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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통일의 집> 박물관 개관
6월 1일 오후 5시 수유동 <통일의 집>에서

입력 May 17, 2018 11:32 AM KST
moonikhwan
(Photo : ⓒ통일맞이 홈페이지 사진자료 갈무리)
▲문익환 목사

사단법인 <통일의 집>은 6월 1일(금)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통일의 집>(수유동527-30)을 박물관으로 개관한다. <통일의 집>은 문 목사가 24년간 살면서 우리나라의 민주와 통일을 위해 바친 노력이 새겨져 있는 곳이다. 박물관에서는 민주와 통일 관련 전시 및 교육이 이루어진다.

행사 관계자는 박물관 개관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애쓰셨던 문익환 목사님의 뜻을 기리고,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활동입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생신날인 6월 1일(금)을 기점으로 다양한 행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평화통일의 기운이 한반도에 풍성해지길 기원합니다."

아래는 <통일의 집>에 대한 소개이다. 글쓴이는 문영금 <통일의 집> 박물관장이다.

<통일의 집>의 시작

1970년 문익환 목사는 성서번역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한신대 교수직과 한빛교회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12년 동안 살던 한신대 캠퍼스 사택을 떠나야 했다.

문 목사의 부모님이 열심히 집을 보러 다닌 결과 도봉구 수유동 527-30에 작은 집 하나를 발견했다. 가오리 버스정거장에서 내려 산 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똑같은 모양의 빨간 벽돌 단층집 삼십 여 채가 옹기종기 한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1960년대에 상공부에서 직원을 위해 지은 집이라 '상공부 주택'이라고 불렸다.

부모님 문재린 목사, 김신묵 권사와 문익환, 박용길 내외, 세 아들 호근, 의근, 성근과 딸 영금 이렇게 모두 여덟 식구가 대가족을 이루며 살았다. 큰 방이 문익환의 서재, 침실 겸 손님접대실이고, 작은 방에는 부모님이 사셨다. 긴 방에는 아들 셋이, 부엌 옆 작은 방에는 딸이 살았다.

곧 흙바닥이었던 부엌을 높이고 화장실과 목욕탕 사이에 있는 벽을 헐어 생활에 편리하게 개조했다. 그 후로도 거실을 확장하고, 창문을 막고, 벽을 없애는 등 여러 차례 수리를 했다. 연탄아궁이에 불을 때던 것을 기름보일러에서 가스보일러로 바꿨다.

이웃이 함께 사용하는 지하수 급수공급에서 자가 양수기로 지하수를 끌어올려 사용했다. 이후 상수도공급으로 바뀌었다. 이 집도 지난 40여년의 거주형태 변천사를 그대로 거쳐 갔다. 서울의 주거형태의 변천과정에 따라 주변의 거의 모든 집이 다세대와 빌라로 바뀌고 그나마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집은 통일의 집과 옆집, 두 집뿐이다.

민주와 통일의 보고

문익환 목사는 94년 돌아가실 때까지 생의 마지막 24년을 이 집에서 살았다. 그는 통일의 집에서 공부하고, 사색과 기도, 글을 쓰고 많은 일들을 의논하고 계획했다. 손주들의 재롱도 보고, 피아노 잘 치는 둘째아들 반주에 노래도 불렀다.

부모님 모시고 사는 큰집인데다가 아내 박용길이 식구들 생일을 챙겼기 때문에 가족, 친척, 친구, 교회 교인들 등 손님도 많이 오고 잔치도 많았다. 특히 석방이 되신 날에는 많은 분들이 찾아와 북적거렸다.

가족들은 밥상에서 식사기도를 할 때는 언제나 어려운 이웃들과 나라에 대한 간구를 잊지 않았다. 문 목사는 밥상머리에서 우리말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했다. 또 꼭꼭 많이 씹어 먹어야 한다, 이 밥상이 차려질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수고한 것을 잊지 말고 고마운 마음으로 밥 한 톨도 남기지 말라고 했다. 식구들은 한번 모이면 이야기가 끝이 없이 이어지곤 했다. 주제도 다양해 정치, 교육, 사회에서 문화 예술까지 이어진다.

이 집에서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문을 작성됐다. 박용길은 낭독용으로 정서를 하고 맏아들 문호근은 등사용지에 타자를 쳤다. 이때 갓 시집 온 맏며느리 정은숙은 시부모님과 남편까지 세 식구가 한꺼번에 잡혀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후 문익환 목사는 수도 없이 가택 연금을 당했으며, 가택수색과 체포를 당했다. 지금도 막내아들 문성근은 밤에 초인종이 울리면 깜짝 놀란다고 한다. 골목길 앞에 경찰 초소가 있었으며, 담당형사는 아침 문안을 와서 하루의 일정을 확인하고 동행하기도 하고, 못나가시게 지키기도 했다. 다음날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에는 전날 미리 다른 곳에 피신해 있기도 했다.

