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NCCK 이홍정 “5.18 현장에서 ‘사이에 서라’는 음성이 늘 평화 생각하게 해”
베리타스 서광선 회장-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이홍정 총무 신년특별대담(1)

입력 Jan 29, 2018 06:13 AM KST

야당 정치가의 아들로 태어나
친조부는 신학자이자 장로, 외조부는 선교사
민주항쟁 현장에서 ROTC 신분으로 고뇌, '사이에 서라'는 내면의 음성
영국에서 존 힉과 레슬리 뉴비긴으로부터 신학적 영향
필리핀 교육선교사로 빈민촌에 신학교 설립 진행
한국-영국-홍콩-필리핀 여정 끝에 에큐메니칼 운동의 산실 종로5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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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지유석 기자)
▲베리타스 서광선 회장(이화여대 명예교수/전 세계YMCA회장)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이홍정 총무가 2018년 신년대담에 임하고 있다.

[편집자 주] 숨밭 김경재는 「종교개혁과 사회개혁」이라는 소논문에서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구원사역이 일어나는데, 그 현실의 총체성을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고 부른다"라고 썼다. '운동' 앞에 어떤 단어가 붙느냐에 따라 '운동'의 뉘앙스가 미묘하게 달라지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말 자체가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그리고 그 '운동'이라는 말과 '한국교회'라는 단어가 만날 때, 소위 에큐메니칼 진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스럽게 70, 80년대 민주화운동과 평화통일운동의 산실이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떠올린다.

지난 11월 NCCK 제12대 총무로 이홍정 목사가 부임했다. 그는 취임하면서 교회 안으로는 '교회의 일치와 갱신과 변혁,' 밖으로는 '민족공동체의 치유와 화해와 평화'라는 두 개의 십자가를 지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두 개 과제를 현실화하는 과정 가운데 인간적 욕망의 성취를 위해 선전·선동하지 않고, 소금처럼 빛처럼 자기를 비우는 방식으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 헌신해온 <베리타스> 회장 서광선 박사가 이홍정 신임총무를 만나 그가 꿈꾸고 있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들어보았다. 인터뷰 기사는 2부에 걸쳐 싣는다. (1)부는 지금까지 목사, 선교사, 행정가, 대학교수로서 다방면에 몸담았던 인간 이홍정에 대해, (2)부는 이홍정호 NCCK가 표방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방향성에 대해 전한다.

서광선: 축하드립니다. NCCK가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심이자 본산지인데, 한편으로 이 엄중한 시기에 총무직을 맡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저같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목숨을 걸다시피 일해 온 사람들은 새로 오신 총무님에게 축하도 드리지만 동시에 기대하는 것도 많습니다. 그리고 총무님은 얼마나 책임감을 느끼시겠어요! 이 인터뷰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뒷받침하고 지지하고 행동하는 많은 분들에게 포부와 비전을 알리려는 뜻에서 기획하였는데, 흔쾌하게 수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인간 이홍정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어디서 태어나서 어떤 소년시절을 지냈으며 어떤 계기로 예수를 믿게 되어 목사님까지 되셨는지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

이홍정: 1956년 서울 후암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어린 시절이었지만 후암동의 해방촌과 미군캠프가 기억납니다. 남산에 여전히 미군캠프가 있었던 시절입니다. 그 어린 시절 아버님의 손을 잡고 남산에 오를 때 해방촌을 지나서 미군캠프가 보이는 길을 따라서 걸었던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있습니다. 해방촌과 미군캠프를 보며 걸었던 기억이 훗날 저의 신학적, 정치적 해석에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서광선: 해방촌에는 주로 북에서 온 실향민들이 많이 살았잖아요?

이홍정: 네, 저희 집안이 실향민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 그 동네가 그랬습니다. 저는 후암동에서 태어난 후, 야당 정치를 하시는 아버님을 따라 이사를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후암동에서 응암동으로, 내수동과 청진동, 홍은동에서 불광동에 이르기까지. 저의 유년 시절은 많은 이사의 기억들이 있고, 그 이후 제 인생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광선: 야당이면, 이승만의 자유당 시절이었습니까?

