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성경이 말하는 성령뱁티즘(Spirit Baptism) (2)

김승진 목사 (침례신학대학교 역사신학·교회사 명예교수)

편집자 주] 한국교회에서는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았노라"고 하며 자신의 방언체험에 대해 의기양양해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렇게 말하는 그리스도인들 앞에서 자신을 "이류 크리스천"인 것처럼 생각하며 스스로 신앙적인 열등감에 빠지기도 한다. 진정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글에서는 성령뱁티즘이라는 개념에 대해 혼란을 가져오게 된 역사적인 배경을 검토해 보고, 성경이 말하는 성령뱁티즘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III. 성경이 말하는 성령뱁티즘

성령의 바람
(Photo : ⓒ 베리타스DB)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런데 과연 성경에서는 성령뱁티즘이라는 말이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 성경에서는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 혹은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푼다"는 말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 신약성경에는 성령뱁티즘에 관한 표현이 일곱 번 등장하고 있다. 복음서들에서 각각 한 번씩 네 번(마 3:11-12, 막 1:7-8, 눅 3:16-17, 요 1:32-34), 사도행전에서 두 번(행 1:4-5, 행 11:15-18), 그리고 서신서에서 한 번(고전 12:12-13) 사용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그러한 표현이 사용된 성경구절들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한다.

1. 복음서들

(마 3:11-12) "나(침례 요한-필자 주)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뱁티즘을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예수 그리스도-필자 주)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뱁티즘을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막 1:7-8) "그(침례 요한-필자 주)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뱁티즘을 베풀었거니와 (예수 그리스도-필자 주)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시리라."

(눅 3:16-17) "요한(침례 요한-필자 주)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뱁티즘을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예수 그리스도-필자 주)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뱁티즘을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 1:32-34) "요한(침례 요한-필자 주)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예수 그리스도-필자 주)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뱁티즘을 베풀라 하신 그이(예수 그리스도-필자 주)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예수 그리스도-필자 주)가 곧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예수 그리스도-필자 주)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공관복음서들(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모두 침례 요한이 했던 말 가운데, 자신은 "물로 뱁티즘을 베푸는데," 자신보다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실 것"(마3:11, 막 1:8, 눅 3:16)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 위에 머물러 있었다고 침례 요한이 증언하면서, 예수님이 자신에게 하셨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예수 그리스도-필자 주)가 곧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는 이인 줄 알라"(요 1:33)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공관복음서들과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시는 주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복음서들에서 언급된 "(예수님께서-필자 주)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실 것이다"라는 말씀에는,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 자들이 방언을 할 것이라든지 어떤 육체적이고 가시적인 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 전혀 없다.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으면 능력이나 권능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도 전혀 없다. 그러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뱁티즘을 베푸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불로 뱁티즘을 베푸실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떤 이들은 그것을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불의 혀같이 갈리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행 2:3)라는 구절과 연결지어서 설명을 하기도 하는데, 전혀 문맥을 무시한 억지 해석이다.

필자는 바로 이어서 등장하는 말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눅 3:17)는 말씀에 그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시리라는 것은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리라"는 말씀과 연결되고, 불로 뱁티즘을 베푸시리라는 것은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는 말씀과 연결된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불뱁티즘(Fire Baptism)은 쭉정이인 불신자들(non-believers)이 받을 영원한 심판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고, 성령뱁티즘(Spirit Baptism)은 알곡인 신자들(believers)이 받을 영원한 구원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침례 요한은 복음서의 네 곳에서 "(예수님께서-필자 주)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실 것"을 예언하면서, 예수 믿는 자들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아 구원(Salvation)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께서-필자 주)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시리라"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방언을 하게 할 것이라든지, 신비스러운 특별한 능력을 받게 할 것이라든지, 두 번째 축복을 받게 할 것이라는 의미로 말씀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 것"은 예수 믿은 신자가 죄사함을 받고 거듭나서 구원받아, 마치 물뱁티즘 받는 자가 강물에 빠뜨려지듯이 성령의 강물에 풍덩 빠뜨려져서 영적인 삶을 시작(개시, initiation)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차원에서 말하면," 회개하고 예수 믿는 것은 죄인인 인간이 복음 앞에서 긍정적으로 반응을 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요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 차원에서 말하면," 예수님께서 죄인인 인간에게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시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필자 주)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시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중생(regeneration)이요 칭의(justification)요 구원(salvation)인 것이다. 구원받은 후에 후속적으로 성령을 받게 된다든지, 방언을 하게 된다든지, 신비스러운 능력을 덧입게 된다든지, 신유와 같은 기적을 행하게 된다든지 하는 의미로 그 말씀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것은 장차 신자들이 계속적으로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 출발이 되는 영적인 사건이 성령을 받는 것이고, 결국 그것은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2. 사도행전 1장과 11장

