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생명의 노래

장윤재 목사(이화대학교회)

- 신명기 30:15-20, 디모데전서 6:10-12; 17-19, 마태복음 6:19-24 -

jangyoonjae_0512
(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오디세이』(Odyssey)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리스의 호머(Homer)가 지은 서사시입니다. 이 작품은 오디세우스(Odysseus)라는 사람의 오랜 방랑기입니다. 서양 사람들에게 지금도 널리 사랑 받고 있는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이 작품이 얼마나 그들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던지 '오디세이'라는 말은 아예 오랜 방랑의 모험을 뜻하는 일반명사로 사용되곤 합니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이제 고향을 향해 배를 띄우는 오디세우스에게 키르케(Circe)라는 이름의 마녀가 다가와 사이렌(Siren)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사이렌은 반인반조(半人半鳥), 즉 반은 사람이고 반은 새의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처녀 얼굴에 새의 몸을 하고 날아다니며 달콤한 노래를 불러 선원들의 넋을 빼앗아 파멸시키는 요괴들입니다. 민방위 훈련 때 울리는 사이렌도 바로 이 이름에서 나왔습니다. 이 요괴의 모습을 여러분은 평소 자주 보고 익히 알고 계십니다. 길을 가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스타벅스 커피숍의 로고를 기억해 보십시오. 거기 그려져 있는, 긴 머리의 여자가 바로 그 바다의 요괴 사이렌입니다. 실제로 스타벅스의 창업자는 '사람들이 내 커피숍 앞을 지나갈 때 그 누구도 내 집 커피향기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미에서 사이렌을 로고로 정했다고 합니다.

키르케가 이렇게 경고합니다. "당신은 사이렌이 사는 곳을 지나게 될 걸세. 유혹하는 존재이지. 조심성이 없는 사람은 가까이 다가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네. 왜냐하면 사이렌은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들판에 누워 달콤한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하거든. 그러나 그의 주위에는 희생제물이 된 사람들의 시신이 가득 쌓여있지. 그러니까 당신은 이 사이렌을 그냥 지나쳐야만 해. 당신의 선원들이 이 사이렌의 노래를 듣지 못하도록 아예 왁스로 귀를 틀어막아야 해."

하지만 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원들은 사이렌이 부르는 달콤한 노래에 빠져 하나씩 죽어갑니다. 심지어 오디세우스마저도 그 달콤한 유혹의 노래에 혼이 나가 거의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가 자기 배의 로프에 걸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사이렌을 물리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오르페우스(Orpheus)입니다. 아마 음악을 하시는 분들은 익숙하실 겁니다. 이 사람은 동물이나 새, 그리고 초목까지도 자신의 음악으로 매혹시켰다는 하프의 명인입니다. 노랫소리로 산중의 굳은 바위들도, 또 강의 흐름들도 홀렸다고 합니다. 영웅들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을 때 오르페우스가 노래를 부르면 모두들 싸움을 중단하고 그의 노래의 매혹에 푹 빠졌습니다. 우리에게 흥미로운 것은 그가 사이렌을 이긴 방법입니다.

