소형 카세트 레코더, 일명 '마이마이'를 선물 받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장면은 지난 날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난 1987년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 시절 마이마이는 요새말로 누구나 '득템'하기 원했던 최고 인기 상품이었다. 가정이 부유한 친구들은 자랑삼아 마이마이를 학교에 가져왔고, 선생님들은 공부에 방해된다며 압수하기 일쑤였다. 내게도 마이마이에 얽힌 기억은 각별하다. 아버님께선 많지 않은 월급에도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마이마이를 선물해주셨고, 난 너무 기쁜 나머지 한동안 마이마이를 끌어안고 잠들곤 했다. 그래서인지 연희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장면을 보면서 그저 흐뭇하기만 했다.

오달수, 설경구, 문성근, 강동원 등 친숙한 명품 배우들이 깜짝 출연하는 장면을 보는 건 또 하나의 묘미다. 특히 강동원이 고 이한열 역을 맡은 건 신의 한수라고 생각한다.

< 1987 >이 그리는 1980년대 풍속도

1987
(Photo : )
▲영화 <1987>은 지금 시대를 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CJ엔터테인먼트

이 영화는 1980년대 당시 검찰의 위상도 엿볼 수 있게 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지휘하는 박처원 치안본부 5차장(김윤석)은 그야말로 무소불위다. 전두환씨의 측근 장세동(문성근) 당시 안기부장도 박 차장을 눈여겨본다. 법체계상 검찰이 수사지휘를 해야하지만, '남영동'쪽은 검찰마저 쥐락펴락한다.

관객에 따라서는 이런 모습이 생소할 수 있겠다. 당시만 해도 검찰의 힘은 지금만큼 세지 않았다. 문민정부 출범 이전까지 검찰은 그저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같은 정보기관의 하수인에 불과했다. 그저 정보기관이 그린 '그림'에 따라 '법적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는 게 검찰의 역할이었다는 말이다. 영화 속에서 공안부 최환 검사(하정우)가 법대로 수사지휘권을 행사하려고 해도, 박 처장은 영장을 찢으며 코웃음을 친다. 뿐만 아니라 이 일로 최 검사는 검사직을 그만둬야 했다. 검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건 군사정권에서 문민정부로 권력이 이양되면서부터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지점은 고 박종철이 어떻게 죽음을 맞았는지, 그리고 고 이한열은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떻게 생을 마쳐야했는지를 묘사한 데 있다. 고 박종철 열사와 고 이한열 열사의 이름은 1987년 민주화운동을 언급하는 사람들의 입에 늘 오르내린다. 친구에게 의지한 채 피를 흘리는 고 이한열 열사의 사진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비극적인 죽음에 이르게 된 상황은 제대로 알려진 바 없었다. 물론 비극적인 죽음을 재현하는 게 유가족들에게나 다른 이들에게 불편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에 힘입어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은 불꽃처럼 타오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고 박종철이 욕조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 그리고 고 이한열이 최루탄에 피격되는 장면은 영화적으로도, 또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맞는 시대를 살고 있나?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질문이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맞는 시대를 살고 있나? 1987년보다 지금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나?'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1987>엔 종교 코드가 곳곳에 등장한다. 박 처장이 지휘하는 남영동 대공분실은 김정남(설경구) 검거에 수사력을 집중한다. 김정남은 민주화운동의 핵심 브레인으로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 김영삼의 연설문을 써주기도 했다. 박 처장은 김정남을 김일성의 지령을 받는 간첩으로 지목하고, 그를 검거하면서 김대중·김영삼까지 함께 엮으려 한다. 김정남은 대공분실의 수사망을 피해 사찰에 은신한다. 대공분실은 김정남이 사찰에 은신해 있음을 확인하고 검거를 시도하나 결국 실패하고 만다.

김정남은 대공분실의 추적을 피해 향린교회로 거처를 옮긴다. 대공분실 수사관들은 그의 소재를 알아내고 교회로 밀고 들어간다. 이러자 담임목사는 수사관들을 막아선다. 한편 명동성당에서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전말을 폭로한다.

실제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종교시설들은 많은 역할을 했다.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학생들은 백골단(시위진압경찰)을 피해 서울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관이나 명동성당으로 피신했다. 이때 기독교회관에 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와 명동성당 사제들은 공권력의 진입을 막는 한편, 학생 시위대의 집회와 안전한 귀가를 책임졌다. 한편 6·10항쟁은 서울 정동 대한성공회 주교좌교회에서 처음 불붙기 시작했다.

유시민 작가는 지난해 12월 15일 tvN의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에 출연해 민주화운동에 얽힌 기억을 털어놓았다. 이때 유 작가는 기독교회관과 명동성당, 성공회 주교좌교회 등을 21세기의 종묘라고 칭했다.