사도행전에서는 "(너희가-필자주)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두 번 등장하는데, 한번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며칠 후에 성취될 일을 예언하신 말씀이고(행 1:4-5), 또 다른 한번은 사도 베드로가 가이사랴로 고넬료를 방문했을 때 일어난 일에 관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에게 보고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인용한 경우이다(행 11:15-18).

1) 사도행전 1장 4절-5절

(행 1:4-5) "사도와 함께 모이사 (예수 그리스도께서-필자 주)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성령-필자 주)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뱁티즘을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장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성령-필자 주)을 기다리라"(행 1:4)고 말씀하신 후, "요한(침례 요한-필자 주)은 물로 뱁티즘을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으리라"(행 1:5)고 말씀하셨다. 사도 누가는 자신이 쓴 복음서에서도 맨 마지막으로 동일한 예언의 말씀을 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성령-필자 주)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 24:49). 이 예언의 말씀들이 성취된 것이 바로 사도행전 2장 오순절날의 성령강림 사건이었다고 사도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누가복음 24장과 사도행전 1장 이외에도 요한복음(14장-16장)에서 자신이 승천하신 후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려보내실 성령에 대해 다양한 표현으로 제자들에게 예언하시고 약속하셨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성령-필자 주)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 14:17) "그는 진리의 영(성령-필자 주)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5: 26-27)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성령-필자 주)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 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성령-필자 주)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이 지상에 강림할 것이라는 모든 예언들이 성취된 것도 바로 사도행전 2장 오순절날의 성령강림 사건이었다. 결국 "(제자들이-필자 주)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으리라"는 사도행전 1장의 예언과 예수님 승천 후 하나님께서 보내실 보혜사 성령을 제자들이 받게 될 것이라는 요한복음의 다양한 예언들은, 동일한 사건, 즉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날 성령강림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들과 약속들이 그 날 한 곳(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약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음으로써" 성취가 된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 4절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서 사도 누가는 "그들이 다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았다"고 기록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고 적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다 성령으로 가득 채워졌다(가득 채워짐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 구절에서 사도 누가는 저희가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라고 기록했지 "성령뱁티즘을 받았다"라고 하지 않았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성령뱁티즘이라는 말씀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성령뱁티즘을 받는 것과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으로서 전혀 다른 차원의 신앙체험인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구절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성령을 받되"라는 표현을 삽입하여 읽으면 보다 쉽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다 ('성령을 받되'-필자 주)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고 읽으면, 예수님의 예언들(눅 24:49; 행 1:5; 요 14장-16장)과 성취(행 2:4)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사건에서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것"과 "성령충만을 받은 것"을 동시적으로(simultaneously)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받고 동시에 성령충만을 받은 결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누가복음 24장 49절에서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라"는 예언과 사도행전 1장 5절에서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으리라"는 예언은 동일한 것인데, 그 예언들이 오순절날에 제자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써"가 아니라 "다 성령을 받음으로써" 성취된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강림의 여러 예언들이 오순절날에 제자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써"가 아니라 "다 성령을 받음으로써" 성취가 된 것이다. 성령충만을 받은 것이나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한" 것은 성령뱁티즘과는 전혀 별개인 것이다. 이렇듯 성경이 말하는 성령뱁티즘은 소위 오순절 계통이 말하는, 방언을 동반하는 신비한 체험으로서의 성령뱁티즘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Advent of the Holy Spirit, 행 2:1-4)은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Incarnation, 육체적 출생,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1장)이 그러하듯이 역사적 사건이었다. 예수님이 두 번 혹은 세 번 출생할 수 없듯이, 오순절날 있었던 성령강림도 두 번 혹은 세 번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세계역사 혹은 기독교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성령시대"(The Age of the Holy spirit)를 여신 획기적인 단회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종말시대"(The Age of the Last Times)의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이 강림한 오순절은 성령을 모신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탄생하여 비로소 "교회시대"(The Age of the Church)가 시작된 특별한 날이었다.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여 비로소 지상에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그 교회는 오순절날 성령강림 시에 성령을 모신 자들의 공동체였다. 그 이후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신약성서적인 교회들(New Testament Churches) 역시 성령을 모신 신자들의 성령공동체였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구약성서에서 여러 예언자들에 의해 선포되었던 예언의 약속들이 성취된 사건이기도 했다. 사도 베드로는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예언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행 2:17-18, 21)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욜 2:28-29, 32).

