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기고] 성경이 말하는 성령뱁티즘(Spirit Baptism) (4)

김승진 목사 (침례신학대학교 역사신학·교회사 명예교수)

김승진
(Photo : ⓒ 침례교신학대학교)
▲김승진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편집자 주] 한국교회에서는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았노라"고 하며 자신의 방언체험에 대해 의기양양해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렇게 말하는 그리스도인들 앞에서 자신을 "이류 크리스천"인 것처럼 생각하며 스스로 신앙적인 열등감에 빠지기도 한다. 진정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글에서는 성령뱁티즘이라는 개념에 대해 혼란을 가져오게 된 역사적인 배경을 검토해 보고, 성경이 말하는 성령뱁티즘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5. 전환기의 사건들을 기록한 역사서인 사도행전

1) 역사서인 사도행전

후속이론이나 두 번째 축복이론을 주장하는 편에서는 그들의 주장의 근거를 주로 앞에서 살펴본 사도행전의 몇 가지 사례들(사도행전 2장, 8장, 10장, 19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명심해야 할 사실은 사도행전은 "역사서"(historical book)라는 점이다. 주후 30년경부터 약 65년경까지 약 35년 동안 사도들이 어떻게 활동했고 성령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고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탄생했으며 어떻게 발전하고 확산해 갔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기록이다. 성령께서 활동하신 역사적인 사건들(historical events)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도 누가에 의해 기록된 책이 "사도행전"(The Acts of the Apostles)이다. 성령께서 사도들을 인도하셔서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간 것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성령행전"(The Acts of the Holy Spirit)이라고도 불린다.

사도행전이 "역사서"라는 말은 주후 40-50년경에 팔레스타인이나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발생했던 어떤 사건들이 2018년 대한민국에서도 똑같이 "발생해야 한다"(must happen)는 의미로 기록된 책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구원체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똑같은 방법과 똑같은 체험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바울이 엎드러졌고 빛을 보았고 눈이 멀어버렸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은 바울의 사적인 체험(private experience)이었지, 오늘날의 모든 성도들이 바울처럼 똑같이 체험해야 제대로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서인 사도행전은 "규범"(Norm)을 위해서 혹은 "규범적인"(normative) 목적을 위하여 기록된 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그 당시 그 상황에서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이나 에피소드들"(historical events or episodes)을 보여주고 설명해 주는 책인 것이다. 여기에 오순절 계통이나 두 번째 축복이론을 주장하는 신앙체계가 그 출발점부터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역사서를 역사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지 아니하고 교리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오류인 것이다. 신앙체계 혹은 교리체계는 역사서가 아니라 교리서, 다시 말해서 "서신서"(Epistle)를 통해서 형성되어야 한다. 서신서는 사도들이 신앙적인 체험을 하고 기도와 묵상을 거친 후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기록한 신학적 진술(theological statement)이다.

그렇다면 사도들의 "체험"이 규범이 되어야 하는가? 사도들의 "가르침"이 규범이 되어야 하는가? 물론이다. 사도들의 "가르침"이 규범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체계 혹은 교리체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신서들을 규범으로 하고, 그 규범에 입각해서 역사서, 즉 사도들의 체험들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죠셉 딜로우(Joseph Dillow) 박사의 말을 함께 음미해 보자:

우리는 사도들의 체험을 가르치는 비극적인 실수를 범하지 말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체험해야 한다. 사도들의 체험은 전환기의 책인 사도행전에서 발견되는 반면, 사도들의 가르침은 서신서들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이 서신서들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체험을 위한 안내서이다(Joseph Dillow, Speaking in Tongues [Grand Rapids: Zondervan, 1975], 66).

성서해석학적인 관점에서 말한다면 필자는 서신서가 역사서보다는 더 우선적인 권위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서신서에는 일반화된 규범, 교리, 신학 등이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역사서에는 특수화된 사건, 에피소드, 주관적인 체험 등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순절계통의 성령론 신앙체계는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체험은 주관적이다. 사람마다 체험이 다르고 체험은 상황에 따라 변한다. 다른 사람의 체험을 존중해 줄 필요는 있고 나의 체험을 소중히 여길 필요는 있지만, 체험 그 자체가 권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권위는 우리의 체험이 아니라 영감 받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R. C. Sproul, The Mystery of the Holy Spirit [Wheaton, IL: Tyndale, 1990], 157).