"이 밑에 로비에서는 집회도 하고 그랬어. 구속자 어머니들도 오시고. 그때 여기는 매일 매일이 전쟁터였어. (중략) 경찰이 바로 여기 문 앞까지 왔어. 그런데 들어오지는 못해. NCCK 총무님 나가셔서 잘 이야기해서 '소리지르고 안 할 테니까 너희들(공권력 - 글쓴이)도 가라, 그리고 지하철역까지 배웅해주고 지금 생각해보면 고맙지.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다 받아 주시고."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30년의 시간이 흘렀다. 정확하게 한 세대의 시간이 흐른 셈이다. 이 지점에서 앞서 적은 질문을 다시 적어본다.

지금 우리가 맞는 시대를 살고 있나? 1987년보다 지금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나?

종교가 처한 현실을 생각해 볼 때 이 물음의 답은 '아니오'다. 적어도 지금 종교는 그 역할을 상실했다. 영화에서 김정남이 사찰에 은신한 장면에서 2015년 도심 대규모 시위를 주동했다는 혐의로 당국의 수배를 받은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로 은신한 일이 겹쳐 보인다.

경찰은 한 전 위원장 검거를 위해 대규모 병력을 조계사 주변에 배치해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놀라운 건 조계사 측의 태도였다. 당시 주지인 지현 스님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번처럼 충분한 검토 없이 누군가 사찰에 들어오고, 눌러앉고, 정치투쟁을 벌이면 대책이 없다. 엄격한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실상 출입 자격을 제한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현장에서 접한 신도들의 반응은 더욱 놀라웠다. 경찰은 공공연히 공권력 투입을 압박했고, 취재진들이 조계사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때 몇몇 조계사 신도들은 취재진들을 향해 거친 어조로 "빨리 나가지, 왜 안 나가"나며 소리를 질렀다.

명동성당은 또 어떤가? 명동성당은 2000년 한국통신 노조원들의 농성 이후 성당의 동의 없이는 시위 등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어 2010년 5월31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시국미사를 끝으로 더 이상 명동성당에서 시국미사는 열리지 않았다. 더구나 주변 지역의 대대적인 재개발이 이뤄져 명동성당 들머리는 옛 모습을 크게 잃었다.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 소장은 저서 <가난한 예수>에서 한국 가톨릭이 "국가권력의 박해 때문이 아니라 주로 돈 때문에 한국 가톨릭이 무너지고 있다"고 개탄했다. NCCK 역시 1980년대 민주화 이후 외부지원이 줄면서 영향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최근명동성당측이 <1987> 영화 제작 당시 성당 내부 촬영에 협조했다는 게 알려지며 화제를 모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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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에서 동아일보 윤상삼 기자는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파헤친다. 지금 동아일보는 그 위상이 많이 추락했다. ⓒ CJ엔터테인먼트

다시 말하지만, 지금 종교는 그때와 다르다. 그런데 어디 종교만 이럴까? 영화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특별 취재팀 꾸려 전두환 정권의 고문 실상을 집중 취재하라고 지시한다. 이때 한 기자가 이렇게 묻는다.

"보도지침은 어떻게 하고요?"

편집국장의 어조는 단호했다.

"대학생 한 명이 고문 받다 죽었는데, 보도지침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무조건 들이 받아!"

이랬던 <동아일보>가 2014년 세월호 참사때 304명이, 그것도 대부분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질 고등학생들이 희생됐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박근혜 전 정권을 두둔하고 세월호 유가족들을 폄훼하는데 앞장섰다. 이런 <동아일보>가 이번엔 지난해 12월 14일치 보도에서 "집요하고도 용기 있게 진실을 캐냈던 동아일보 기자들의 노력이 영화 속에서 조명됐다"고 썼다.

그리고 또 어디 <동아일보>만 약자의 아픔을 외면했을까? 지난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에서 <동아일보>를 비롯한 보수 언론, 공영방송은 너무나도 쉽게 정권의 수중에 떨어졌다. 언제든 여당이 될 준비가 된 언론인들이 많았던 탓이다.

그나마 1980년대 전두환 정권처럼 악랄한 수준까지 고문이 자행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그러나 이건 고문 희생자들의 용기에 힘입은 열매다. 고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은 이근안이 23일 동안 자신에게 자행했던 고문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다. 고 김근태 상임고문이 남긴 1985년 12월19일자 법정진술 중 일부다.

"본인은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 (중략)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날이다'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 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다시 묻는다. 지금 우리는 맞는 시대를 살고 있을까? 1987년보다 지금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지난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권 집권기간은 고 박종철·고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능욕당한 시절이었다. 이렇게 볼 때 시민들이 광장을 밝혔던 촛불은 보수 정권의 능욕에 맞선 선한 분노이기도 했다.

이제 맞는 시대를 만들어가는 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다. 지난해 우리는 민주화운동 3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지난 9년 동안 민주주의의 후퇴를 피부로 느꼈고, 지금 다시 민주주의를 고민하고 있다. 옳고 맞는 시대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난 이런 문제의식이 영화 <1987>이 던지는 진정한 화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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