선지자 이사야도 장차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그 자손들에게 부어주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사 44:2-3)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선지자 요엘과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부어주리라"(pour)고 예언했는데 그것이 오순절날 성취되었다. 이 외에도 구약성경에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것과 성령이 강림할 것과 성령공동체인 교회가 지상에 세워질 것에 관하여 여러 곳에서 예언되어 있는데, 그러한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후에 오순절날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성취가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의 한 곳에 모여 있던 약 120명의 제자들이 마음속에 성령을 모심(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예언들과 약속들이 성취되었다. 이러한 예언의 성취를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으리라"(행 1:5)고 예언하셨던 것이다.

사도행전 2장의 앞부분(행 2:1-4)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초로 120명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한 사건을 기록해주고 있는데, 뒷부분(행 2:14-36)은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날에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때 3,000명의 제자들이 구원을 받아 예루살렘교회에 큰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다. 베드로의 설교에 "마음이 찔린" 사람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하니,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뱁티즘을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The Gift of the Holy Spirit, '선물인 성령' 혹은 '선물로서의 성령'-필자 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8-39)고 말하였다.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행 2:40)는 베드로의 말에 순종했던 사람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사도 누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뱁티즘(물뱁티즘-필자 주)을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41).

약 120명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했던 사건은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단회적으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메릴 엉거(Marrill Unger)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순절성령강림 사건은 천지만물과 인간의 창조처럼, 단 한번 있었던 성육신처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처럼 반복될 수 없는(unrepeatable) 것이다. 다음과 같은 단순한 사실들로부터 (반복될 수 없는 사건-필자 주)이었음을 알 수 있다: (1) 오순절날에 하나님의 영은 오시고 도달하시고 교회를 자신의 거할 곳으로 정하실 수 있었다. (2) 오순절날에 하나님의 영은 주어지고 받아들여지고 교회에 맡겨질 수 있 었다. (3) 그 사건은 특정한 때에(행 2:1), 구약성서적인 특정한 모형의 성취로(레 23:15-22), 특정한 장소에서(예루살렘; 눅 24:49), 특정한 소수의 사람들 위에(행 1:13, 14), 새로운 질서를 소개하기 위한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고전 12:12-20) 일어났다. 새 질서가 한번 소개되었기 때문에 그 사건은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일어날 양상을 가지지 않았다(The event occurred at a specific time, in fulfillment of a specific Old Testament type, in a specific place, upon a specific few, for a specific purpose, to introduce a new order. The event did not constitute the continuing and recurring features of the new order once it was introduced. Merill F. Unger, New Testament Teaching on Tongues [Grand Rapids: Kregel, 1971], 17-8).

그런데 3,000명의 제자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회개하여 구원을 받은 사도행전 2장 후반부의 사건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보이지도 않았고, 3,000명 중에서 방언을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고 '성령의 선물'을 받고 그리고 물뱁티즘을 받았다. 꼭 3,000명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처럼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사건들은 교회역사상 반복적으로 일어났었고 그리고 오늘날에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오늘을 위한 규범"(Norm for Today)이 되는 사건은 후자(3,000명이 구원받은 사건)이지 전자(120명에게 성령이 강림한 사건)가 아니다(John R. Stott, Baptism and Fullness [London: Inter-Varsity Press, 1975], 28-30).

오순절 교파에서는 사도행전 2장의 전반부에 집중하여 방언체험을 동반했던 성령충만의 사건을 "성령으로 뱁티즘 받은 것"으로 해석을 하면서 오늘날의 성도들도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자가 특수화된 사건(particularized event)이었다면 후자는 일반화된 사건(generalized event)이었다. 사도행전 2장의 후반부 사건, 즉 베드로의 오순절설교와 그 설교에 대해 청중들이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했던 사건이 오늘날의 성도들이 따라야 할 규범이 되는 것이다.