우리는 체험(experience)을 기준 삼아 계시를 보려고 해서는 안 되고, 계시(revelation)를 기준 삼아 체험을 평가해야 한다. 모든 체험은 객관적인 계시이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의해 점검을 받아야 한다. 사도행전에는 1장에서 28장까지 매 장마다 성령의 다양한 활동들이 기록되어 있다. 특수화된(particularized) 역사적인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다양한 체험들로부터 어떤 체계나 규범을 형성하여 일반화하려는(generalize) 오순절 계통의 신학적인 작업은 그 출발부터 모순이다.

2) 전환기의 사건들을 기록한 사도행전

그럼 왜 사도행전에는 네 가지 경우(행 2장, 8장, 10장, 10장)에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그리고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 것")이 별개의 체험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을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 한 가지 분명히 명심해야 할 사실은, 사도행전의 시대, 즉 AD 30-65년의 기간은 큰 전환기였다는 점이다. 이제 교회는 지상에 갓 태어났고 아직 튼튼한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 이 곳 저 곳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지중해 연안에 교회가 세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정경(Canon)으로 정착되지도 않았다. 무엇하나 제대로 정착되거나 확립된 것이 없었다. 옛 언약이 새 언약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었다.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어 가고 있었다. 회당 중심의 예배가 점차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공동체의 예배로 전환되어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복음이 급속하게 확산되어 가야 했다. 성령께서 절대주권적으로 특별한 시점에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섭리 아래 특별하게 역사하셨다. 아직은 기독교적인 여러 가지 진리들이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사도행전에는 성령께서 역동적으로 활동하셨던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질서정연한 원칙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런데 신약성서의 서신서 21권에서는 그 어디에도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그리고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 것")을 별개의 두 가지 체험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 둘은 동시적인 체험이요, 한 가지 체험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는 표현이다. 서신서들에서 예수를 믿은 자들은 성령을 모신 자들이라고 묘사된 몇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성령-필자 주)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성령-필자 주)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성령-필자 주)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성령-필자 주)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5-1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성령-필자 주)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갈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성령-필자 주)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그리고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 것")을 오순절 계통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분리할 수 없다. 예수를 믿는 것은 곧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요,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의 영을 영접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의 영이 무엇인가? 진리의 영이자 거룩한 영인 성령이지 않은가? 예수를 진심으로 나의 구주요 나의 주님으로 영접한 신자는 예수의 영인 성령을 이미 마음속에 모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은 신자는 성령을 이미 받은 자요,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은 자요, 소유권의 표시로 성령의 인침을 이미 받은 자요, 그래서 성령이 계속적으로 내주하는 자인 것이다.

또한 예수를 믿을 때 구원의 성령(Spirit of Salvation)을 받고 추후에 다시 능력의 성령(Spirit of Power)을 받는다고 설명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성령을 분할하는 것은 성령의 인격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의 인격체이신 성령께서는 죄를 깨닫게도 하시고 구원의 역사도 이루시고 온유케도 하시고 다양한 은사들을 베풀어 주기도 하시고 다양한 속성들의 열매도 맺게 하시고 능력과 기적도 행하시는 것이지, 구원의 성령, 사랑의 성령, 위로의 성령, 믿음의 성령, 능력의 성령이 각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분할상환(partial payment) 판매를 하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 믿을 때 30% 권리금으로 성령을 주시고, 물뱁티즘 받을 때 70%, 그리고 방언할 때 (소위 오순절계통에서 말하는 성령뱁티즘을 받을 때) 100% 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100% 전부를, 그것도 무료로 값없이 제한 없이 주신다. 요한복음 3:34에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for God gives the Spirit without limit)고 기록되어 있다.

3) 사도행전에 묘사된 네 가지 사건들의 양상

후속이론이나 두 번째 축복이론의 성서적인 근거로 제시되는 사도행전의 네 가지 경우들(사도행전 2장, 8장, 10장, 19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들을 관찰할 수 있다.

첫째로, 성경을 편견 없이 기록된 대로 읽어보면, 확실히 네 가지 사건들에서는 다양한 상황설명이 묘사되어 있지만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이 별개의 신앙체험으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는 점이다.

둘째로, 그렇지만 이 두 신앙체험들 사이의 상관관계는 각 사건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2장의 경우에는 오순절날에 제자들이 한 곳에 모였을 때 성령이 강림했고,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음과 동시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방언(다른 언어들)을 말했다. 8장의 경우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씀을 받았고, 물뱁티즘을 받은 후, 사도들이 안수하니까 성령을 받았는데 방언을 하지는 않았다. 10장의 경우에는 고넬료 일행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성령을 받았고, 방언을 했으며, 그 후에 그들은 물뱁티즘을 받았다. 19장의 경우에는 그들이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었고, 침례 요한의 뱁티즘만을 받았던 자들이었는데,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고, 물뱁티즘을 받은 후, 바울로부터 안수를 받으니까,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고, 방언과 예언을 했다. 다시 말해서 각 사건마다 체험들이 달랐고 체험의 순서가 달랐다. 어떤 일관성 있는 원칙과 순서에 의거해서 체험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상황에 따라 절대주권적으로 다양하게 역사를 하신 것이다. 다양한 체험들과 일관성이 결여된 역사적인 사건들로부터 어떤 논리적인 이론이나 교리를 형성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한 일이었다.

