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선한 목자

장윤재 목사(이화대학교회)

- 이사야 49:13-17, 골로새서 3:12-14, 요한복음 10:14-15 -

선한 목자
(Photo : ⓒ독일 에르푸르트 앵거 박물관)
▲루카스 크라나흐의 “선한 목자”

'바람의 딸'로 잘 알려진 국제구호활동 전문가 한비야 씨가 지난해 결혼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화제가 되었습니다. 신랑은 네덜란드 출신의 긴급구호 전문가 안토니우스 반 쥬드판 씨로, 두 사람은 2002년 아프가니스탄의 긴급구호 현장에서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이후 두 사람은 전 세계 재난ㆍ재해 현장에서 함께 일했고, 때로는 동료로, 때로는 멘토-멘티로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다 마침내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신랑 신부 모두 60세가 넘었다고 합니다. 결혼식은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모여 조촐하게 치러졌는데, 답례품은 설탕과 소금 세트였다고 합니다. '설탕처럼 달콤하게, 소금처럼 짭짤하게 살겠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한비야 씨는 2005년 5월 4일에 우리 이화여대 대강당 채플에 초청되어 "긴급구호 현장에서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생생한 경험과 신앙을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현장에서 몸으로 체험한 하나님 이야기이기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가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장이 되어 처음으로 파견된 곳은 당시 한창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라는 지역이었습니다. 오늘의 신랑을 만난 바로 그곳입니다. 가보니 아프가니스탄의 가장 큰 문제는 극도의 굶주림이었습니다. 전쟁으로 어른들이 죽어 어린이가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아이들 대부분이 영양실조에 걸려 있고 그 중 5분의 1은 그야말로 아사(餓死) 직전이었습니다. 전형적인 영양실조 증세는 이랬습니다. 팔은 말라 비틀어져있고, 다리는 꼬챙이처럼 가늘고, 머리는 누렇게 탈색됐고, 배는 올챙이처럼 튀어나왔습니다. 한비야 씨는 불면 꺼질 것 같은 이 아이들을 조심스레 안아보았습니다. 새털처럼 가벼웠습니다. 10살짜리 아이의 몸무게가 5킬로그램도 채 안 됐습니다. 그 아이들을 팔에 안으면 고개를 들 힘이 없어 머리가 아래로 뚝 떨어집니다.

이런 아이들을 등에 메고 의사들에게 달려갑니다. 하지만 의사는 너무 늦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오히려 괜히 쓸데없는 수고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하지만 한비야 씨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그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을 끝까지 다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양죽 사업'이라는 것을 실시했습니다. 긴급구호팀을 네 개의 조로 나누어 불침번을 서가며 두 시간에 한 번씩 아이들에게 강제로 치료 영양죽을 먹이는 '집중 급식'을 실시했습니다. 강제로 먹여야 하는 이유는 배가 고픈 아이들이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입에 넣었는데 거기에는 신장과 위장에 치명적이고 눈까지 멀게 하는 독초가 포함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식도와 기도가 막혀 음식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그래서 구호팀은 수시로 혼절하는 아이들을 꼬집어 깨워서 수저로 영양죽을 떠 먹였고, 삼킬 힘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강제로 입을 벌려 죽을 흘려 넣었습니다. 사실 영양죽이라는 게 별게 아니고 밀가루, 콩가루, 설탕, 소금을 섞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집중 급식'을 실시한 지 두 주가 지나면 조금씩 변화가 생깁니다. 어린 아이의 목을 왼팔로 받치고 영양죽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으려고 하면, 이제는 고개를 들 수 있는 힘이 생긴 아이와 눈이 마주치는데, 전에는 힘이 없어 허공만 바라보던 아이의 눈이 자기를 보고 방긋 웃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웃는 아이들은 다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3개월 동안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은 의사들도 포기한 아이들 489명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한비야 씨는 조용히 집중해서 듣고 있던 3천 명의 이대생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 2주치 영양죽 값이 얼마인 줄 아세요?'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단 돈 만원입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 주머니에 만 원짜리 하나 있으세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굉장히 힘센 사람들이예요. 사람의 목숨 하나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으니까요.' 한비야 씨는 자신이 원래 남에게 무얼 달라고 하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긴급구호 현장에만 갔다 오면 아무나 붙들고 '돈 내놔라'고 한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기는지, 현장에만 갔다 오면 마치 자기가 돈 꿔 준 사람인 것처럼 '돈 내놔라'고 한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건 내가 하는 게 아니예요. 그 순간 내 안의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긴급구호 현장에서 경험한 하나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한비야 씨의 두 번째 구호현장은 굶주림과 더불어 에이즈라는 괴물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아프리카의 말라위와 잠비아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아프리카'하면 머릿속에 드넓은 초원, 동물의 왕국, 빨간 옷의 마사이족, 그리고 킬리만자로 등의 이국적인 이미지가 떠오르곤 합니다. 하지만 한비야 씨가 긴급구호 현장에서 알게 된 아프리카의 키워드는 '내전,' '굶주림,' '난민,' '외채,' 그리고 '에이즈'입니다. 에이즈가 창궐하는 지역을 다닐 때 긴급구조 요원들은 보통 일회용 주삿바늘을 다섯 개 정도를 가지고 다닙니다. 혹시라도 말라리아에 걸려 병원에 가야 할 때를 대비해서입니다.