오르페우스가 배를 타고 항해를 합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너무도 달콤하고 아름다운 노래가 들려옵니다. 드디어 사이렌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게 주의를 주었건만 그의 선원들이 차례로 이 노래에 넋이 나가 바다에 빠져갑니다. 배는 곧 난파하기 직전의 위급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때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하프를 들어 배의 가장 높은 선미로 올라갑니다. 거기서 하프를 켜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사이렌의 노래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사이렌의 노래에 정신이 나가있던 그의 선원들이 그의 노래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죽음으로 이끄는 달콤한 노래보다 더 아름다운 생명의 노래에 귀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그 노래에 힘입어 그들이 탄 배는 사이렌이 지배하는 죽음의 바다를 무사히 빠져나갑니다. 그러자 처음으로 싸움에서 진 사이렌은 돌연히 힘을 잃고 그 자리에서 돌덩어리로 변하고 맙니다. 오르페우스가 이긴 것입니다. 아름다운 생명의 노래가 달콤한 죽음의 노래를 이긴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신화'라는 말에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은 인간을 확대시킨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이름 아래 인간의 이야기를 담았던 것입니다. 저명한 신약성서학자 불트만도 신화가 '고대인들의 자기 이해를 담은 이야기'임을 간파하고 성서의 '비신화적' 해석을 주장했었지요. 우리는 아주 오래된 이 신화적 이야기에서도 우리 시대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메시지에 귀 기울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흥미로운 사실은 박해 받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숨어서 예배를 드렸던 로마의 지하무덤 카타콤에 가면 양을 어깨에 메고 있는 오르페우스의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표현한 조각도 있고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화판으로 둘러싸인 오르페우스의 그림도 있습니다. 이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신화적인 주제를 빌려 기독교적 의미를 내포하는 상징으로 자유롭게 사용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극심한 박해를 받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오르페우스처럼 아름다운 생명의 노래를 불러 우주만물과 산천초목을 진동케 하신 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인생도 항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저 거친 망망대해를 건너가는 항해와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 항해에는 늘 사이렌의 노래와 같이 달콤하지만 죽음으로 이끄는 유혹이 존재합니다. 너무도 달콤해서 그것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길인지도 모르고 우리의 배를 그리 저어갈 수 있는 유혹이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런 유혹이 존재하지 않는 인생의 바다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달콤한 유혹의 노래를 이기기 위해서는 억지로 우리의 귀를 틀어막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그 유혹은 우리의 영혼과 정신세계 깊은 곳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그것을 이기는 방법은 우리가 사이렌의 노래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을 그 노래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이렌은 더 이상 반인반조의 기괴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현대의 사이렌은 너무도 익숙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현실의 사이렌은 물질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원래 돈이란 경제적 물물교환을 간편하게 하기 위해 인류가 고안한 것입니다. 그 모습은 종이 위에 간단한 숫자가 적혀 있거나 컴퓨터 안의 전자 형태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돈에는 혼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날 돈은 스스로를 재창조합니다. '통화승수'라고 하는 고전적 방식을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오늘날에는 돈이 돈을 낳습니다. 게다가 돈은 늙지도 죽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있기도 합니다. 늙지도 죽지도 않고 스스로를 재창조하며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돈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미 2천 년 전에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태 6:24)고 경고하셨습니다. 여기 '재물'이라는 말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맘몬(mammon)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입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시던 언어인 아람어로 '맘몬'은 단순히 재물(wealth)이나 돈(money)이나 '돈의 신'(a money god)입니다. 신격화된 돈입니다. 신처럼 군림하는 재물입니다. 예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참 신이신 하나님과 돈의 신인 맘몬을 동시에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둘째, 오늘날의 사이렌은 '행운'(fortune)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미국적 문화의 한 단면을 잘 이해하게 해주는 미국 TV 프로그램이 하나 있었습니다. ABC 방송사에서 매일 30분씩 방영하는 "Wheel of Fortune"이라는 프로그램입니다. 돈의 액수가 적힌 커다란 수레바퀴를 돌려 액수가 정해지면 숨겨진 알파벳을 맞춰 돈을 계산해주는 게임인데, 짧은 시간에 몇 천만 원의 현찰과 자동차 한 대씩 타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원래 사전에서 "Fortune's Wheel"이란 '운명의 수레바퀴'라는 뜻으로, 인생의 변천을 상징하는 공상적인 수레바퀴를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미국판 Fortune's Wheel에서 인생의 변천은 오직 돈의 액수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따느냐 못 따느냐는 전적으로 '운'에 달려 있습니다. 수레바퀴를 잘 돌려 바늘이 1만 불에 걸리면 꼴찌가 단숨에 일등이 되기도 하고, 수레바퀴를 잘못 돌려 "Bankrupt"(파산)이라는 데 걸리기라도 하면 이미 따 놓은 거금을 일거에 날리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도박판입니다. 인생이, 운명의 수레바퀴가 도박판처럼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도박은 라스베이거스에서만 성행하는 사업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 삶 거의 모든 영역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경마장에 가보면 마약중독보다 더 심각한 마권중독에 걸려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경마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무언가를 땀 흘려 생산했기 때문에 얻는 이익이 아니라 누군가가 잃었기 때문에 얻은 이익을 탐닉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이 점점 투기판처럼 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도로테 죌레(Dorothee Soelle)는 이미 오래 전에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경제를 '카지노 자본주의'(Casino Capitalism)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이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또 다른 모습인 것 같습니다. 사이렌은 우리 앞에서 이렇게 노래를 부릅니다. '걸어봐, 한번 크게 걸어봐, 어차피 인생은 한번이 아니더냐! 누가 아니? 바로 네가 행운의 주인공이 될지? 걸어봐, 한번 크게 걸어봐.'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시계가 정확히 7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달력을 보니 7월 7일입니다. '오늘은 분명 운수가 좋은 날이다!' 그는 재빨리 일어나 택시를 타고 직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택시번호가 7777입니다. '아니 이게 무슨 길조란 말이냐!' 그 사람은 즉시 택시를 돌려 은행에 예금했던 돈을 몽땅 찾아 경마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몽땅 마권을 사서 전부 7번 말에 걸었습니다. '오늘은 내 운명의 수레바퀴가 바뀌는 날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손에 땀을 쥐고 경마를 지켜보았습니다. 드디어 비루했던 그의 인생에도 '한방 역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등으로 들어와야 할 그 7번 말이 글쎄 7등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 바람에 그는 결국 망해버렸다고 합니다.

오늘날 사이렌은 '돈의 신,' 맘몬의 모습으로 우리의 인생의 항해 길에 나타나 이렇게 노래합니다. '써라, 더 많이 써라! 지구 환경이 파괴되든, 너의 이웃이 굶주려 죽든 너와 상관없는 일이다. 소비하라, 더 많이 소비하라! 그것이 너의 사회적 지위와 가치를 결정해 줄 것이다. 걸어라, 크게 걸어라! 네가 행운의 주인공이 될 지도 모른다!' 참으로 달콤한 노래입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너무도 달콤한 노래입니다. 21세기 물질문명의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인생의 항해에서 피해갈 수 없는 노래입니다. 아무리 안 들으려 귀를 막아도 우리 안에서 공명하는 노래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해야 여기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저 하나님의 나라까지 무사히 항해할 수 있겠습니까?