셋째로,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 사이의 시차가 점차로 좁혀져 가고 있다는 점이다. 2장에서는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을 만나 그 분을 따른 후, 오순절 성령강림까지 "약 3년 정도"의 시차가 존재한다. 8장에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 베드로와 요한이 파송을 받아 그들에게 가기까지 "수 개월"의 시차가 있다. 10장에서는 가이사랴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와 구제에 힘썼던 고넬료와 그의 친지들이 욥바에 있는 베드로의 방문을 "수일 동안" 간절히 기다렸는데, 베드로가 와서 설교하니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셨다. 19장에서는 바울이 침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때 "거의 동시적으로"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 이처럼 기독교의 역사가 진전되면서 두 신앙체험들 간의 시차가 점차 좁혀져 가고 있었던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넷째로,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이상의 네 경우 이외에는 사도행전의 전체 28장의 기록들 가운데에서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이 별개의 신앙체험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상의 네 경우는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독특한 경우에 독특한 섭리 속에 독특하게 역사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장은 오순절날의 성령강림, 8장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복음화(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의 지역적 감정적 장벽이 허물어짐), 10장은 이방인 고넬료 가정의 복음화(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민족적 장벽이 허물어짐), 19장은 유럽복음화의 전초기지로서의 에베소 복음화의 사건(아시아와 유럽 간의 지역적 장벽이 허물어짐)이다. 특히 8장과 10장의 사건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인들도 할례 받은 유대인 성도들처럼 성령 받은 사실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확증시켜 줄 목적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사도들이 관찰하고 목격할 수 있도록, 그래서 그 사실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보고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는 사도들이 도착할 때까지 절대주권적으로 "의도적인 지체"(intentional delay)를 했다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IV. 나오면서

이상에서 성령뱁티즘과 관련한 일곱 개의 성경구절들을 살펴보면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말의 신약성서적인 의미를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의미하는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중생(regeneration)하거나 회심(개종, conversion)하는 순간에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 그것은 모든(all)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누리는 보편적 체험이지, 일부(some)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비롯한 은사들(gifts)을 받아 특별한 권능을 받는 체험이 아니다. 특히 한 사람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한 몸,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공동체인 교회가 되는 것을 "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았다"(고전 12:13)고 말하고 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순간에 성령을 받는 것이고,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 것이고, 한 성령을 마시는 것이다. 성령공동체인 우주적 교회(universal church)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성령뱁티즘과 관련하여 한 가지 사실을 더 추가한다면, 앞에서 살펴본 7가지 성경구절에서 "(너희가-필자 주)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으리라"라는 문장이 수동태 미래형 서술문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문장이 "명령문"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이 사실은 회개를 하고 예수를 진정으로 믿으면 결과적으로 그리고 수동적으로 "성령으로 뱁티즘된다, 성령으로 뱁티즘 받게 된다"(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는 의미인 것이다. 오순절 계통의 어떤 사람들은 성령뱁티즘을 받기 위해서, 성령뱁티즘의 명백한 증거인 방언의 은사를 받기 위해서 기도할 때 간절히 사모하며 소리치며 발버둥치며 노력하라고 가르친다는데(심지어 방언의 은사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발성연습을 시킨다고도 한다-필자 주),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그 순간에 성령을 받게 되는 것이고, 동시적으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게 되어 한 몸, 즉 우주적 교회가 되는 것이다. 성령뱁티즘도 구원이 그러한 것처럼 인간의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예수를 진심으로 나의 구주요 나의 주님으로 영접한 성도(신자)는, 신성과 인격성을 완전하게 구비하신 성령께서 나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것을 믿기 바란다. 그리하여 이미 성령 받고 성령뱁티즘 받은 확신 속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기쁨과 사랑과 능력이 충만한 삶을 영위하기를 바란다. 성도들이 이미 예수를 믿고 마음속에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데, 마이크를 불어 바람소리를 내면서 "성령 받으라!"고 외치는 부흥사들이 고린도 교회에도 있었던가 보다. 이 문제로 신앙적인 혼돈에 빠져 있던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바울은 이렇게 반문했다: "너희(예수를 믿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필자 주)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Temple of the Holy Spirit)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예수를 믿을 때에 신자의 마음속에 계시는 성령께서는 다양한 역사를 이루신다. 성도들의 심령 속에 감동도 주시고 다양한 은사들도 주시고 능력과 기적도 행하시고 다양한 속성들의 열매도 맺히게 하신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의 역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도움을 입어야 한다. 마치 기차가 선로 위에 있을 때 자유롭게 달릴 수 있듯이, 성령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라는 궤도 위에서 활동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들이 객관적인 말씀에 의해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악령도 역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과 성령이 균형 잡힌 신앙이 건강한 신앙이다. 성령을 등한시한 채 말씀만 지나치게 의지하는 신앙생활은 메마르기 쉽다. 영적인 풍성함이 없고 활력이 없고 열정이 없다. 교리적인 논쟁을 일삼기 쉽다. 자칫하면 신앙적으로 차가워질 위험이 있다. 성도들 간의 사랑의 교제가 빈약해지기 쉽다. 동시에 말씀을 등한시한 채 성령만 지나치게 의지하는 신앙생활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 자칫하면 신비주의적인 신앙으로 흐르기 쉽다. 지나치게 주관적인 신앙으로 흐르게 되고 자기황홀지경에 빠진다. 어떤 경우에는 시한부 종말론에 빠질 수도 있다. 영적인 교만의 덫에 걸려서 다른 사람들의 신앙체험을 무시하기 쉽다. 현실을 망각해 버리고 도피적인 신앙이 되어버릴 위험도 있다. 악령의 희생물이 될 위험도 있다.