현장에 가보니 역시 어린아이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까맣고 꼬불꼬불해야 할 머리카락은 먼지를 뒤집어쓴 것처럼 푸석푸석하고 회색빛이 돌았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 오래 먹지 못해서 뇌 속에 있는 단백질까지 영양분으로 다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아이들이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출생 시의 모자 감염, 혹은 모유를 통한 감염 등으로 아무 죄 없는 아이들이 이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어가는 그 아이들 하나하나가 다 고유한 자기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에게는 단지 숫자로만 기억되는 그 아이들 각자에게 다 고유한 이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죽으면 부모들은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보름씩 통곡한다고 합니다. 2살짜리 아이가 에이즈로 피부에 난 부스럼의 가려움을 견디다 못해 마구 긁으면 피가 나오는데, "그 아이의 몸에서도 푸른색 피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붉은색 피가 나와요"라고 말합니다. 3천 명의 청중은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집중해 듣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에이즈로 초토화된 한 마을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마을의 한 쪽 나무 그늘 아래에 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 열 명 정도가 힘없이 누워 있었습니다. 벌거벗은 아이들의 몸은 가려움을 견디다 못해 마구 긁었는지 온통 피고름 범벅입니다. 긴급구호팀의 현장지침에는 에이즈 감염이 의심되는 아이들을 절대 안아주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작은 상처를 통해 에이즈에 감염될 확률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때 한비야 씨와 한 아이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순간, 무슨 힘이 났든지 그 아이가 벌떡 일어나 안아달라는 듯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큰 일이 나고야 말았습니다. 다른 모든 아이들도 '와아' 하며 일제히 일어나 달려와 한비야 씨에게 안겼습니다. 그는 그 피고름 덩어리 아이들을 한 명씩 안아주었다고 합니다. 무서웠지만, 자기 옷이 붉게 물드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꼭꼭 안아주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을 한비야 씨는 이렇게 기억합니다. "그 순간의 나는 평소의 나가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건 내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었습니다."

