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십자가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시편 22:1-4, 고린도전서 2:1-8, 마가복음 15:1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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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오늘은 모든 교회들이 종려주일이자 고난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겸손히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자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나서, 결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에 의해 체포되어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은 후 십자가 사형 언도를 받습니다.

십자가는 인류가 고안한 사형방법 중에서 가장 잔인한 형틀입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최대한 느리게 만들어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을 느끼다 죽게 만든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로마제국이 그들의 식민지 지배를 위협하는 정치범들에게만 내리던 사형제도였습니다. 십자가의 세로형틀(pole)은 높이가 2미터를 넘지 않았습니다. 중세의 성화들을 보면 예수님이 아주 높은 십자가에 달린 그림이 많은데 이는 예수님에 대한 깊은 신앙심 때문이고 실제의 십자가는 높이가 매우 낮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형에 처해진 장소의 이름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해골이라는 곳,' 히브리어로는 '골고다'입니다(요한 19:17). 라틴어로는 '갈보리'(Calvary)입니다. 그런데 왜 처형장에 해골이 많았을까요. 나중에 들짐승들이 시신을 뜯어먹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는 그렇게 자신을 반대하는 정치범들의 시신은 거두지도 못하게 하면서 극도의 모욕과 멸시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신 후 그의 시신을 장사지낼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예외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사형수는 십자가의 가로형틀(transverse bar)만 지고 골고다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에 도착하면 옷을 다 벗긴 후 그 가로형틀에 죄인을 누이고 손목이나 어깨를 끈으로 단단히 묶거나 혹은 손에 못을 쳐서 고정시킨 다음에, 파티불룸(Patibulum)이라는 일종의 기중기로 사형수와 가로형틀을 들어 올려 세로형틀에 고정시킵니다. 세로형틀에 발판은 없고 중간쯤에 쐐기 못이 하나 있어 사형수의 엉덩이가 걸쳐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제 사형수의 발을 끈으로 단단히 묶거나 혹은 아래로 꺾어 못을 치면 끝납니다.

그 상태로 사형수들은 몇날 며칠을 십자가에 달려 서서히 죽어갑니다. 종종 몰약(沒藥, myrrh)이나 신포도주를 사형수의 입에 찍어줍니다. 목 마를까봐 배려해서가 아니라 사형수의 의식이 혼미해져 고통을 못 느낄까봐 입니다. 그래서 성서를 보면 예수님은 "몰약을 탄 신포도주를 주었으나 받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마가 15:23).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 무려 6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 달려 계셨습니다. 보통 장정들은 2~3일을 견디지만 예수님은 이미 심한 채찍질로 매를 맞아 몸이 많이 약해지셨던 것 같습니다. 의학적으로 십자가 위에서의 사망원인은 '점진적 질식사'(gradual asphyxiation)입니다. 어깨가 단단히 묶여있고 손과 발에 못이 쳐있는 상태에서, 물 한 방울 먹을 수 없는 인간은 서서히 숨이 막혀 죽어갑니다. 그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밑바닥 최악의 고통 속에서 운명하셨습니다.

'하나님도 고통을 당하시는가?' 이 질문은 초대교회에서 논쟁이 됐던 질문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고통을 호소하셨습니다. '하나님도 고통을 당하시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절대 고통을 당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 기독교란 주후 1~3세기에 지중해 일대에 번창했던 기독교 최초의 이단종파로, 플라톤의 영육이원론을 극단적으로 받아들여 영인 신은 결코 악인 물질, 즉 육신을 입고 올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영지주의의 일파인 에비온주의자들은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처음 내려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시기 직전에 떠났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이 고통을 당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처럼 육신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고통을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즉 하나님이 성육신 하신 것을 부정하는 영을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르며, 그들을 "분별하라"고 경고했습니다(요한 1서 4:1-3).