이홍정: 제가 기억하는 아버님의 마지막 당은 국민당, 윤보선으로 이어지는 라인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광선: 4.19 당이라고도 했던 것 같습니다.

이홍정: 네, 하하. 그 당시 불광동이 도시빈민촌이었는데, 독박골이라는 곳에 터를 잡은 것이 초등학교 3학년 때였고, 아버님은 만년에 야인처럼 사시다가 그때 쯤 돌아가셨습니다. 이후 독박골을 떠나 정동, 수유리, 우이동, 이렇게 이어지는 고등학교 시절을 살았습니다. 제가 배재고등학교를 다닐 때, 정동에서 학교를 마치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일부러 걸어서 옥인동 쪽으로 가서 백송이 있는 청와대 근처를 거닐다가 돌아오곤 했는데, 그때 아마 정치적 저항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학에 대한 관심은 아마 제 자신의 실존적인 허무주의와 정치적 저항심이 서로 엇갈리는 가운데 신앙적 경험을 하게 된 이후 생긴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죽음도 제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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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지유석 기자)
▲베리타스 서광선 회장(이화여대 명예교수/전 세계YMCA회장)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이홍정 총무가 2018년 신년대담에 임하고 있다.

그 이후에 실존적인 허무주의를 경험하면서 정치적 저항의식을 내려놓고 소위 '하나님의 정치,'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의 목회'에 전념하는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 이후 원하던 대학을 가지 못해 재수하던 시절에 삼천포로 내려가 있었는데, 그때 삼천포 성결교회 도서실에 갔다가 저희 친조부님과 외조부님의 사진이 같이 걸려있는 것을 봤습니다. 친조부님은 평양신학교와 서울신학대학, 그리고 고베신학교에서 공부하셨지만 목사가 되진 않으셨고 장로로 역할하시면서 교회 개척을 많이 하신 장로님이셨습니다. 외조부님은 초기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하신 성결교회의 초기 목사 중 한 분인데, 이분이 삼천포 성결교회에서 목회하실 때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재수할 때 두 분 사진을 보면서 나도 저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정형편은 굉장히 어려웠고 가난한 삶이었습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들어갔을 때 입학금이 10만원 좀 넘었는데, 그 돈을 구하느라 이틀간 야전잠바를 입고 군화 신고 돌아다니면서 학자금 융자를 받으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는 대학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가 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주에서의 작은 경험이 저에게 신학적 지향을 결정하는데 지침이 되었습니다.