마가복음 6:34절을 보면, "예수께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마태복음 9:36에도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목자 없는 양'이 왜 불쌍합니까? 들판에서 풀과 물을 찾아 이동하는 양 무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는 목자라는 존재입니다. 들판은 절대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기회만 되면 양을 물어가기 위해 사방에 늑대와 이리들이 노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이 얼마나 위험하고 비참한지를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하는 그 유명한 구절에서 장차 오실 구원자가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는 목자와 같은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고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이사야 40:10-11).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자가 없으므로 그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다"(34:5)고 한탄하면서, 이 이유가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34:2) 때문인데, 이제 주 여호와께서 친히 그들의 목자가 되어 좋은 꼴을 먹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34:1-15). 시편 23편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신앙인들에게 큰 위로와 평안을 주는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드디어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동방박사들은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마태 2:6)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께서는 자신이 바로 그 목자임을 선언합니다. 요한복음 10:10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렇게 말씀하신 후,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로 선포하십니다(11, 15절). 성서에서 '선한 목자'라는 말이 나오는 유일한 곳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우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리라고 선포합니다(계시록 7:16-17).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메시아가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선한 목자'라는 이 믿음은 하나님의 본성이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라는 구약성서의 신학에 기초해 있습니다. 시편 25:6에는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서 '긍휼하심'은 히브리어로 '라하민'입니다. '인자하심'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지금 시편 기자는 주님께서 먼 옛날부터 변함없이 베푸셨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해 주십사고 빌고 있습니다. 바로 이 '라하민'과 '헤세드,' 즉 여호와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위해 오실 메시아가 선한 목자일 거라는 믿음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가장 많이 노래하는 성서는 역시 시편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편 40:11).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편 59:17).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편 103:13).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시편 116:5). 이사야 선지자도 멸망당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이사야 49:13-15). 하나님께서 자신을 여성적 은유로 부르시는 구절입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이사야 54:7-8). 그러므로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이사야 55:7)고 이사야는 이야기합니다. 바로 이런 구약성서의 전통 위에서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마태 5:7)이라고 선포하시며 그것을 삶으로 온전히 보여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비난하자,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마태 9:13). 같은 연장선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고 질타하십니다(마태 23:23).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성서가 말하는 긍휼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동정'이 아닙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를 이해하고 그를 구원하기 위해 그의 아픔에 참여하는 행위가 긍휼입니다. 영어로 긍휼은 "compassion"인데 '함께'(cum) + '고통 받다'(pati)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긍휼은 고통이 있는 곳으로, 상처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 그 아픔과 두려움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긍휼은 '의도적인 동일시'입니다. 고통 받는 자와의 동일시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긍휼을 베푸는 대상에 원수와, 은혜 갚을 줄 모르는 자와, 악한 자들까지도 포함시키셨습니다(누가 6:36). 이러한 긍휼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고통 받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애틋한 마음,' 이 마음을 본성으로 품으셨기에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카타콤은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초대교인들이 숨어 살던 지하묘지입니다. 당시 어떤 교인들은 카타콤에서 태어나 카타콤에서 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지하묘지의 벽에다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발각되어 죽임 당할지 모르는 불안과 공포의 시간 속에서 그들은 벽에다가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카타콤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즐겨 그린 그림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선한 목자' 그림입니다. 실로 카타콤에는 많은 선한 목자 벽화들이 그려졌습니다. 주님이 선한 목자라는 도상은 요한복음 10:11의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는 구절과 누가복음 15장 3-6절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비유가 합해져 완성됐습니다. 한 젊은 목자가 양을 어깨에 메고 있는 모습의 그림이 있습니다. 왼손으로 어깨의 양을 붙잡고 있는데, 오른 손으로는 우유 통을 들고 있습니다. 아직 어린아이와도 같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주께서 신령한 젖을 먹여주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목자 주변에는 여러 양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습니다. 단지 목가적인 이상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 카타콤의 선한 목자 벽화들은 그리스-로마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양을 어깨에 메고 있는 모습은 그리스의 아르카익 시대에 유행하던 <송아지를 멘 남자> 조각의 구도를 그대로 닮았습니다. 이 남자를 그리스어로 '모스코포로스'라고 하는데, 기원전 6세기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왜 송아지를 힘들게 어깨에 짊어지고 있을까요? 아테나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려는 중입니다. 비슷한 시기의 다른 조각들에는 송아지가 아니라 숫양을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모습들이 나옵니다. '숫양을 멘 남자,' 소위 '크리오포로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숫양을 옆에 끼고 있을까요? 양치기들의 신이라는 헤르메스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함입니다. 사실 헬레니즘과 로마에는 수많은 양치기 조각상들이 있었습니다. 이것들이 초기 기독교 미술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조각이나 그림에서 어깨에 양을 메고 있는 분은 더 이상 그 양을 신에게 제물로 바쳐 자신의 안위와 복락을 빌려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려는 분이었습니다. 어두컴컴한 카타콤에 숨어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희망과 위안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이 '선한 목자' 예수님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단순한 취미나 예술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절실한 신앙의 표현이요 가장 간절한 희망의 노래일 것입니다.