인간의 몸에 비유를 한다면, 말씀은 뼈대와 같고 성령은 살과 같다. 뼈대는 굵고 튼튼한데 살이 별로 없어서 바싹 마른 사람, 반대로 뼈대는 약하고 흐물흐물한데 살은 엄청나게 많이 쪄서 주체를 못하는 사람, 둘 다 문제다. 성령을 등한시하고 말씀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신앙, 그리고 말씀을 등한시하고 성령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신앙, 둘 다 건강하지 못한 신앙이다.

말씀과 성령은 분리될 수 없다. 말씀도 충만해야 하고 성령도 충만해야 한다. 필자는 우리 한국교회가 말씀과 성령이 균형을 이룬 교회, 말씀도 충만하고 성령도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한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권면하셨고,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하셨다. 반복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 믿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고, 성령뱁티즘을 받았고, 성령의 인침을 받았고, 그래서 그 성령이 신자의 마음속에 계속적으로 내주해 계신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 된다(엡 4:30, 죄를 반복적으로 지으면 인격이신 성령은 근심하신다-필자 주). 그리고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한다(살전 5:19, 필자는 한번 신자의 마음속에 들어온 성령이 소멸하여 없어져 버린다고는 보지 않는다. 여기서 소멸케 한다는 의미는 사람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서 정작 주인이 되어야 할 성령을 억제하여 전혀 활동할 수 없게 만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필자 주). 이제 남은 것은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성령충만함을 받아서 더욱 거룩한 성도가 되고 더욱 능력 있는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이미 성도의 마음속에 임해 계시는 성령님이 주인으로서 왕성하게 활동하시도록 성도가 "믿음으로 기도하고 순종할"(Prayer and Obedience with Faith) 때 능력(Power)이 나타나는 것이다. 방언의 은사를 체험했다고 해서 그래서 소위 성령뱁티즘을 받았다고 해서 능력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느낌(feeling)이나 감정(emotion)일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하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갈 5:25). 그리고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갈 5:18). 우리가 하나님 품에 안길 때까지 평생토록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인격체이신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두 번째 축복만이 아니라 세 번째, 네 번째, 일곱 번째, 아니 수십 수백 번째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체는 지속적으로 성령충만(주인이신 성령님에 의해 전인격적으로 지배되고 통치되고 있는 상태-필자 주)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명령문이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오직 성령으로 가득 채워져라"-필자 주,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공동번역). (끝)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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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7] 중세교회 대중들의 신앙생활

중세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스콜라주의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콜라주의 문헌들은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것을 읽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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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6] 중세 신학의 대략적 지도: 서방의 '스콜라 신학'과 동방의 '비잔틴 신학'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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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5]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의 터전을 마련한, 아우구스티누스!

"서방신학은 동방신학보다는 출발이 좀 늦었으나 곧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교부들이 주축이 되어 착실하게 발전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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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4] 카르타고 학파의 거침없는 변증과 교회론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의 신학을 오늘날 살피는 것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이들의 신학은 현실적이고 참여적이고 실존적이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