제가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항쟁 때 광주보병학교에서 ROTC 장교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때 5.18민주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속한 사단이 유격훈련 2주차 '도피 및 탈출' 교육을 막 시작했을 때인데 그것을 하지 못하고 산으로 산으로 피해서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연병장에 도착했더니, 시민군들이 원산폭격이라고 하죠? 머리를 땅에 박고 손을 뒤로 한 모습들이 지금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됩니다. 그렇게 내무반에 들어갔는데 소문이 퍼져있기를, 저희가 육사 36기생들과 같이 훈련을 받았는데 육사 36기생들은 이미 시가전에 나갈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이고, 병력이 모자라면 ROTC 후보생들도 출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냥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게 도저히 내무반에 있을 수가 없어서 화장실로 갔습니다. 총을 들고 시가전에 나간다고 하는 것 자체도 두려웠지만 그 M16을 누구를 향해서 겨누어야 하는 것이 정말 가슴 떨리는 선택이었기 때문에, 화장실에서 정말 깊은 고뇌에 빠졌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면이 잠잠해지기 시작했고, 그 때 제가 들었던 내면의 음성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이에 서라. 하나님은 사이에 계신다. M16을 버리고, 시민군과 정부군 사이에 서라."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만약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저의 죽음으로도 이어질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제가 시가전에 나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그 일이 지금의 저에게, 남북문제나 정의의 문제에 대해서 반드시 평화적인 열매를 맺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 때 대면했던 화해하시는 하나님, 사이에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 때문이 아니었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후 비무장지대(DMZ)에서의 군대 경험이 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가 학교를 졸업하고 6월에 배치를 받는데 그때 저의 기도제목이 "하나님 제가 군 생활 마치면 바로 신학교에 가야되니까 저를 가장 혹독하게 훈련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주십시오" 였습니다. 동해안 경비사령부로 배치가 되었지요. 그곳은 동경사라고 불렸는데 해안초소 근무를 하는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다 바뀌었으나 그 당시에 동경사는 편하게 근무할 수 있는 곳이라 정평이 나 있는 곳이어서 서로 가고 싶어 하는 곳이었습니다. 거기 배치된 사람들과 같이 차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속초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렸는데, 저는 88여단 사령부까지 가더니 거기서 하루를 자게 했습니다. 이튿날 다시 트럭을 탔는데 비무장지대가 눈앞에 펼쳐지는 겁니다. 곧바로 비무장지대로 배치가 되었고, 거기서 생사를 넘나드는 많은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분단의 가장 물리적 실체인 비무장지대가 저에겐 민족문제를 성찰하는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광선: 그러고서는 비무장지대에서 장로회신학대로 직행하셨어요?

이홍정: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대할 무렵에 비무장지대를 떠나는 것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혹시 그곳에 계속 있으면서 군종으로 복무하면서 신학공부를 할 수 있는 통로가 없겠느냐고 여러 쪽으로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별다른 길이 없었고 주변에서 추천하지도 않고 해서 제대하고 바로 장로회신학대학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서광선: 비무장지대에서 오래 근무한 군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게 떠나기가 미안하다는 감정을 갖게 된다고 말들을 하더군요. 그리고 갈등과 대결의 첨단에 서 있으면서 오히려 평온을 경험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DMZ를 평화공원으로 만들자는 목소리들이 나오는가봐요. 아이러니한데 그러한 갈등이 생기는군요.

이홍정: 사실은 늘 긴장관계가 잠재해서 흐르는 곳이지만 흔히 우리가 사고라 할 수 있는 일들은 간헐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거기서 지내는 생활 자체가 평온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번은 겨울에 비무장지대 초소(GP)에서 일하는데 눈이 굉장히 많이 온 적이 있었습니다. 도로가 통제되고 일주일 가까이 외부와의 접촉 없이 조용하게 보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철조망에 참새 한 마리가 왔다갔다하는 소리까지 크게 들리는 적막함이 있었습니다. 제가 근무할 당시에 다른 지역에서 무장간첩 침투사건이 있었고, 월북사건과 월남사건도 일어났고, 지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은 일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제대하고 다른 동기들과 이야기할 때 제가 굉장히 특별한 시간을 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광선: 그 이후 공부하시고 그리고 목사가 되셨지요. 예수교장로회(예장) 안에도 300개나 되는 교파가 있는데 예장통합에서 안수를 받으셨어요?

이홍정: 제가 어린 시절 불광동에서 다니던 교회가 장로교 예장통합이었습니다. 일부러 선택해서 다닌 것은 아니지만 동네에 교회 하나가 있어서 갔고 그곳이 예장통합이었습니다.

서광선: 다른 교파 생활을 할 여지가 없으셨군요?

이홍정: 저의 외조부님이 히로시마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 '등대사 사건'이라고 해서 일본의 홀리니스교회 선교가 폐쇄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히로시마에서 피신하여 동경으로 가셨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고, 외조부님은 해방 후 한국으로 오셨다가 다시 히로시마로 가셔서 원폭 피해자들을 위해 마지막까지 선교사로 일하셨습니다. 그 분이 한번 제가 대학 다닐 때 저를 성결교 총회본부에 데리고 가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 교단 책임자분들이 성결교신학대학인 서울신대로 오라고 말씀하신 적은 있었습니다만, 저는 여하튼 그렇게 예장통합에 있게 되었습니다.