이후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예수님은 더 이상 남루한 옷을 걸친 목동이 아니라 화려한 옷을 입은 절대자가 됩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교분이 두터웠던 독일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선한 목자' 그림은 다릅니다(1550년경. 21 x 14.3cm. 독일 에르푸르트 앵거 뮤지엄 소장). 다른 많은 화가들의 선한 목자 그림과 달리 이 그림이 특별히 주목을 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목자가 입은 남루한 의복과 몰골 때문입니다. 이 그림을 소개한 전창림 교수는 "오랜 시간 강을 건너고 숲을 헤치면서 도중에 늑대를 만나기도 했는지 옷은 다 해어지고 고생한 모습"이 역력하다고 말합니다(국민일보 2018.3.2., '전창림의 영화로 여는 성경묵상'). 이 땅에 계셨던 예수님, 지금도 자신의 목숨을 버려 잃은 양들을 찾아오시는 선한 목자 예수님을 가장 닮은 그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역성서의 히브리서 4:15절을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체휼하다'는 말을 다른 성서들은 '동정하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좋은 번역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쉽습니다. 체휼은 몸 '체'(體) 자에 동정할 '휼'(恤) 자를 합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체휼이란 '자신이 직접 몸으로 겪어 보았기에 상대방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여 가지게 된 사랑의 마음'을 뜻합니다. 긍휼(矜恤)이라는 단어보다 더 체험적인 면이 강조된 말입니다. 사실 동정할 '휼'(恤)자가 들어간 한자는 꽤 많습니다. 지금은 잘 쓰지 않지만 '불쌍히 여기어 돌보아준다'는 뜻의 고휼(顧恤) 혹은 애휼(愛恤)이 있고, 곤궁한 사람을 돕고 구제한다는 구휼(救恤), 궤휼(饋恤), 무휼(撫恤), 혹은 연휼(憐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단어에 공통되는 휼(恤)이라는 한자를 가만히 살펴보면 은혜와 감동이 밀려옵니다. 동정할 '휼' 혹은 돌볼 '휼' 자는 마음 심(心)변 옆에 피 혈(血)자가 붙여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가슴 속으로 피가 흐르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지극하면 가슴 속으로 피를 다 흘리겠습니까! 예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가 몸소 우리의 고통과 연약함을 겪으셨기에 자기 가슴 속에 피가 흐르는 애통한 마음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며 경건히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이 거룩한 기간에, 이 세상의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애틋한 마음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죽어가는 모든 생명을 향해 자신을 던졌던 하늘의 뜨거운 사랑과 열정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점점 차가와지는 우리의 마음 밭에도, 고통으로 죽어가는 모든 것들의 아픔에 참여하는 새로운 사랑이 싹트면 좋겠습니다. 베드로전서 3:8은 우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라"(개역성서)고 권면합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우리가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긍휼의 그릇'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로마서 9:23). 그래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지니라"(롬 12:8)고 권면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32)고 권면합니다. 다가오는 한 주간에도 교우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긍휼하심'(라하민)과 '인자하심'(헤세드)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2018.3.4.)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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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