2) 사도행전 11장 15절-18절

(행 11:15-18) "내(베드로-필자 주)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침례 요한-필자 주)은 물로 뱁티즘을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성령-필자 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베드로-필자 주)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사도행전 10장에서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욥바에서 보자기 환상을 보았던 사도 베드로가 하나님의 사자의 지시를 받아 가이사랴에 사는 경건한 백부장 고넬료를 방문하였다.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의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행 10:24)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을 때, 그 말씀을 들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던 사건을 그는 예루살렘교회에 보고하고 설명했다.

위의 본문은 복음이 유대인들의 경계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경외했던 고넬료를 비롯한 이방인들에게까지 처음으로 증거되었고, 이방인들도 "우리들"(할례받은 유대인들)처럼 성령을 받더라는 사실을 예루살렘에 있던 할례자들(유대인들, 행 11:1-2)에게 설명한 내용이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인 "요한(침례 요한-필자 주)은 물로 뱁티즘을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생각이 났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할례받은 유대인들)에게 그리하셨던 것처럼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선물로 주셨다고 말하였고, 그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repentance unto life)를 주셨다고 설명하였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했을 당시 고넬료 일행은 아직 확실하게 예수를 믿지 않았다. 그런데 베드로가 복음을 선포했을 때(행 10:34-43), 그 말씀을 듣던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려 오셨고 그리고 그들은 방언을 말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들, 즉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은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 성령을 받았고 그리고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였다. 그리고 그 후에 그들은 물뱁티즘을 받았다. 고넬료를 비롯한 이방인들도 할례 받은 유대인들처럼 성령을 받았던 사건을 사도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행 10:44-48)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뱁티즘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뱁티즘(물뱁티즘-필자 주)을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분명한 것은 비록 그들이 결과적으로 방언(이방인들이 쓰던 말과 유대인들이 쓰던 말이 달랐기 때문에 여기에서의 방언은 사도행전 2장에서와 같이 언어로서의 방언, 즉 외국어 방언일 가능성이 많다-필자 주)을 말하기는 했지만, 사도 누가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우리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성령을 부어주셨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들(이방인들)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드로는 그들이 방언을 말했던 것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 베드로가 강조했던 요점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어서 "성령의 선물"(성령이라는 선물, The Gift of the Holy Spirit)을 받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도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았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어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은 그 이방인 신자들에게 물뱁티즘(Water Baptism)을 베풀었다는 사실이다.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뱁티즘 베풂을 금하리요?"(행 10:47)라고 말한 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뱁티즘(물뱁티즘-필자 주)을 베풀라"(행 10:48)고 명하였다.

위에서 인용한 사도행전 10장과 11장의 성경말씀에 의하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는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을 받은 것이고,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은 것이고, "생명 얻는 회개," 즉 회개함으로 생명을 얻은 것이고, 그러한 신앙적인 체험을 한 신자들에게 그들의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물뱁티즘을 베풀었다는 사실이다. 성령뱁티즘을 받은 결과로 방언을 말하게 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방언을 말했기 때문에 성령뱁티즘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말은 성령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엄격히 말하면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사실은 예수의 영을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의 영이 곧 성령이 아닌가?

예수를 진심으로 믿을 때, 예수의 영을 영접하는 것이고 그래서 성령을 받는 것이고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뱁티즘(Spirit Baptism)을 받은 신자가 신앙고백의 표현으로 물뱁티즘(Water Baptism)을 받는 것이 신약성서적인 순서인 것이다. 여기서 물뱁티즘은 신앙고백을 분명하게 하는 신자에게 베푸는 "신자의 뱁티즘"(Believer's Baptism)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령뱁티즘을 받은 적이 없는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에게 물뱁티즘을 베푸는 것(유아세례, Infant Baptism)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적인 출생을 아직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계속)

이인기 ihnklee@veritas.kr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7] 중세교회 대중들의 신앙생활

중세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스콜라주의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콜라주의 문헌들은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것을 읽거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6] 중세 신학의 대략적 지도: 서방의 '스콜라 신학'과 동방의 '비잔틴 신학'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