사람들은 보통 신을 영적이고 비물질적 존재로, 그래서 보이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무한한, 특히 전혀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전능한 존재라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그런 신은 성서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독일의 안네 프랑크와 동갑내기로 『안네의 일기』를 읽고 자기 민족의 죄악에 눈을 뜬 독일의 여성신학자 도로테 죌레(Dorothee Soelle)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을 고민하며 『고난』(Suffering)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책에서 하나님의 전능과 고난의 문제를 깊이 사색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런데 왜 세상에는 악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선하시고 또한 전능하시다면 세상에는 악도 고통도 없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시지만, 선하지 않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선하시지만, 전능하지 않아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또한 선하신데 어떻게 세상에 악과 고통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먼저 죌레는 '모든'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신학을 반대했습니다. 이런 신학은 언뜻 신앙심이 좋은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600만 명이나 학살당한 아우슈비츠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 600만 명 안에는 무고한 어린이들과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일제의 식민지배와 심지어 세월호의 침몰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서는 단 한 번도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의 노예살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고난과 억울한 피해사실을 하나님의 벌 혹은 시험, 사랑의 연단이라고 말하는 것을 죌레는 기독교인의 '자기학대'(masochism)라 불렀습니다. 자기학대, 즉 '마조히즘'이란 복종함에서 기쁨을 느끼는 심리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종종 불의한 것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죌레는 이런 식의 자기학대가 하나님을 '가학하는 하나님,' 즉 '사디스트'(sadist) 하나님으로 만든다고 비판합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학대함으로써 만족을 얻는 분인 것처럼 만든다고 경계합니다. 이런 하나님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죌레는 "만약 당신이 인간이 당하는 고난을 구체적으로 알면 결코 고문하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신 그는 "악은 주소를 가지고 있고 전화번호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죌레는 이 말을 하면서 "Cyclone Beta"나 "IG-Farben Company"와 같은 회사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이 회사들은 아우슈비츠에서 사용된 독가스를 생산하던 회사들입니다. 죌레는 고난에는 사회적 원인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모든 고난을 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에 결단코 반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죌레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고난을 당했다고 말하는 신학을 반대합니다. 이런 신학은 언뜻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자칫 하나님이 구원을 베풀기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의 희생을 계획하거나 방치한 '아동학대의 범죄자'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다고 우려합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사이의 관계를 고심하던 죌레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기록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1986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엘리 위젤의 생환기록 『흑야』(The Night)입니다. 지난 2월 18일 주일에 소개했던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하루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SS 대원들이 강제노동을 막 끝내고 돌아온 유대인 포로 전원을 광장에 집합시킵니다. 규율을 어긴 세 남자를 공개처형 하기 위해서입니다. 빵을 훔쳐 먹은 죄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는 나이가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수 천 개의 눈동자가 그 아이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 아이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입술은 꽉 깨문 채였습니다. SS에 협조하던 유대인 간수도 차마 그 아이의 목에는 밧줄을 걸지 못했습니다. 세 명의 SS대원이 그 일을 대신했습니다. 그 때 엘리 위젤의 뒤에 서 있던 어떤 사람이 나직이 묻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지? 그가 어디 있냐고!' 상관의 지시가 떨어지자 세 개의 의자가 굴러 떨어집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숨이 멎습니다. 이미 쇠약해져 있던 두 성인 남자는 금새 몸이 축 늘어졌습니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밧줄은 아직도 꿈틀거립니다. 아이의 몸이 너무 가벼워 아직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소년은 거기에 그렇게 매달려 30분 이상이나 죽음과 삶 사이에서 몸부림쳤습니다. 위젤의 뒤에서 다시 같은 사람이 더욱 격앙된 목소리로 나직이 묻습니다. '신이 어디에 있는 거야? 하나님이 지금 어디 있냐고!' 그 때 위젤은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지금 여기 있잖아. 바로 여기 교수대 위에 달려 있잖아!'