유대인의 지혜를 모아놓은 책 『탈무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빛과 그림자의 두 면이 있다. 착한 사람에게도 그림자가 있고, 아무리 악한 사람에게도 빛이 있다. 그러므로 그림자가 있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빛의 부분을 밝게 하면 되는 것이다. 반대로 빛의 부분이 있다고 해서 안심해서도 안 된다. 그림자 부분을 적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희망의 등불을 계속 밝히고 있으면 암흑에서도 견딜 수 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어두워도 그 암흑과 싸우려하지 말고 희망의 작은 등불을 계속 밝히고 서 있으면 우리는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절망과 싸우는 것보다 희망을 유지해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유대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악과 싸우는 것도 좋지만 악의 반대인 선을 강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체득하고 있었습니다. 질병과 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몸 밖의 세균을 죽이는 것보다도, 내 안의 면역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충분한 영양과 휴식, 그리고 건강한 마음과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외부의 세균이 침입해도 우리가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이렌이 부르는 달콤한 죽음의 노래에서 벗어나려면 오르페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사이렌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면 됩니다. 유혹의 노래를 안 들리게 할 재간은 없습니다. 인간 실존의 조건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 안에서 생명의 노래가 넘쳐흐른다면, 그리고 나의 영혼을 거기에 집중한다면 우리는 사이렌의 달콤한 유혹의 노래를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노래는 어떤 노래입니까?

오늘 교독한 시편 8편을 다시 읽어봅니다. 이 시편을 펼칠 때마다 테너 박종호 씨가 웅장한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추어 노래한 아름다운 영상이 떠오르곤 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 노래는 지휘자를 따라 '깃딧'이라는 장단에 맞추어 부르는 다윗의 노래입니다. '깃딧' 장단은 '포도즙 틀을 밟는 사람들의 가락'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편을 읽을 때에 우리는 마치 한 해의 농사를 마치고 풍성한 포도열매를 수확할 때의 농부들이 느꼈을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바로 이런 노래에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가장 아름답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유가 매우 단순하다는 사실입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을 내가 보오니"가 이유의 전부입니다. 본문에 다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금은보화를 많이 주어서도 아닙니다. 큰 행운, 소위 '대박'을 안겨주어서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하늘과 거기에 하나님께서 손수 달아놓으신 달과 별을 보고 다윗은 지금 기쁨과 감사에 넘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환희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입니다. 참으로 가난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맑은 영성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깊고 아름다운 노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우리 시대는 다윗이 가졌던 바로 이런 영성, 이런 노래가 필요합니다. 탐욕과 투기와 황금만능주의가 판치는 이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해야 할 영성은 '가난의 영성'입니다. '청빈의 영성'입니다. 가진 것 없어도 하나님 지으신 아름다운 창조세계만 보아도 마음이 풍요롭고 환희가 넘치는 영성입니다. 이런 영성으로 우리는 생명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오늘 부른 찬송가 가사처럼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생명의] 맑은 가락이 흘러나오"게 해야 합니다. 이 영성과 노래가 희망의 불씨입니다. 이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을 때 우리는 암흑 속에서 견디며 저 사이렌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던 마더 테레사는 평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에 의존하거나 돈 때문에 노심초사 하는 사람은 정말 가난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돈을 쓰는 사람은 부자입니다." 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싫증을 내지 말고 주십시오. 그런데 남는 것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상처를 받을 때까지,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쌓아두면 쌓아둘수록 줄 수 있는 것이 적어집니다. 가진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나누는 방법을 제대로 알게 됩니다. 적게 가질수록 더 많이 줍니다. 터무니없는 말 같지만 이것이 사랑의 논리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 '터무니없는 사랑의 논리'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이 '터무니없는 사랑의 논리'가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를 다스리게 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디모데전서 6:10-12). 또 말합니다. "네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데모데전서 6:10-12, 17-19).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명기 30:19-20).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생명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의 항해에서 쉬지 말고 생명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사이렌의 달콤한 유혹의 노래가 여러분의 귓속을 파고들 때마다, 여러분의 영혼을 침범할 때마다 노래를 부르십시오. 입을 열고 크게 부르십시오. 다윗처럼 깃딧 장단에 맞춰 부르든, 오르페우스처럼 하프를 타며 부르든, 사이렌의 노래보다 더 아름답게 부르십시오. 여러분의 입에서, 여러분의 가정에서 찬송이 떠나지 않게 하십시오. 사이렌이 패배하여 돌덩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 하나님의 나라까지 무사히 항해할 것입니다. 아멘. (2018.1.21.)

이인기 ihnklee@veritas.kr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7] 중세교회 대중들의 신앙생활

중세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스콜라주의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콜라주의 문헌들은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것을 읽거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6] 중세 신학의 대략적 지도: 서방의 '스콜라 신학'과 동방의 '비잔틴 신학'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