서광선: 그때는 장로회신학교가 광나루신학교였죠? 그럼 그 이후에 영국에는 어떻게 가시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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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지유석 기자)
▲베리타스 서광선 회장(이화여대 명예교수/전 세계YMCA회장)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이홍정 총무가 2018년 신년대담에 임하고 있다.

이홍정: 그것도 재밌는데요, 제가 그때 나이가 이미 서른다섯쯤 되었던 시점입니다. 그동안 신학대를 졸업하고 영락교회에서 전도부 책임전도사로 일하면서 전국을 많이 다닐 수 있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의 다양한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교단 총회 전도부에 간사로 2년간 있었던 시기에 장로교신학교 대학원 과정에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에 저희 교단이 세계선교협의회(CWM) 회원교단으로 가입하고 난 후 첫 번째 장학프로그램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이 왔는데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고 저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1990년 봄 학기였어요. 수업 마치고 광나루 전철역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역 거의 다 왔을 때 쯤 '왜 아무도 안가려고 하지. 이제 베를린 장벽도 무너지고 세상도 바뀌었다는데 세상 구경 한번 나가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당시 일종의 반유학파적인 경향, 편향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였는데 말이지요. 그 때 다시 학교로 발걸음을 돌려 서정은 교수님 연구실로 올라가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세상이 바뀌어서 한번 나가서 보고 오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좋겠다고 하셨고, 그게 인연이 되어 버밍햄(Birmingham)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박사과정 학위까지 밟게 되었습니다.

서광선: 거기서 무슨 공부했어요, 특별히 기억나는 수업이나 교수님이 있어요?

이홍정: 선교신학 Ph.D 과정을 공부했습니다. 제 지도 교수는 당시 버밍햄 대학교 선교학 교수이셨습니다. 영국은 각 분야에 교수라고 칭하는 분이 딱 한분이고 나머지는 다 그 아래 직급입니다. 이 교수님은 독일인이신데 역사학자이면서 선교와 신학을 공부하는 분이셨어요. 역사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보니 탈신학적인 면모가 있었는데 저에게 좋은 지도교수님이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당시 셀리오크(Selly Oak)에 존 힉과 레슬리 뉴비긴 두 분이 은퇴해서 살고 계셨는데 그분들로부터 신학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서광선: 그 두 사람은 케임브리지대학 혹은 옥스퍼드대학 교수가 아니었나요?

이홍정: 그 두 분이 은퇴 후 셀리오크에 살고 있었습니다. 존 힉은 버밍햄대학교와 클레몬트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버밍햄과 가까웠고, 레슬리 뉴비긴도 신학적 산실 자체가 셀리오크이기 때문에 거기서 두 분께 개인적으로 가서 세미나도 했고, 골고루 모셔가면서도 세미나를 하곤 했습니다. 서로 다른 지도와 교육의 이해를 가지고 계셨지요.

서광선: '서로 다른' 이라고 말씀하시는 군요, 하하하. 서로 상반되었다는 뜻인가요?

이홍정: 두 분 사이의 상호 존중이 고귀한 배움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하하.

서광선: 나는 두 그 사람의 생각하고는 영 다르지만은, 그래도 그 분들이 서로를 인간적으로 존경하며 지속적으로 대화할 수 있다는 부분이 부러울 정도입니다. 그 두 분 간의 갈등은 없었어요? 그리고 이 총무님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우신가요?