실제 아우슈비츠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가스실의 연기로 사라질 때마다 위젤은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가' 물었습니다. 아무 응답도 주지 않는 '신의 침묵' 앞에서 그는 절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교수대에 달린 그 어린아이에게서 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저 멀리 우주 밖에서 인간들에게 일방적으로 시험과 고난을 내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교수대 위에서 그 아이와 함께 매달린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죌레도 위젤을 따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 않고 십자가에 달려 계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십자가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랑은 십자가로 귀결된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이 세상의 응답이었다고 죌레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고통을 피하려 하지 않습니다. 불의와의 대결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아도 됐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요한 2:17, 새번역)이 그를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했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의 열정(passion)이 결국 그의 수난(The Passion)의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신에게 바쳐진 희생제물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무고한 희생양에 대한 폭력을 멈추는 사건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문학평론가이자 사회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Rene Girard)입니다. 돈키호테와 같은 유명 소설 속의 인물을 탐구하던 그는 무엇이 되고자 혹은 무엇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자율적이 아니라 타율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자발적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매개를 통해 일어나는 '비자발적 욕망'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어떤 비싼 제품을 욕망한다고 할 때 그것은 나 혼자 만들어낸 욕망이 아니라 타인이 가진 것을 보거나 광고를 통해 가지게 된 타율적 욕망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욕망은 '모방 욕망'이라는 유명한 테제를 지라르가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욕망하게 만든 그 타자 혹은 중개자가 욕망의 유발자임과 동시에 경쟁자, 나아가 방해자라는 사실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폭력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인간 사회 모든 폭력의 씨앗이자 '본질적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사회는 폭력의 악순환으로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류는 어떻게 사회를 유지해 왔을까요? 지라르는 어느 사회에나 모방 욕망을 제어하기 위한 '희생양 메커니즘'이 존재함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고대사회의 희생제사가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라르는 인류의 모든 희생제사는 폭력으로 폭력을 이겨내는 사회유지 장치임을 발견했습니다. 한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위기의 책임자로 한 사람을 지목하여 그 사회의 상호폭력을 그에게로 집중시킴으로써 다시 평화를 회복하는 메커니즘입니다. 지라르는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이 성서에도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도 깊은 반목과 갈등 그리고 폭력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희생제물이 필요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대제사장 가야바의 말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18:14에 의하면, 그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지라르는 인류사회의 모든 신화에서의 희생제사와 성서의 희생제사가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모든 신화에서 집단폭력의 희생제물은 '죄인'입니다. 하지만 성서에서 희생양은 오히려 '무고한 존재'입니다. 신화는 박해를 가한 자에게는 죄가 없고 오히려 희생된 자에게 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으로써 폭력으로 폭력을 감추고 있다는 진실을 숨깁니다. 하지만 성서는 진실을 드러냅니다. 성서는 십자가 사건에서 희생된 그리스도가 무죄일 뿐만 아니라 같은 방식으로 고난당하는 모든 희생양들이 무죄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사회의 모든 폭력의 악순환을 근원적으로 종식시키고, 이 땅의 모든 무고한 자들의 희생을 중지시키는 사건이고 상징인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모방 욕망과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평생의 연구를 통해 르네 지라르가 얻은 결론은, 기독교는 한물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얻을 가치가 있는 최고의 진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라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악의 뿌리, 즉 사탄이 어떤 존재임을 우리에게 환기시킵니다. 인간사회의 모든 폭력의 근원, 모든 악의 뿌리, 즉 성서가 말하는 '사탄'은 다름 아닌 우리의 욕망, 정확히는 우리의 '모방 욕망'이라고 그는 결론지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유혹자, 비난자, 이 세상의 통치자, 어둠의 왕자, 태초의 살인자인 사탄은 저 밖에 있는 어떤 유령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모방 욕망입니다. 거기에서 모방 폭력이 일어납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모인 군중은 흥분해서 너도나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오늘도 빌라도의 법정에서 누군가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있는 군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우리 모두는 우리의 욕망을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자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 가장 뭉클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손과 발에 못 박는 사람을 향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누가 23:34)라고 말씀하는 장면일 겁니다. 우리말에 '숭고하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한자로 숭고(崇高 / 독일어 das Erhabena, 영어 the Sublime)는 높을 '숭'에, 높을 '고'입니다. 그러니까 높고 높은 것이 숭고입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니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애." 이렇게 어머니의 사랑처럼 높고 높은 게 숭고입니다. 십자가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십자가,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로마제국의 형틀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추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꺼리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고전 1:23)이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는 숭고함이 있습니다. 인간의 통속을 뛰어넘는 숭고함이 있습니다.

십자가, 그것은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고전 2:4)입니다. 십자가, 그것은 우리의 "옛 사람"(롬 6:6)이 그리고 우리의 "정욕과 탐심이"(갈 5:24) 못 박혀 우리를 모방 욕망과 모방 폭력의 영원한 사슬에서 해방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신다는 연대의 상징입니다. 십자가,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원수된 것을 소멸하시고(엡 2:16)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화목하고 화평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골 1:20)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고후 13:4). 이러한 십자가를 귀에만 걸지 말고, 가슴에만 매달지 말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등에] 지고"(누가 9:23) 주님을 따라가는 거룩한 성도들 되시길 기원합니다. (2018.3.25.)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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