문익환 목사는 1994년 1월 18일 이 집 안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박용길은 <통일의 집>이라고 현판을 직접 써 붙여놓고 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누구든 찾아와서 통일에 대한 논의와 교육을 하는 장이 되기를 바라며 유품들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2011년 박용길 마저 세상을 떠나자 유족들은 민주주의 역사의 중요한 현장이었던 이 집을 보존하고, 후세에 남겨주기 위해 박물관으로 만들 계획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부모님의 뜻을 기리고 이어가는 것이라는 생각했다.

<통일의 집> 박물관으로 시민들에게 돌아가다

이 집에는 정말로 귀중한 자료가 2만5천 여 점 이상 남겨져 있다. 문익환 일가는 1946년 만주에서 월남하여 한국전쟁 중에는 제주도, 거제도로 피난을 다녔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이사를 다니던 와중에도 30년대 성경, 40년대 문익환이 쓴 연애편지와 전쟁 중에도 오고 간 편지, 11년 넘게 감옥을 오고 간 수천통의 편지들, 성명서, 사진, 서예품, 미술작품, 서적, 각종 유품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간직했다.

문익환 가옥은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16년 가옥의 보존과 박물관 만드는 일을 담당할 사단법인 <통일의 집>을 발족했다. 어려움도 많았다. 여덟 식구가 살 때도 큰 불편을 모르고 살았는데, 박물관 요건에 맞추기에 집이 너무 작았다.

또한 유품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는 항온, 항습이 되는 수장고 마련 등 갖추어야 할 것이 많다. 유품의 훼손 상태가 심각해 보존처리를 해야 하며 자료 정리와 목록화 작업, 디지털 아카이브까지 할 일도 많다.

문익환 목사가 관련된 사건이 크게 세 가지인데 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과 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명예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89년 방북했던 사건은 아직도 보안법이 살아있어 명예회복이 어렵기만 하다. 그 뿐만 아니라 무슨 때만 되면 종북 시비에 휘말려 왔다.

지난 보수정권 9년간은 숨도 크게 못 쉬고 있던 상황 속에 내놓고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기도 어려웠다. 독립운동, 민주화운동과 달리 통일운동은 아직도 사회적 합의와 역사의 평가가 내려지지 않았다. 그러기에 젊은 세대들은 문익환 목사를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준비를 해야 했다.

마침 2018년은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작년 가을 문익환 탄생100주년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지난 12월, 집에 있던 유품들을 자원봉사자들이 3일에 걸쳐 일일이 기록하고 포장하여 한신대에 옮겨두었다.

땅이 녹기 시작한 3월 5일 착공식을 가지고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 방향은 문익환 목사가 살아계셨던 1990년대 초반의 모습을 최대한 복원하는 것이다. 박물관 요건에 필요한 방습, 보온, 냉방시설, 화재, 방범, 조명 등 박물관에 필요한 요건들을 갖춘 건물로 만들 예정이다.

2018년 6월 1일 100년 생신, <문익환 통일의 집> 박물관의 첫 선

지난 70여일 동안 급하게 글을 올리다 보니 미흡한 점이 많았음에도 글이 좋았다고 해 주시는 이들이 많았다. 김형수 작가의 노고에 고마움을 전한다.

천 명 가까이 펀딩에 참여해 주었고 처음 목표액에 7배나 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문익환 목사와 박용길 장로를 사랑하며 두 분의 뜻이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모인 것이리라.

연재된 글들은 모아서 6월 1일에 작은 책자를 만들 예정이다. 이번 스토리 펀딩은 3월 25일 에 끝난다. 후원에 참여하길 원하거나 박물관 건립 소식이 궁금하면 홈페이지 '문익환.닷컴' 또는 페이스북에서 '문익환' 또는 '통일의집'을 찾아보면 된다. 전시 해설사와 유물 등록 등의 일을 함께 할 자원봉사자도 모집하고 있다.

"한반도에 따뜻한 봄날이 다가오는 것 같아 마음이 설렌다."

올봄에는 늦봄 문익환과 봄길 박용길이 염원하던 민주와 통일의 잔치가 열렸으면 좋겠다.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단칸방 서재 | 문익환

단칸방

선비의 서재라서

아내의 살내음이 글자마다 배었다.

외면하고픈 생각들엔

장난기 어린 아이놈들의 눈웃음이

고이고......

손때 묻은 나의 분신(分身)들

위엔

털어도 털어도 다시 날아드는

생활의 먼지가 섭섭잖게 쌓인다.

주름진 눈길로

아내의 귓바퀴에서

한 오리 두 오리 저녁 노을을

주워 담으면

책 갈피 갈피에선 끼득거리는 소리

들려 오고......

흐려 가는 눈을

창 너머 하늘 끝으로 보내면

단산한 여인의 태 속만 같던 방

하나 가득히

검은 바다가 설레며

태양이 때아닌 신랑처럼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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