이홍정: 저는 사실 신학적인 개방성은 존 힉을 수용하는 쪽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적 삶이 공적 사회에서 드러나는 면에 있어서는 레슬리 뉴비긴이 갖고 있는 장점에서도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광선: 제가 80년대에 이화여대에서 해직을 당했을 때 WCC 쪽의 신학교육위원회 실행위원이었어요. 거기 같은 분과에서 뉴비긴을 몇 번 만났는데 인간적으로 상당히 매력 있는 친구였는데 한편으로는 고리타분한 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홍정: 저도 기억이 납니다, 서 박사님께서 엘살바도르 선교회의에 참가했을 때 레슬리 뉴비긴에게 두 번이나 강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었죠.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 때 뉴비긴이 평소보다는 훨씬 더 개방적인 발언을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평화를 우선적으로 이야기했구요, 좋은 무슬림이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까지 이야기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서광선: 영국 신학자들은 인도와 아프리카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이 있지요. 자기들은 사랑이라고 하는데, 어떤 면으로 보면 지나치게 일방적이라서 정말 구제불능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고요. 그런데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진지한 인간적인 사랑과 애정이 있고 거기다가 선교적인 열정까지 있으니 어떨 때는 무서워요. 그리고 진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물불을 안 가리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정열이 있더라고요.

이홍정: 네, 저도 그들의 헌신 가운데 흐르는 진정성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셀리오크칼리지도 버밍햄도 그런 열정들이 거의 다 식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시 셀리오크가 거의 막차를 탄 시점이었는데요. 당시 셀리오크칼리지라고 하면 유럽에서 제3세계로 나가는 선교사들을 일차적으로 훈련시키는 곳이었고, 동시에 영국 기반 교파들이 해외학생들을 불러다가 교육시키는 곳이었습니다. 각 교단에서 세운 9개의 대학이 연맹을 이루어 형성된 대학교이기도 했기에 모임이 한번 있을 때 백여 개가 넘는 나라 학생들이 참여하곤 했습니다. 이제는 서구 선교가 더 이상 셀리오크를 채널로 하여 선교사를 내보내는 시스템이 다 해체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버밍험대학교에 완전히 흡수된 상태입니다.

서광선: 그런 역사와 배경이 있는 학교에서 한국에서 온 이홍정 학생이 사랑을 많이 받았겠어요.

이홍정: 저는 그곳에서 일종의 해석학적인 전쟁을 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아시아의 관점, 특별히 한국적 신학에 대한 이해와 같은 것들을 제안해 해석학적인 기준을 가지고 토론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지금 생각하면 오만하고 설익은 생각인데 이 사람들과 학생과 제자의 관계로 남아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제가 제안을 해서 동북아선교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95년도에 제안을 했고 95년 말부터 3년 가까이 일했습니다. 그것이 지금은 작은 분과로 버밍험대학에 잘 용해가 되어서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있습니다. 이 연구소의 첫 번째 세미나에는 마사오 다케나까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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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지유석 기자)
▲베리타스 서광선 회장(이화여대 명예교수/전 세계YMCA회장)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이홍정 총무가 2018년 신년대담에 임하고 있다.

서광선: 마사오 다케나까 선생이 그 연구소와 관계가 있었어요?

이홍정: 연구소 첫 번째 국제세미나 주 강사로 초청했었고, 두 번째 강사로 김영복 박사님을 모셨었습니다. 소위 동북아시아의 신학적, 해석학적 관점을 가지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와서 해석학적 전쟁을 하는 곳이라고 이해를 했었구요. 거기에 동북아의 퍼스펙티브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광선: 큰일을 하셨어요. 저는 신군부로부터 해직이 되었다가 84년 복직이 되었는데, 그 어딘가의 시점에서 셀리오크에 가서 일 년간 가서 강의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곳에 유명한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주변에 물어보니 고생길이 훤하다고 하여 가지 못했어요. 그곳에서 공부를 마치고 홍콩 NCC로 가신 건가요?

이홍정: 제가 예장통합 사역을 마치고 장신대를 가느냐 교단본부로 가느냐 두 갈림길에서 고민했는데, 제 안에 제도교회의 변화에 대한 책임감을 스스로 느끼고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예장통합이 기획국을 처음 만들었던터라 초대기획국장으로 갔습니다. 그 때 <생명살리기 운동 10년>이라고 하는 중장기 계획을 발표했고, 21세기 총회 정책문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피조물이 더불어 살아가는 지구 생명 공동체>와 같은 정책 문서들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다가, 6년 지나서 CCA(아시아교회협의회)로 갔습니다.

서광선: CCA에는 얼마나 계셨습니까?

이홍정: 2년 반 있었습니다. CCA가 치앙미아로 옮길 때 저는 옮기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CCA가 치앙마이로 떠나는 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뒤 아시아에서의 작은 경험도 선교학자로서의 나름대로의 경험을 살려 실천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필리핀에 있는 한국 장신대 쪽 선교사들이 세운 신학교에 부임하여 4년 반 정도를 총장으로 일했습니다. 마닐라 외곽에 있는 몬딸만이라고 하는 도시빈민이주민촌이 있는데, 자연재해나 내란 등으로 인해 강제 이주당한 사람들이 20만 명 정도가,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닭장 같은 집을 짓고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땅을 사서 학교를 지었습니다. 그때 제가 가진 꿈은, 아시아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목회할 수 있는 필리핀 현지 신학생들을 키우기 위해 실천중심의 작은 신학교의 모델을 만들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필리핀에는 이미 400여 개의 신학교가 있었기에 비슷한 학교를 또 세우기보다는 도시 빈민촌이라는 특수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신학교를 세우는 것을 생각했어요. 그곳에는 다양한 종족들이 있었고 그 사이에 생기는 갈등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문제들을 현장에서 학습의 자료로, 그리고 실천의 자료로 삼아 신학교육을 하고, 그 정점에서 화해라는 신학의 목표를 세워 진행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거의 다 지은 상태에서 기진맥진하여 한국으로 돌아왔었습니다.

서광선: 가족들도 같이 필리핀에 있었나요?

이홍정: 그 때 환경이 많이 열악했어요. 제가 필리핀 일반인들이 사는 2층 집에 에어컨도 없는 마룻방 하나를 얻어서 살았고, 공사 현장에 일주일에 하루이틀 정도 가서 노동자들과 같이 일하고 합숙해서 자기도 하고... 그래서 아내와 자녀들은 같이 있지 못했습니다.

서광선: 총장으로 계시다 오셨기에 좋은 환경에 계셨을 줄 알았는데, 고생을 참 많이 하셨군요. 저는 필리핀에 갈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이럴 수가 있나, 필리핀 귀족들이라는 지식인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의 당황스러움이 있었습니다.

이홍정: 필리핀은 식민지에 의해 철저히 수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신봉건주의가 살아서 움직이는 사회였습니다.

서광선: 어떻게 그렇게까지 변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이홍정: 그래서 힘이 많이 들었었지요. 거기 계시던 선교사님들과 신학교 위치에 대한 의견 충돌도 있었고. 또 제가 2006년 9월인가 부임했는데, 2개월 앞선 7월 달에 휴먼라이츠서밋이 있었습니다. 저도 참석을 했는데 그 때 강사로 나온 분 중 한 분이 필리핀 한 교단의 알버트 라멘토 주교라는 존경받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나와서 자신의 암살 가능성을 언급했는데 정말로 얼마 후 살해당하셨습니다. 정의를 이야기하다가 정부와 결탁한 세력에 의해 청부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그 때 마닐라에서는 그분을 위한 49제 같은 추모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곧 부임을 했는데, 그 때 필리핀 신학생들을 데리고 거리에 촛불을 밝히며 추모예배에 참가했어요. 그런데 선교사들이 이것을 듣고 공산당과 가깝게 일하곤 한다는 식으로 소문을 내서 필리핀 NCC에 특정 색깔이 칠해지게 되어 굉장히 상황이 어려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서광선: 선교지에서 선교학자로서 그리고 선교사로서, 신학과 현장의 사이에서 둘 다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오셔서 한일장신대 교수와 교단의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이제 드디어 에큐메니칼 운동의 일번지로 오셨습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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